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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74화 (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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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딜런 님?”

마법사들은 지금 상황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원래 인질극은 시간이 생명이기에 김창은 그들에게 빠르게 상황을 설명해주기로 했다.

“잘 들어. 너희가 지금 당장 하이나 안 불러오면 이 새낀 죽는 거야. 이해됐나?”

그 말을 하면서 딜런의 배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리고 딜런이 발작하듯 외쳤다.

“뭘 멍하니 있어! 당장 하이나 님한테 알려! 나 죽는 꼴 보려고 그래!”

김창의 말은 별 효과가 없었지만 딜런의 말은 달랐다. 마법사들은 자기들끼리 뭔가 해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하이나에게 달려갔으니까.

그걸 보고서 김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가볼까, 인질 양반. 하이나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딜런이 크윽 소리를 내며 슬쩍 김창의 눈치를 봤다. 일단 붙잡혀 있긴 해도 손만 쓸 수 있다면 마법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러니 살짝 기회를 봐서 탈출하면······.

“···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력을 모으던 딜런이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김창이 무심하게 물었다.

“왜, 마법이 안 써지나?”

“그래······. 왜 이러는 거지? 이건 주문 봉쇄 마법이라도 걸린 게 아닌 이상······.”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딜런이 흠칫 놀랐다. 김창의 태도로 보건대 주문 봉쇄 마법에 걸린 게 맞았다. 그러면 누가? 설마 이 무식한 칼잡이가 그랬을 리는 없고.

“그 마법은 실력 차이가 아주 크게 나는 게 아닌 이상은 별 효과가 없을 텐데······.”

“그럼 한석구랑 너랑 실력 차이가 아주 크게 나는 모양이지 뭘.”

딜런이 고개를 돌리려다가 목이 졸려서 멈추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굉장한 수준의 마법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칼잡이는 분명 한석구라고 말했다. 이름만 들어도 그가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방인이라면 젊은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이루는 것도 가능할 터다.

“너, 너희는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하이나 님을 만나서 뭘 어쩌려는 거야?”

“뭘 어쩌겠냐.”

김창 일행은 인질인 딜런을 데리고 이동 중이었다. 마법사 대부분은 영주궁 안에서 일하는 중이었으므로 복도나 홀을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러나 김창이 워낙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사람들도 이게 뭔 일인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김창이 날붙이라도 들이밀고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냥 딜런의 목을 붙잡은 채로 가고 있을 뿐이라 이게 인질극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딜런 역시 하이나가 아니면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괜한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덕분에 이 기이한 인질극은 몹시도 조용하게 진행됐다.

“···모르겠으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야? 그쪽의 마법사는 설마 하이나 님께 전향하려고 온 건가? 내가 듣기로 원탁인가 하는 곳의 수장이 엄청 막 돼먹었다던데.”

얜 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티샬레가 뒤에서 큭큭 웃음을 참는 사이에 한석구가 딜런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그 막 돼먹은 놈이 나다, 이 새끼야. 그딴 소문은 누가 내는 거야?”

“···뭐? 그쪽이 원탁의 수장이라고? 그러면 하이나 님과 뭔가 협상을 하려고 온 건가? 그런 거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텐데?”

“협상은 뭔 얼어 죽을 놈의 협상? 그 새끼가 먼저 우리 애 건드렸으니 나도 당한 만큼 돌려주려고 온 건데.”

“하이나 님이 원탁의 사람을 건드렸다는 건가?”

“그래. 이정민이라고 알지? 여기 살던 애.”

딜런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설마 그 이방인의 복수를 하려고 온 거냐? 하지만 걘 내가 알기로 원탁 소속이 아니었는데?”

“어, 맞아. 근데 모든 플레이어는 원탁 소속이고 걔도 원래라면 원탁 소속이었어야 하니까 사실상 원탁 소속이었던 게 맞지? 그러니까 내가 대신 복수하러 오는 것도 정당한 일이고?”

“그게 뭔 개소리······.”

딱! 한석구가 이번에 딜런의 뒤통수를 때렸다.

“개소리라니, 자식아. 이게 왜 개소리야? 원래 애가 어디 가서 맞고 오면 어른이 가서 대신 때려주는 법이야. 모르냐? 하여튼 미개한 중세 놈들이 뭘 알겠냐.”

그건 애초에 사적 제재라서 현대 사회에서도 하면 안 되는데. 김창은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설명해주지. 우린 하이나 목이나 좀 따려고 온 거야. 이유는 각자 다른데, 어쨌거나 목적은 같아.”

“뭐, 뭘 따? 그게 무슨 과일도 아니고 따긴 뭘 따?”

“네 주인의 목. 금방 끝나니까 마지막 가는 길 잘 봐두라고.”

네 사람은 거대한 문을 마주 보고 섰다. 저 문 뒤에 하이나가 있다는 건 누굴 데려와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딜런은 문을 열기 전에 극악무도한 인질범들의 면면을 한 번씩 쳐다봤다.

다짜고짜 인질극을 시작한 칼잡이, 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복수하겠다는 마법사, 하이나의 애완동물을 죽여버린 요정.

“···대체 뭐 하는 조합이야?”

딜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말했다.

“내가 충고 하나 하는데, 너희가 얼마나 강하던지 하이나 님을 이길 수는 없을 거다. 그분은 그냥 마법사가 아니야. 무려 승천할 자라고.”

“승천할 자는 또 뭔데, 콱씨. 한 대 맞기 전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문이나 열어.”

한석구가 주먹을 들고 흔들자 딜런이 무식한 놈이라고 욕을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듣지 못한 건지 한 대 얻어맞는 일은 없었다.

“그럼 연다.”

아무래도 저 문은 아산트 섬의 마법사가 아니면 열 수 없는지 다른 사람이 밀어봤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가 마법이 걸려 있을 테고 그 정도는 한석구가 해제할 수도 있을 테지만 굳이 그런데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문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딜런이 밀어서 열렸다기보다는 저 스스로 움직이는 듯한 모양새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길게 뻗은 융단이었다. 좌우로는 석상이나 그림 등의 장식 등으로 가득했다.

바닥에 깔린 융단이나 좌우의 장식 등을 보면 하이나의 취향이 생각 이상으로 고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제법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마법사니 이런 사치 정도는 당연하게 부리겠지.

김창이 고개를 들어 정면의 옥좌를 쳐다봤다. 그건 말 그대로 왕이나 쓸 법한 화려한 의자였다.

하이나는 그 위에 있었다. 고고한 왕처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그 본질은 탐욕과 오만으로 가득 찼다는 걸 김창은 알고 있다.

“기어코······.”

하이나는 은색의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마법사였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호했지만 실물을 보니 확실히 여자였다.

그녀는 옥좌 위에서 눈만 굴려서 자신을 찾아온 건방진 침입자들을 쳐다봤다.

“날 찾아왔구나. 그래, 목숨 아까운 줄 아는 놈이었으면 내게 그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지도 않았겠지.”

“네가 집 주소 안 알려주고 도망쳐서 찾는 데 고생 좀 했다.”

김창의 말에 하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어디 사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더냐?”

“난 몰랐어, 자식아.”

“건방진 놈이로고.”

하이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뚝 선 그녀는 여자치고 키가 컸다. 아마 전사인 티샬레와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그녀가 물었다.

“이름을 고해라.”

“김창.”

“천박한 이름이군.”

말이 심한데.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자 딜런이 다급히 외쳤다.

“하이나 님!”

“오, 딜런. 너도 있었느냐. 그런데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부끄럽지만 이 무식한 칼잡이 놈에게 붙잡혔습니다! 부디 제게 복수할 기회를 주십시오!”

“흐음.”

하이나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런데 거기 같이 온 떨거지들은 뭐지? 너희는 초대한 적이 없다만?”

떨거지 소리에 발끈한 한석구가 말했다.

“나 원탁 수장인 한석구다. 네가 우리 애 괴롭혔다길래 복수하러 왔다, 왜.”

“우리 애? 복수? 아, 이정민을 말하는 모양이군. 하여튼 별 쓸모없는 놈.”

하이나가 이번엔 티샬레를 보며 말했다.

“그럼 너는?”

“나는 위대한 딜루키둠의 기수이자 어머니 나무의 자손, 또한 베르고니아의 유지를 잇는 자이니······.”

“네 자기소개는 안 궁금하다, 요정아. 이름이나 말해.”

“···티샬레요.”

“그래서 넌 뭐 때문에 왔지?”

티샬레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엄격한 얼굴을 연기했다.

“그거야 세상을 어지럽히는 당신을 벌하기 위해서지요.”

“넌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겠군. 그래, 그러면 너희 셋이서 날 상대하러 온 거냐?”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이나가 웃었다.

“셋이서 하나를 상대한다고. 내 생각엔 그 배는 데려와야 할 것 같은데.”

“하이나 님! 조심하십시오! 여기 있는 마법사는 저한테 주문 봉쇄 마법을 걸 정도로 상당한 실력자입니다!”

딜런이 외치자 하이나가 호오 소리를 냈다.

“그래? 그러면 딜런, 그 칼잡이를 잘 붙잡고 있어라.”

뜬금없는 명령에 딜런이 멍하니 있는 사이에 하이나가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빛이 맺혔다.

그게 하나의 마법이라는 걸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게 쏘아져 나가는 것, 그 모두가 일시에 이루어졌다.

빛은 화살처럼 곧게 나아갔고 그대로 딜런과 김창을 노렸다. 김창은 곧바로 딜런의 몸을 내던졌고 자신은 오른쪽으로 뛰었다.

덕분에 터진 건 딜런의 머리통뿐이었다. 순식간에 머리를 잃어버린 몸이 부르르 떨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값비싼 융단 위에 핏물이 번졌지만 하이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딜런, 잘 붙잡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 미친 새끼, 자기 부하의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벌컥 화를 낸 건 한석구였다. 자기 사람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의 성격상 하이나의 행동은 아주 역겨운 짓거리였다.

그러나 하이나의 태도는 여상했다.

“뭘 하긴? 부하에게 칼잡이를 잘 잡고 있으라고 말한 것뿐이지 않으냐? 그리고 딜런은 애석하게도 그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저거 아주 씹새끼네? 다들 가만히 있어. 저 새낀 나 혼자서 상대한다.”

싸우지 않아도 신성을 얻을 수 있나? 게임에서 공략 기여도가 없는 몬스터는 경험치를 주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신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자신이 대체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는가? 하이나가 어떤 나쁜 짓을 하든 말든 그건 알 바가 아니고, 중요한 건 신성을 얻느냐 마느냐다.

김창이 고개를 저으며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릴 때였다.

“그래, 네가 그 원탁의 수장이자 대단한 마법사라지? 그러면 네가 이방인 중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인 셈인데, 그 실력 좀 볼까?”

“그거 바라던 바다.”

하이나가 손을 들자 한석구 역시 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뭔가 말할 새도 없이 두 마법사의 마력이 거대할 정도로 커졌고 그것은 곧 반구 형태를 갖추어 마치 하나의 영역처럼 변했다.

티샬레는 저게 마법사들의 힘겨루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요정 왕국에도 뛰어난 마법사가 많기에 저런 걸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저만큼 거대한 힘겨루기는 오늘 처음 봤다.

마력과 마력은 서로의 영역을 없애버리겠다는 듯 서로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바닥이 갈라지고 거기서 일어난 돌조각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융단은 갈리고 주변에 있던 석상들 역시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거대한 방 안을 꽉 채운 두 개의 마력은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서로의 힘을 자랑했다.

한석구와 하이나는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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