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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건 로에라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석구가 다급히 말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을 시켜서 대악마를 불러내겠다고?”
“그래.”
“제정신이냐?”
타박하는 듯한 말투에 김창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제정신이지. 그리고 애초에 이거 말고 대악마를 불러낼 다른 방법이 있긴 한가? 아니면 내가 직접 지옥으로 찾아가야 해?”
대악마는 지옥의 군주이니 산 자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까마득히 먼 저 아래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히 직접 지옥으로 가서 죽이는 것보다 이쪽으로 불러내서 죽이는 쪽이 훨씬 더 쉽다. 만약 일이 잘못됐을 때의 피해 역시 더 크겠지만 그것도 결국 실패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네르헤임과 이야기를 해보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만네르헤임이라고 다른 방법이 있진 않을걸. 애초에 칼레드리온을 죽일 때도 악마숭배자들이 대악마를 불러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족쳤던 거 아닌가? 악마숭배자가 대악마를 불러내는 걸 기다렸다가 죽이는 것과 우리가 직접 대악마를 불러내서 죽이는 것 사이에 뭔 차이가 있지?”
누가 대악마를 불러내든 결과만 같다면 결국 똑같은 일이다. 한석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꺼림칙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불러내는 건 그냥 악마도 아니고 대악마 아닌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그래서 원탁이 그 모든 잘못을 뒤집어써야 한다면?
그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뭔 걱정하는지 아는데, 나만 믿어라. 내가 장담하는데 이 방법이 제일 빨라. 그리고 안전하지.”
김창의 말에 한석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의 실력은 단신으로 대악마는 물론이고 승천할 자까지 죽일 만큼 강하다. 이번에 불러낼 대악마가 얼마나 강할진 몰라도 아마 그의 상대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안전한 방법이라는 말도 틀리진 않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대악마가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일시에 공격을 날리면 뭔가를 하기도 전에 죽여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그러자고. 그래서 마탑주?”
한석구가 부르자 로에라가 벌레라도 씹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부르나?”
“왜는 무슨 왜야?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대악마 불러내.”
로에라가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입을 우물거렸다. 뭐라고 하는진 몰라도 아마 욕을 하는 것 같았는데 한석구가 그걸 보고 미간을 좁혔다.
잠시 뒤에 로에라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내 방 가서 이야기하지 않겠나?”
“뭘 또 방까지 가서 이야기해요? 그냥 여기서 하지.”
“내 방 가자고.”
항상 한석구한테 쩔쩔매던 로에라답지 않은 말투였다. 한석구는 가만히 그를 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럼.”
세 사람은 마탑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법사들은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른 채로 떠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씨발.”
집무실로 들어온 로에라의 첫마디는 욕이었다. 그답지 않은 태도에 김창이 휘유 하고 가볍게 소리 냈다.
“장난하나? 대악마를 불러내라고? 그게 무슨 동네 똥개 새끼도 아니고 뭘 불러내?”
“이봐요, 아저씨. 뭘 또 그렇게 흥분해? 우리가 나쁜 짓하는 것도 아니고 다 좋은 일 하자고 이러는 건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고? 진짜 자네 돌았나? 아니면 나 미치는 거 보려고 이러는 거야? 저번에 민우 그 친구가 악마 소환했다가 우리 집행관들한테 쫓겼던 거 기억 안 나나?”
한석구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일은 또 왜? 대악마 불러내면 집행관들이 지랄한다고?”
“그때 그건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어. 하지만 대악마는 아니야. 그 정도 되는 거물을 불러내면 신전에서 가만히 있겠나? 성기사들이 우리를 죽이려 들 걸세! 그러면 전쟁이야, 전쟁!”
“나쁜 짓 하려고 부르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목적이야 상관없이 대악마를 불러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제기랄, 내가 왜 이런 미친놈들이랑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로에라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줄곧 가만히 있던 김창이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태양신의 신전에 잘 이야기 해줄 테니까.”
“신전에? 혹시 신전에 연줄이라도 있는 건가?”
“있지. 카룩스라고 아나?”
“카룩스 경이라면······.”
이 땅에서 태양신을 믿는 자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성기사가 아닌가?
“그 말 믿어도 되나? 만약 그게 거짓말이라면?”
“속고만 살았나? 믿어도 돼. 그리고 이게 거짓말이라도 믿어야 할걸.”
김창이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미친놈, 로에라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저씨, 할 거야 말 거야?”
한석구가 결정을 재촉하자 로에라가 잠깐 침묵했다. 저 원탁의 깡패 놈들이 정말 순수한 목적으로 악마를 불러내려는 걸까?
하기야 저놈들 하는 짓거리만 보면 진짜 악마보다 더 악랄하니 굳이 대악마랑 편 먹으려 드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대악마를 붙잡아서 노예로 부려 먹으려고 한다는 게 훨씬 더 그럴듯한 가설이다.
한참 생각하던 로에라는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난 못하네.”
김창이 탄식했다. 결국 이 마법사를 죽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로에라가 이어 말했다.
“우린 흑마법사가 아닐세. 대악마를 불러내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른다고. 게다가 대악마를 불러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저번에 칼레드리온 불러낼 때 보니까 걔네도 딱히 대단한 마법사 같진 않던데.”
“···그건 자네가 너무 강해서 그 마법사들이 약해 보이는 걸세. 애초에 아무나 대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면 벌써 몇 번이나 대악마가 지상에 올라왔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건가? 하기야 지난번에 매장결사와 싸울 때 이든과 신시아가 엄청 긴장했던 것 같긴 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면 너희를 도와줄 흑마법사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이왕이면 악마 소환에 일가견이 있는 흑마법사여야겠지.”
“샨토의 검은 탑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안 되나?”
“···걔넨 안 돼. 애초에 마탑에서 쫓겨난 놈들인데 뭐 대단한 게 있겠나?”
사람 찾는 마법 하나는 대단하던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어때? 걔도 안 되나?”
“그 친구도 악마 소환에 재능이 있긴 하지. 하지만 이번 소환은 우리가 의식을 돕긴 해도 의식의 진행 자체는 혼자서 해야 하네. 민우 그 친구가 그 정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네.”
매장결사도 스무 명이나 되는 흑마법사들이 한데 모여서 의식을 진행했었다. 김창이 생각하기에도 심민우가 흑마법사 스무 명분의 재능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얘도 안 돼, 쟤도 안 돼. 이거 그냥 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한석구가 의심스럽다는 듯 묻자 로에라가 울컥 소리쳤다.
“대악마 안 불러내면 싹 다 죽이겠다는 미친놈 상대로 내가 그런 거짓말을 왜 하나? 안 그래도 지금 이런 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억울해 죽겠는데, 뭔 개소리를······.”
그가 저토록 강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억울하긴 한 모양이었다. 한석구가 더 말하지 않고 쩝 소리만 낼 뿐이었다.
“의식을 진행할 흑마법사만 구해오면 되는 건가?”
김창의 나직한 목소리에 로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악마를 불러낼 만한 실력 있는 흑마법사를 구해와야겠지.”
“그러면 구해올 테니까 의식 준비나 하고 있어.”
그만한 흑마법사가 길가의 돌멩이도 아니고 구한다고 구할 수가 있는 건가? 로에라가 어이없어하다가 상대는 원탁의 이방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괴물이 득실거리는 원탁이라면 그런 흑마법사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겠지.
“···내 그러지.”
“석구야, 가자.”
김창이 바로 몸을 돌려 한석구와 함께 집무실을 떠났다. 뒤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어쩌려고? 흑마법사를 어디서 구하게?”
“흑마법사라면 원탁에 있잖아.”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 다시 홀까지 내려온 김창과 한석구는 차원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원탁에 흑마법사가 몇 명 있긴 하지. 하지만 걔네 중에 대악마를 불러낼 만한 실력자는 없는 걸로 아는데?”
“왜 없어.”
김창과 한석구가 나란히 차원문을 통과해 원탁으로 돌아왔다.
“한 명 있잖아.”
“···한 명? 아니, 너 설마?”
“차원문 하나 더 열어. 갈 데 있으니까.”
김창은 어디 간다고 설명하지 않았지만 한석구는 바로 차원문을 열었다. 그는 김창이 말하는 흑마법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확실히 걔가 실력이 있긴 하지. 하지만 과연 일을 맡을까?”
“그거야 가봐야 알지. 근데 내가 잘 설득하면 될 거야.”
설득? 목에 칼 들이밀고 하는 그거? 한석구가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은 원탁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또 다른 차원문을 통과했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산속이었는데 주변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여기 맞아?”
“내 기억으로는 맞는데······. 걔가 또 방랑벽 도져서 다른 곳으로 갔으면 몰라도.”
“그러면 일단 가보자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산속을 걷고 있으니 왠지 휴양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창과 한석구는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길을 걸었다.
“김용걸 그 새낀 왜 이런 데서 사는 거냐?”
“난들 아냐. 가만 보면 걔가 너보다 더 이상한 놈이야. 너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라도 하지, 갠 여기 틀어박혀서 혼자 뭔 짓을 하고 사나 몰라? 하여튼 랭커 중에 제대로 된 새끼가 없다니까······.”
두 사람이 말하는 김용걸은 원탁의 랭커 중 하나였다. 그것도 무려 랭킹 1위의 흑마법사.
대악마를 불러내야 하는 그들 입장에서 지금 김용걸만큼 적합한 인재는 없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저기 누구 있는 것 같지 않아?”
원래 랭커는 원탁의 통제를 무시하는 법이지만 김용걸은 그중에서도 특이한 인간이었다. 남들은 나 원탁의 랭커요 하면서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다니지만 그는 수도승처럼 이런 산속에 틀어박혀 살고 있었으니까.
김창과 한석구도 김용걸의 오두막에 한 번 정도 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었는데 마침 먼저 찾아온 선객이 있는 듯했다.
“나와라, 흑마법사!”
“나와! 나와!”
“죽여버리겠다! 나와!”
성난 듯 오두막의 문을 두들기고 있는 건 덩치 큰 무언가였다. 그 숫자는 다섯쯤 됐는데 모두 옷이라기보다는 거적때기에 가까운 걸 몸에 걸치고 있었다.
살결이 거무죽죽한 회색인 것만 봐도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툭 튀어나온 송곳니가 살벌했다.
그들 모두는 손에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저걸로 흑마법사를 죽이겠다는 건가? 김창은 참 멍청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저거······.”
“트롤인가 하는 그거 아닌가? 요정처럼 돈 지르면 종족 바꿀 수 있지만 아무도 안 고르려고 했던 그거.”
“누가 돈 질러서 트롤 됐다가 마을에서 몹인 줄 알고 공격도 당하고 그랬지 아마.”
물론 저 트롤들이 플레이어는 아닐 것이다. 요정이 그러하듯 그냥 이 세상에 사는 종족일 뿐.
“그런데 쟤넨 또 왜 여기 와서 난리야? 우리가 손 좀 봐줘야 하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보이는데.”
김창의 말대로였다. 트롤들이 한참 문을 두드리던 와중에 갑자기 쿵 소리가 나며 그들이 뒤로 날아가 버렸으니까.
저건 분명 마법의 힘이다. 트롤처럼 힘이 강한 종족을 한 번에 다섯 명이나 날려 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테니.
부서진 문 너머로 누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신경질적인 인상을 한 남자는 짜증스럽게 외쳤다.
“뭐야, 이 더러운 트롤 새끼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