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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보아하니 티샬레와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아라비타스 님과도 인연이 있는 모양이지? 이거 잘 됐군. 어쩌면 자네도 연회에 참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에리엇의 말에 김창이 미간을 좁혔다.
“아라비타스가 누군데.”
“음? 딜루키둠의 가주에게 용건이 있다면서? 그런데 이름을 모르나?”
“용건이란 게 꼭 친한 사이에만 있는 건 아니지.”
그건 확실히 불온한 말이었기에 에리엇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김창의 말대로 친하지 않아도 용건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저 칼잡이가 이름도 모를 정도로 친하지 않은 딜루키둠의 가주에겐 무슨 용건이 있을까?
설마······. 에리엇이 불안한 상상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건 자네가 테네벨레의 호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지. 잠깐만 기다려. 곧 차원문을 열 테니까.”
“난 잠깐 어디 갔다 올 데가 있으니까 차원문 열고 있어라.”
“응? 어디 가는데?”
“금방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김창이 휘적휘적 걸어서 성을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한석구가 열었던 차원문이었다.
한석구한테 어디 가는지 일일이 보고 해야 할 의무는 없으나 그래도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면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려야 할 한석구가 불쌍하지 않나.
차원문을 통과하자 바로 원탁이 나왔다. 김창은 한석구를 찾아가 말했다.
“개눈깔 죽였다.”
“···벌써?”
개눈깔 죽이라고 보낸 지 몇 시간 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죽였다고? 한석구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김창이 안대를 툭 하고 던졌다.
“진짜 죽였네······. 걔가 뭐래? 왜 그딴 짓 했는지 말하던?”
“그런 건 말 안 하고 그냥 설치지 말고 얌전히 살 걸 그랬다고 하긴 하던데. 그리고 자기 입에 금제가 걸려 있어서 배후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던가?”
“하여튼 웃기는 새끼. 그런 후회할 것 같으면 애초에 그딴 짓을 하질 말던가. 씹, 우리끼리 힘을 합쳐도 모자랄 상황에 남 등에 칼 꽂고 다니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
한석구가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눈깔 그 새끼, 하는 짓이 괘씸하긴 해도 같은 식구인데 내 손으로 쳐낸 게 영 마음에 걸리네. 내가 그래도 옛날에 걔랑 대화도 자주 하고 그랬는데.”
“걔가 유언으로 자기 무덤 하나만 남겨달라더라. 거창하게 만들 건 없고 그냥 이름 석 자만 새겨달래. 그런데 걔 이름이 뭐냐?”
한석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너는 걔 이름도 모르냐?”
“알아야 하나?”
한석구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덤은 내가 알아서 해둘게. 혹시 너도 도울래? 그럴 마음이야 없겠지만······.”
“나 바빠. 어디 갈 데 있어.”
“너 무슨 방랑벽 있냐? 방금 돌아왔으면서 또 어딜 가겠다고?”
김창이 개눈깔의 안대를 다시 손으로 집었다.
“거기 가니까 테네벨레인가 하는 가문의 요정들이 있더라. 걔네가 개눈깔을 타락시킨 놈을 찾는 걸 도와주기로 했어. 그래서 거기 좀 같이 가려고.”
“그런 거라면야 뭐. 조심히 갔다 와라. 아, 가는 김에 티샬레도 데리고 갈래? 걔도 고향 생각 많이 날 텐데 이번 기회에 한 번 갔다 오면 되잖아?”
걔가 무슨 타향살이 하는 외국인 노동자냐? 애초에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원탁에 온 놈인데.
김창은 귀찮다고 거절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티샬레가 있다면 딜루키둠의 가주와 만남을 갖는 게 좀 더 수월하겠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라고 해.”
“그럴게.”
한석구가 마법으로 티샬레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온 티샬레는 아직 용건을 듣지 못한 것인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봤다.
“절 찾으셨다고?”
“나 이번에 테네벨레 가문에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너희 가주도 온다더라.”
티샬레가 말했다.
“아무래도 외눈의 마왕을 죽이러 갔다가 테네벨레의 전사들을 만났나 보군요.”
“그래, 개눈깔 죽였더니 고맙다고 초대하더라. 그래서 같이 갈 거야?”
티샬레가 잠깐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가주님께 보고해야 할 일도 있으니.”
“그러면 따라와.”
김창이 한석구에게 간단히 인사한 뒤에 티샬레와 함께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차원문을 통과해 다시 에리엇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잠깐 원탁에 다녀온 사이에 차원문을 연 것인지 에리엇이 가문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 돌아왔군. 그런데 뒤에 그 요정은······.”
에리엇이 티샬레를 알아보고선 두 눈을 크게 떴다.
“티샬레? 아니, 네가 여긴 왜?”
당황한 에리엇과 다르게 티샬레가 웃으며 말했다.
“테네벨레의 전사들이 외눈의 마왕을 처치하기 위해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분명 에리엇 님도 함께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아, 가문의 사람에게 이번 일에 대해 들었나 보군. 그런데 어째서 김창과 함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설명하지요. 딜루키둠 가문으로 돌아간다고 들었는데 제가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지. 자네가 요즘 들어 통 보이질 않아서 무슨 일인지 궁금하던 참인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자고. 그러면 다들 갈까?”
에리엇은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했지만 곧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가 제일 먼저 차원문을 통과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제일 마지막에 차원문을 통과한 김창은 잠깐 새에 바뀐 주변 모습을 보고서 호오 소리를 냈다.
테네벨레의 저택은 컸다. 그러면서 아름다웠다. 단지 화려하게만 꾸민 게 아니라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하며 만들어진 저택은 인간의 미적 감각으로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을 듯했다.
아마 왕국의 어느 귀족도 이런 아름다운 저택을 갖진 못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 아니라 요정만이 지을 수 있는 공간이니까.
“집 잘 지었네.”
김창의 칭찬에 에리엇이 웃었다.
“칭찬 고맙군. 자네의 마음에 든다니 참 다행이야.”
곁에서 걷던 티샬레가 속삭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딜루키둠의 저택은 이것보다 더 멋있습니다.”
“안 물어봤어.”
“······.”
뭘 쓸데없는 걸 가르쳐주는 거지? 김창이 티샬레를 한 번 쳐다보자 그녀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에리엇 님! 돌아오셨군요! 이토록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시다니 과연 딜루키둠의 기수이십니다!”
에리엇이 저택 안에서 걷고 있으니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나왔다.
허리춤에 칼을 찬 흑요정 하나가 얼른 달려와 그에게 인사했다. 아마 에리엇 휘하의 전사인 듯한데 뒤쪽에 있던 티샬레를 보고선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딜루키둠의 기수이신 티샬레 님이 여긴 왜? 설마 외눈의 마왕과 함께 싸웠던 겁니까? 이야, 이거 정말 대단한 싸움이었겠는데요.”
아부를 참 잘하는 놈이군. 김창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흑요정이 이쪽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이 열등종 놈은 뭡니까? 외눈의 마왕이 부리던 수하인가요?”
에리엇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조심해라. 열등종이 아니라 단명종이니까. 그리고 외눈의 마왕을 무찌른 건 내가 아니라 이 남자야.”
“저 열등··· 아니, 단명종이요? 설마요······.”
흑요정 전사는 에리엇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서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혹시 저 남자는 이방인인가요?”
“그래.”
“아, 역시나. 그런 거라면······.”
요정은 원래 인간을 지켜줘야 할 존재로 인식하지만 이방인은 달랐다. 그들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뭔가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주님은 어디에 있지? 딜루키둠의 가주와 만났나?”
“지금 정원에서 아라비타스 님과 차를 마시며 담소 중이십니다. 혹시 전해드릴 말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없다. 담소가 끝날 때까지 잠깐 기다리도록 하지.”
에리엇은 부하들에게 휴식 명령을 내리고 김창과 티샬레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세 사람은 어느 방에 들어가서 가주들끼리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는데 김창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개눈깔의 안대는 언제 조사하나? 난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건데.”
“방금 막 전투를 끝내고 온 참인데 잠깐 쉬어도 되지 않겠나? 이번 일은 온전히 자네의 공인데 가주님께 보고는 올려야지. 어쩌면 큰 상을 받을지도 몰라.”
“큰 상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으니까 마법사 불러와. 나 바빠.”
“성격이 급하군. 그러면 안대는 바로 가문의 마법사에게 보내도록 하지. 그는 아주 실력 있는 마법사라서 배후를 금방 찾아낼 거야.”
김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엇이 짝 하고 박수를 치자 하인 하나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안대를 받아갔다.
잠시 뒤에 다른 하인이 차와 과자를 들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 김창은 저도 모르게 제법 많은 양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리엇이 흐뭇하게 웃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묻자 아까 그 흑요정 전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들의 담소가 끝났습니다. 에리엇 님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한 번 얼굴을 보고자 하시는군요. 지금 가시겠습니까?”
“아, 그러지. 그럼 다들 가자고.”
에리엇이 일어나자 김창과 티샬레도 뒤를 따랐다. 그들은 긴 복도를 걸어 정원에 도착했다.
저 멀리 요정 두 명이 보였다. 한 명은 은발의 흑요정이었고 다른 한 명은 금발의 요정이었다.
그들은 가볍게 웃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에리엇을 발견하고 이쪽에 말을 걸었다.
“오, 에리엇. 내 자랑스러운 전사이자 기수. 듣자 하니 벌써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지?”
당연히 은발의 흑요정이 테네벨레의 가주일 터였다. 그는 딜루키둠의 가주를 향해 은근한 시선을 보냈는데 마치 자신의 기수가 이토록 훌륭하다는 걸 자랑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딜루키둠의 가주도 그걸 느꼈는지 얼굴이 약간 구겨져 있었다.
“비아스 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외눈의 마왕을 무찌른 건 제가 아닙니다.”
“···네가 아니라고?”
비아스가 당황하는 사이에 아라비타스가 뒤쪽의 티샬레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기 내 자랑스러운 기수가 함께 있군요. 비아스 님, 아무래도 이번 일을 해결한 건 딜루키둠의 기수인 티샬레인 듯합니다만······.”
이번엔 비아스의 얼굴이 구겨질 차례였다. 두 요정이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에리엇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둘 다 아닙니다. 외눈의 마왕을 무찌른 건 원탁의 이방인인 김창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 남자 말입니다.”
아라비타스와 비아스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비아스는 이건 또 뭐 하는 놈이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라비타스는 달랐다.
“김창이라고? 그러면 네가······.”
아라비타스는 네가 베르고니아를 죽인 인간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건 비아스가 있는 곳에서 하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질문이었으니까.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인간이 요정 대가문의 가주에게 저런 말투를 쓰는 건 아주 불경한 짓이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방인은 인간 비슷한 뭔가가 아닌가.
아라비타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나한테 뭔가 할 말 있어 보이는 얼굴인데, 혹시 내 착각인가?”
“착각 아니고 할 말 있는 거 맞아.”
“···할 말이란 게 뭐지?”
김창이 바로 대답했다.
“돈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