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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나? 한석구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곧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개눈깔이 범인이라고? 하지만 걘 플레이어잖아? 플레이어 중에 미친놈이 많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플레이어를 죽이고 다니는 놈이 있을 리가······.”
박대호나 김대걸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플레이어 중 일부는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플레이어를 건드리진 않았다.
누구든 원탁을 건드리면 반드시 복수한다는 철칙은 같은 플레이어를 대상으로도 지켜졌기 때문이다.
설마 개눈깔이 그걸 몰랐을 리는 없을 텐데 대체 왜?
“가능성은 두 가지야.”
김창이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뭔데?”
“첫째, 개눈깔이 원탁 전체랑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미친놈이거나.”
“···둘째는?”
“원탁을 건드려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뒷배를 얻었거나.”
한석구는 개눈깔이라는 인간이 혼자서 원탁 전체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미친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번 일을 벌인 이유는 후자일 것이다. 자신을 비호 해줄 강력한 뒷배를 얻었다는 것.
“하지만 그럴 만한 뒷배가 있긴 하나? 왕한테 가서 자기가 플레이어 죽였는데 뒤 좀 봐달라고 하면 미친놈이냐고 기겁할 것 같은데.”
“있겠지. 하이나 생각 안 나냐?”
한석구가 아 하고 탄식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는 지난번의 싸움으로 이 세상엔 플레이어 이상으로 강한 존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만약 개눈깔이 그런 존재와 붙어먹은 거라면 그건 확실히 곤란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이 정말 개눈깔의 짓이라는 보장이 없잖아. 어쩌면 하이나 같은 놈이 저지른 짓일지도 모르고.”
한석구의 말에 김창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내가 수사관도 아니고 칼질한 것만 보고 누가 범인인지 확신하는 건 어렵지. 어쩌면 개눈깔이 범인이 아닐지도 몰라.”
“그러면 이제 어쩌려고?”
“범인을 찾아봐야지.”
한석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의 그 마법사한테 다시 찾아갈까? 그래서 개눈깔 찾아달라고 해?”
“아니, 걔 찾아봤자 범행 현장 잡는 거 아닌 이상 의미가 없지. 만약 걔가 정말 범인이 아니라면 괜한 헛수고만 한 셈이 될 테고.”
“그럼······.”
“범인이 며칠 간격으로 플레이어를 죽이고 있는 걸 보면 이 새낀 원탁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얼마 뒤에 또 같은 사건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니 그걸 노려야 해.”
“···또 범행을 저지를 때 잡자는 거냐?”
“위험한 일인 거 알아. 하지만 그게 제일 확실해.”
원래 추리 소설을 보면 연쇄살인범을 잡을 때 단서가 없어서 다음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이번 역시 그런 경우였다. 개눈깔이 범인이라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는 데다 그 심증이라는 것도 확실하진 않아서 결국 다음 범행을 기다려야만 했다.
한석구 입장에선 플레이어 하나를 위험 속에 밀어 넣어야 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창의 말대로 그들은 수사관이 아니니까.
“하지만 누구를 노릴 줄 알고?”
“지금 정복자 취임식 때문에 애들 다 원탁으로 복귀했지? 그러면 취임식 끝나면 어디 가지 말고 원탁에서 대기하게 해.”
김창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나온 피해자는 김대걸과 허석인데 그들 모두는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건 범인이 혼자 다니는 플레이어를 범행 대상으로 삼는다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집단보다는 개인을 상대하기가 쉬울 테니까.
그러니 다음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선 플레이어들 전부를 원탁 안에서 보호해야 했다.
“그리고 한 명만 내보내. 그러면 범인은 걔를 노리겠지.”
“나쁘지 않은 작전이네. 그러면 미끼 역할은 누가 하는데? 너 아니면 나?”
“개눈깔은 우리 실력을 다 아는데 굳이 습격하려 들까? 나라면 안 그럴 것 같은데.”
“하기야 김대걸이나 허석을 노린 걸 보면 일부러 자기보다 약한 놈들만 공격하고 있긴 하네. 그러면 우리는 미끼 역할을 못 할 텐데 누굴 시켜야 하지?”
당연한 말이지만 미끼 역할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김창과 한석구가 뒤에서 지켜본다고 해도 개눈깔 정도의 실력자라면 순식간에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개눈깔이 노릴 만큼 적당히 약하면서 안 다치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실력 있는 놈으로 골라야겠지.”
“그런 사람이 있나?”
“있지.”
“그게 누군데?”
김창이 바로 대답했다.
“심민우.”
* * *
“이게 맞나?”
심민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맞아요?”
심민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지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긴 했는데 눈에 보이진 않았다.
그 두 사람은 김창과 한석구였는데, 둘 다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숨긴 채였다. 왜 그러고 있냐면 개눈깔을 잡기 위해서였고.
“개눈깔 잡으려면 이게 맞아. 그러니까 자꾸 이쪽 흘끔거리지 말고 무방비한 척 연기나 해.”
“개눈깔이 그 사람 맞죠? 김 선생님만큼은 아니어도 칼 엄청 잘 쓰는······. 그 정도 실력이면 제가 뭐 하기도 전에 목 잘릴 것 같은데요.”
“안 잘리니까 걱정 그만해.”
한석구의 말을 듣고서도 심민우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원래 그런 얼굴이긴 했지만 지금은 마치 시체 비슷할 정도였다.
긴장 탓에 누가 봐도 수상한 걸음걸이를 보여주고 있는 심민우를 보면서 한석구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네 말대로 민우를 미끼로 쓰긴 했는데······. 이게 과연 잘 될까?”
한석구는 정복자의 취임식이 끝나고 난 후에 곧바로 허석의 죽음에 대해 공표했다. 그리고 범인이 잡힐 때까지 모든 플레이어는 원탁 안에서 대기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김대걸의 죽음에 대해선 비밀에 부쳤으나 허석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플레이어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누가 죽었다면 금방 표가 날 테니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으니 모든 플레이어는 별 불만 없이 지시에 따랐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원탁을 건드리는 거냐고 수군거리면서.
한석구는 범인을 잡기 위해 심민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심민우는 왜 자기가 그런 위험한 일을 떠맡아야 하냐고 항변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김창이 칼자루를 매만지는 걸 보니 불만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곧장 개눈깔을 잡기 위한 미끼를 뿌렸고 작전은 며칠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닷새째 되는 밤이었다.
“이거 말고 방법이 있나?”
김창의 물음에 한석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법이 없긴 하지. 그런데 개눈깔이 정말 미끼를 덥석 물지 확신이 없단 말이야. 생각해보라고. 허석이 죽고 나서 바로 플레이어들 원탁 바깥으로 못 나가게 했지. 그리고 심민우 쟤만 바깥에서 돌리고 있는데 누가 봐도 미끼 역할이잖아? 개눈깔이 제정신이라면 이걸 물겠어?”
“걔가 제정신이었다면 원탁을 건드릴 생각조차 안 했겠지. 원탁의 무서움을 제일 가까이서 본 게 걔 아니던가?”
그 말도 일리가 있어서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내가 그동안 누가 원탁 건드릴 때마다 얼마나 지랄을 해댔는데 개눈깔이 그걸 모르려고······.
“개눈깔이 왜 플레이어를 죽이고 다니는지 몰라도 며칠째 죽일 사람이 없으니 심민우라도 노릴 거야. 그게 함정인 걸 알아도.”
“이 개짓거리도 이만했으면 좋겠네. 그러려면 개눈깔이 미끼를 물어줘야 할 테고.”
한석구는 이제 제발 개눈깔이 나타나 주길 바랐다. 그래야 빨리 이 개 같은 짓거리를 그만할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은 나타날 것 같은데.”
“뭔 근거로?”
“그냥.”
한석구가 버릇처럼 한숨을 내뱉으며 심민우를 쳐다볼 때였다.
심민우는 나 잡아가라는 듯 으슥한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마침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김창과 한석구는 바로 따라붙었으나 순간적으로 심민우가 시야에서 벗어나게 됐다. 시간으로 따지면 1초도 되지 않을 순간이었으나 김창은 그 정도면 사람 하나 죽이기에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개눈깔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으아악!”
비명이 들리는 것과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도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심민우의 뺨을 스쳐 지나가는 걸 봤다.
“씨발, 씨발··· 뭔데!”
심민우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썼고 덕분에 칼날에 뺨에 구멍이 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베이긴 해서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다른 플레이어와 다르게 전투 경험이 없는 심민우는 갑작스러운 상처에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동공이 확장된 것만 봐도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러다가 더 크게 다칠 것 같아서 한석구가 얼른 모습을 드러냈다.
“민우야, 진정해! 형 왔으니까 진정해, 인마! 숨 천천히 쉬어!”
“씨발···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요······.”
“미안하다. 일단 넌 뒤로 물러나자. 나머지는 창이가 할 거야.”
챙!
거칠게 울리는 금속음에 심민우가 몸을 떨었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투명화 마법을 걷고 모습을 드러낸 김창은 의문의 칼잡이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상대는 망토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칼 쓰는 솜씨만 봐도 상당한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창은 칼을 몇 번 맞대는 것만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감을 잡았다.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었도 칼질에는 그 사람의 흔적이 남는 법이다.
이미 한 번 붙어본 상대의 칼질을 기억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창은 상대와 몇 번 더 칼을 부딪치고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격렬한 움직임이 반복됐지만 두 사람의 호흡은 일정했다.
“언제까지 얼굴 가리고 있을 거냐. 누구인지 뻔히 보이는데.”
“······.”
“입 다물고 있는다고 정체가 숨겨지는 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나?”
역시나 아는 목소리다. 김창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알지. 개눈깔이잖아.”
“···나는 개눈깔이 아니다.”
뭔 개소리야. 칼질하는 거 보니 딱 개눈깔인데. 김창이 그렇게 쏘아붙이려고 할 때, 저쪽에서 후드를 벗었다.
후드를 벗으니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윤기가 나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흰 얼굴 위에는 검은색 안대가 있었다. 그건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금색으로 가위표를 친 눈이 그려져 있었다. 뭘 의미하는 건진 알 수 없었다.
얼굴을 보니 역시나 개눈깔이었다. 원탁에 몇 없는 여성 플레이어, 그리고 김창에게 당해서 애꾸눈이 된 칼잡이.
이름이 뭐랬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개눈깔 맞잖아.”
“나를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너는 내 진정한 정체를 모른다.”
원래 말투가 저랬나? 저거 뭔가 표정부터 거만해진 게 뭔가 좀······.
김창이 미간을 좁히며 개눈깔을 쳐다보자 그녀가 오만하게 턱을 쳐들며 말했다.
“나는 개눈깔이 아니다. 나는 마왕이다.”
“미친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