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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구는 지금 회의실 안에 있었다. 그곳엔 원탁이라는 조직명에 걸맞게 둥근 테이블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랭커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회의를 할 때 쓰는 물건이었다.
물론 랭커들의 회의 참여율이 저조한 탓에 제대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 규칙을 정할 때 적어도 3명의 랭커가 모여야 회의를 열 수 있다고 정해뒀는데 회의에 참여하는 건 항상 한석구와 정복자, 둘뿐이었던 탓이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첫 번째 회의가 열렸다. 참가자는 한석구와 김창, 그리고 하오성.
그 모이기 힘든 랭커가 세 명이나 모였으니 이건 확실히 기록할 만한 일이다. 만약 누군가 회의록을 작성했다면 그 첫 부분은 이랬을 것이다.
“하오성 씨발 새끼.”
회의록의 시작은 한석구의 욕설이었다.
“망할 새끼.”
그다음도 또 욕이었고.
“등신 새끼,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새끼야, 사람이 어떤 자리를 맡았으면 열심히 하지는 않아도 자기 책임은 다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오성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냐······.”
“인마, 죄인 지키는 게 네 일인데 그걸 내가 하라 마라 말을 해야 하는 거냐? 그럴 거면 숨 쉬는 것도 나한테 물어보고 쉬지, 숨은 왜 쉬냐? 콱 코 막고 죽어버리지.”
하오성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줄곧 가만히 있던 김창이 말했다.
“의미도 없는 말싸움은 거기까지 하지 그러냐.”
“그래, 확실히 의미 없는 짓이긴 하지. 이런다고 도망간 놈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저 새끼 대가리에 마법을 날리면 내 기분은 나아질 것 같으니 그건 의미 있는 짓이 맞아. 차라리 그걸 해야겠어.”
이대로 두면 한석구가 하오성의 머리를 마법으로 날려버릴 것 같아서 김창이 중재에 나서야 했다.
“이런 쓸데없는 짓이나 하려고 나까지 부른 거냐? 지금 중요한 건 도망친 죄수 놈 잡는 거 아니야? 그 새끼 잡고 나서 쟤 머리 날려버리든 말든 하라고.”
하오성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석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서, 그 도망쳤다는 놈은 누구냐?”
김창이 묻자 하오성이 얼른 대답했다.
“김대걸.”
“걔가 혹시 제일 안쪽 방에 갇혀 있던 놈이냐?”
“그래, 맞아. 옛날에 복자가 잡아 온 놈인데 지하 감옥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지금까지 갇혀 있었지.”
“그런데 이번에 도망쳤고?”
“그래.”
생각해보니 내가 그 새끼 조심하라고 전에 한 번 경고한 적 있지 않나? 김창이 빤히 쳐다보자 하오성이 뭘 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왜?”
“나도 나중에 이 새끼 한 대 때려도 되나?”
“아니, 넌 또 왜 그러는데? 내가 뭘 어쨌다고?”
어쩌긴 새끼야, 분명 경고해줬는데 네가 안 들어먹었잖아. 물론 직접 경고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을 했으면 들어먹어야 하지 않나?
김창이 한심한 놈 보듯 쳐다보자 하오성이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대걸레 그 새끼 빨리 잡아 와야 해. 걔 아주 악질인 놈이야.”
대걸레라는 건 아무래도 김대걸의 별명인 듯했다. 한석구가 그에게 별명을 붙여줄 만큼 친하게 지냈을 리는 없으니 그건 분명 경멸의 뜻임이 분명했다.
김창이 물었다.
“걔가 뭘 어쨌는데?”
“그 새끼 옛날부터 게임 커뮤니티에서 맨날 혐짤 달리던 놈이야. 아무리 차단해도 매번 아이디 바꿔서 오거나 유동 분신술 하면서 분탕 치던 새낀데 걔 때문에 커뮤니티 경고 몇 번 먹었지 아마?”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이다. 현실의 억압된 욕구를 인터넷에서 해소하며 자신의 행동이 남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저열한 종류의 인간.
확실히 그런 놈이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큰일이라고 할 만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온갖 혐오스러운 사진을 올려대며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흐릴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터넷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리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이라고 해도 현실은 현실인 법인지라 익명 뒤에 숨어 나대는 찌질이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면 그런 놈을 대체 왜 지하 감옥에 가뒀으며 탈출한 것에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 것인가?
김창이 그 이유를 묻자 한석구가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 새끼 여긴 인터넷이 없어서 혐짤 테러 못 하니까 뭐 하고 다녔는지 아냐? 자기가 직접 사람 잔인하게 죽여서 그걸 길거리에 전시하고 그랬어. 미친 새끼, 사람들이 그거 보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는데 뒤에 숨어서 낄낄대는 모습 보니까 정말 역겹더라. 복자랑 나랑 그 새끼 잡으려고 얼마나 뺑이를 쳤는지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네. 걔 잡는데 몇 달은 걸렸던 것 같은데.”
한석구와 정복자가 나섰는데 김대걸을 잡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는 건 의외다. 어쩌면 김대걸이 은신술의 대가였던 것일까?
“마법사 스킬 중에 환영술 있는 거 알지? 그거 아무 공격도 못 하고 그냥 몸빵만 해주는 분신 불러내는 스킬이라 아무도 안 찍는 건데, 그 새낀 그거 찍어놔서 여기서 분신술 쓰고 도망 다니더라. 내가 살다 살다 현실에서 유동 분신술 쓰는 새낀 처음 봤다.”
그런 거라면 확실히 오래 걸릴 만했다. 김창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자 한석구가 말했다.
“걔 빨리 잡아야 해. 거의 몇 년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놈인데 지금 독이 바싹 올랐을걸? 어쩌면 어디 가서 대량 학살이라도 벌이려는 걸지도 몰라.”
인터넷에 혐오스러운 사진을 못 올리니 자기가 직접 만들려고 한 놈이니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다.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박대호는? 걔는 왜 진작 안 잡았나?
“저번에 보니까 박대호도 가죽 벗기고 놀던데, 걔도 좀 열심히 잡지 그랬냐.”
“···변명 같겠지만 걔 잡으러 갈 만한 사람이 없었어. 복자는 다른 일로 바빴고. 원래는 간수장인 저 새끼가 갔어야 하는데 맨날 처놀기만 해서. 아, 생각하니까 또 화나네. 이 새낀 하는 게 뭐지?”
아무리 바빴어도 걔 잡으러 갈 만한 시간 정도는 있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박대호의 실력을 생각하면 굳이 정복자를 보낼 필요도 없었을 것 같고.
한석구가 굳이 하오성 쪽으로 화살을 돌리며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걸 알기 때문이다.
김대걸은 빨리 잡아야 한다고 그리 날뛰면서 박대호는 그냥 뒀던 게 제가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일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지.
하지만 지금 와서 따져 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김창은 하오성을 구박하고 있는 한석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근데 걘 뭔 수로 도망친 거냐. 이정호한테 들으니까 거기서 도망칠 만한 재주는 없다고 하던데. 그래서 아직 잡혀 있는 거라고.”
하오성이 바로 대답했다.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말이지······. 지하 감옥의 구속구는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걸 벗을 방법이 없거든? 당연히 마력도 차단해서 마법사가 마법을 쓸 수도 없고 말이야. 강인한 전사가 착용하면 주기적으로 기력을 흡수해서 힘도 약하게 만들어. 대체 뭔 수로 탈출했지?”
“이 등신 새끼, 죄수가 도망쳤는데 이번엔 뭔 수로 탈출했는지도 몰라? 하, 내가 진짜 화병 나서 죽겠다······.”
한석구가 자기 가슴을 툭툭 두드리자 하오성이 억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구속구를 무력화한 방법이 뭔지 어떻게 아냐. 그건 마법사가 알아낼 일이지. 안 그래도 원탁에 마법사 애들 몇 명 불러서 무슨 짓거리를 한 건지 알아보라고 시켜놨어. 조금 있으면 결과 나올 테니까 너무 화내지 마라, 응?”
한석구가 여전히 불만스러운지 쯧 하고 혀를 찼다. 김창이 말했다.
“그럼 김대걸인가 하는 놈은 얼마나 강하냐.”
“좀 강하긴 한데, 네 상대는 안 될걸? 그 새끼 도망을 잘 쳐서 잡는 게 어려웠던 거지, 싸움을 잘해서 그랬던 건 아니야. 일단 찾기만 하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일단 찾긴 찾아야 한다는 거군.”
“그래. 하지만 찾는 게 문제야. 워낙 잘 도망치는 놈이라 찾기도 어려운데 그게 진짜인지 분신인지 알 방법이 없거든. 그래서 그 새끼 잡으러 갈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일단 애들 좀 풀어서 찾으라고 시켜볼게.”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찾아봤자 걔가 사고 치기 전에 못 찾을 것 같은데. 그리고 애들 괜히 풀었다가 걔네가 김대걸한테 당하면 골치 아파.”
“네 말도 맞긴 한데······. 그러면 어떻게 찾으려고?”
“일단 심민우 불러와.”
“걘 또 왜?”
“어디 갈 데 있으니까 불러오라고.”
“지금 당장 떠나려고? 물론 김대걸을 잡는 게 급하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하지 않나? 너 하이나랑 싸우고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김창은 문득 자기 몸을 쳐다봤다. 하이나와 싸우면서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멀쩡했다.
신성을 얻고 점차 반신에 가까워지면서 회복력도 증가한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면 괴물 같은 회복력이 아닌가?
아마 성기사인 정복자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조금만 더 신성이 늘어나면 칼에 베여도 금세 상처가 아무는 수준까지 갈지 모르겠다.
“괜찮아. 여기서 이야기하면 좀 쉬었더니 몸 괜찮아졌어.”
한석구는 그걸 허세 비슷하게 여긴 듯했지만 굳이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하오성을 향해 말했다.
“야, 가서 민우 데려와.”
“으, 으응? 내가 가서 데리고 오라고?”
“그러면 여기서 누가 가? 내가 가냐? 아니면 창이가 가?”
“아무나 가면 되지······.”
“그래, 아무나 가면 되니까 네가 가라고.”
하오성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진짜······. 나도 어디 가서 심부름하고 그럴 위치 아닌데.”
“어디 가서 심부름하고 그럴 위치로 만들어줄까? 그러면 조용히 갔다 올래?”
“그냥 한 소리야.”
하오성이 쩝 소리를 내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는 잠시 뒤에 심민우를 데리고 돌아왔다.
“절 불러오라는 걸 보니 또 어디 가야 하는 모양이죠? 이번에는 무슨 일입니까?”
뭔 일이 있을 때마다 택시 부르듯 불렀더니 심민우는 당연하다는 듯 무슨 일이 있다고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김대걸이 탈출했다는 걸 말해줄 수는 없어서 한석구가 대충 얼버무리는 가운데 김창이 말했다.
“샨토라고 아나? 그 근처에 차원문 열 수 있어?”
“샨토요? 알고 있죠. 그 왜 기분 나쁜 탑 있는 도시 아닌가요?”
얜 뭐 인간 네비게이션인가? 모르는 길이 없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혹시 그 탑 근처로 갈 수 있나?”
“갈 수야 있죠? 그쪽으로 열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바로 열게요.”
심민우가 늘 있는 일처럼 능숙하게 차원문을 여는 걸 보던 한석구가 물었다.
“탑이라면 저번에 우리 막내 구하러 갔던 거기 아닌가? 거긴 또 왜 가?”
“거기 가면 우리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어. 될지 안 될지는 반반이긴 한데 어쨌건 가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본다.”
“거기 누가 있는데?”
김창은 심민우가 연 차원문 속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대답했다.
“추적 마법의 대가. 자기 마누라 빼고 다 찾는다던데.”
그러면 추적 마법의 대가가 아니지 않나? 아니면 뭐 아내가 은신 마법의 대가인 건가?
한석구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