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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94화 (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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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걸은 자신의 마법에 맞고 나가떨어진 트롤들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이것들이 단체로 정신이 나갔나?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지랄이야?”

트롤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의 마법 때문에 기절했기 때문이다. 김용걸은 마법 한 번으로는 짜증이 가시질 않았는지 손을 휘둘러 기절한 트롤들을 멀리 날려 보냈다.

그리고 탁탁 손을 털며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가 멀뚱히 선 김창과 한석구를 발견했다.

“···너흰 또 뭐야?”

“오랜만이다, 김용걸.”

한석구가 인사를 건네자 김용걸이 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상대가 트롤이었다면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마법으로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김창과 한석구는 트롤 따위와는 결이 다른 존재였다.

아무리 랭킹 1위의 흑마법사라고 해도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김용걸이 또 한 번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까딱거렸다.

“들어와. 뭔 일인지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오두막 안에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김창과 한석구가 움직였다. 세 사람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아마 마법일 것이다.

“설마 손님이랍시고 차 한 잔 달라는 말은 안 하겠지? 너흰 부른 적 없는 손님이고 난 원래 손님 대접 같은 거 싫어하니까 그냥 얌전히 있다 가라. 냉수 한 잔 정도야 줄 수 있겠다만.”

김용걸의 까칠한 목소리를 들으며 한석구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오래 있을 생각 없어. 바로 본론 이야기해도 되나?”

“호, 많이 급한 모양이지?”

김용걸이 이죽거렸으나 한석구는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힘을 빌릴 일이 생겼다, 김용걸. 너도 원탁의 일원이니 내 부름을 무시하진 않겠지. 네 실력을 생각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먼저 몇 가지 확인하겠는데, 너 악마 소환 같은 거 할 줄 알지? 내가 알기로 흑마법사 스킬 중에 악마 불러내서 함께 싸우는 거 있는 줄 아는데.”

“악마 소환? 물론 스킬 중에 있긴 하지. 근데 그거 사냥할 때 몹 어그로나 먹으라고 소환하는 거고 전투 능력은 별로 대단하지 않은데. 악마 소환할 마력으로 흑마법 하나 날리는 게 더 셀걸. 그런데 그건 왜 묻냐? 설마 악마 소환해서 대륙 정복이라도 하려고? 하기야 이제 그럴 때 됐지?”

그럴 때가 되긴 뭐가 그럴 때가 돼? 한석구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넌 원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칼 잘 쓰고 마법 잘 쓰는 조폭 아닌가? 그런데 그 조폭이 나라도 못 막을 정도로 강하니까 나라 뒤집는다고 설쳐도 누가 뭐라 못할 것 같은데.”

한석구는 발끈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원탁이 한 일을 생각하면 조폭이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닌 것 치고 요즘 땅따먹기에 열심이던데. 듣자 하니 정복자가 영주가 됐다며? 그리고 웬 섬도 하나 먹었고.”

이런 산속에서 은거하고 있는 것치고 정보가 빠르다. 아니면 이런 산속까지 알려질 만큼 충격적인 사실이었던가.

한석구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자 김용걸이 말했다.

“인제 와서 같이 땅따먹기 하자고 부른 거면 사양하련다. 나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잖아? 네가 나보다 좆밥이긴 해도 너 정도 실력이면 혼자서 군대도 상대할 수 있지 않나?”

“우린 전쟁하려고 너 찾아온 거 아니야.”

“그럼? 할 말 있으면 빨리······.”

“그만 깝죽거리고 대악마 죽일 거니까 걔나 불러내.”

마지막 말은 한석구가 한 게 아니었다. 김용걸이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 김창과 눈이 마주쳤다.

“너······.”

“내 말 안 들렸나? 귓구멍 하나 새로 내줘? 대악마 불러내라고. 죽여야 하니까.”

김용걸이 고개를 돌려 한석구에게 말했다.

“저 싸이코패스 칼잡이 새낀 왜 데리고 왔어? 나 담그려고 그러는 거냐?”

“거 말이 심하네. 누가 싸이코패스 칼잡이야?”

김용걸이 얼굴을 싹 굳히며 말했다.

“너 말이야, 이 새끼야. 너 대전이 초반 때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 죄다 썰고 다녔잖아. 내가 알기로 플레이어 제일 많이 죽인 놈이 너일걸?”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 썰고 다닌 게 아니라 죽을 만한 놈들만 죽인 거야. 그리고 자경단 활동은 나만 한 게 아닌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적어도 한석구랑 정복자는 막무가내로 죽이진 않았어. 심지어 김대걸 그 새끼도 살려줬잖아.”

“아, 참고로 걘 탈옥했다가 죽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김용걸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 플레이어 죽인 건 자경단 활동이라고 치고. 너 옛날에 서하연이랑 시비 붙어서 걔 애꾸눈 만든 건 기억 안 나냐?”

“서하연이 누군데.”

“···개눈깔, 이 새끼야.”

걔 이름이 서하연이었나? 나중에 무덤을 만들어줄 수 있겠군.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고로 걔도 죽었다.”

“한석구, 씹새야. 너 진짜 나 담그려고 온 거냐?”

한석구가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간단히 상황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들어.”

한석구가 지금 상황에 대해서 김용걸에게 설명했다. 왜 대악마를 불러내려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김용걸이 허 하고 소리 냈다.

“그러니까 지옥에서 잘살고 있는 대악마 불러내서 선빵 치자 이거지?”

“말이 좀 그렇긴 한데, 대충 그런 거지. 어차피 걔네 언젠가는 지상에 올라올 텐데 그 전에 제거하는 게 낫지 않나?”

“뭐 말이야 그럴듯하군.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하시다? 대악마를 불러낼 만한 실력의 흑마법사는 흔치 않으니까?”

“그래. 악마 소환이 네 전문은 아니긴 해도 어지간한 놈들보단 잘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좀 도와줘라. 그냥 대악마만 불러내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김용걸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대악마를 직접 본 적은 없어도 위험한 놈이라는 건 알겠다. 괜히 불러냈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창이가 사람만 잘 죽이는 게 아니라 괴물도 잘 죽여서 괜찮아.”

“하기야······.”

뭘 납득하는 거지?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도와줄 거야? 설마 원탁의 일원이면서 내 부탁을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원탁이 뭐 대단한 거라고 자꾸 원탁을 들먹여? 네가 원탁의 대빵인 건 다른 놈들이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 그런 거지 나보다 강해서 그런 건 아니잖아?”

저 새끼 말하는 거 보게. 정말 귓구멍을 하나 새로 내줘야 하나? 김창이 칼자루를 매만지고 있을 때, 김용걸이 말했다.

“넌 나한테 명령할 권리 없어. 하지만 거래라면 들어줄 수 있지.”

“뭔 거래?”

“아까 트롤 새끼들 봤지?”

“봤지. 그런데 걔넨 뭔데 여기 와서 난리야?”

김용걸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 주변에는 트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여러 부족이 있을 정도니까 사실상 이 산은 트롤의 세력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내가 여기 자리 잡고 나서 트롤들이 나한테 관심을 보이더군. 솔직히 내 힘이면 이 산의 트롤들을 싹 지워버릴 수 있는데 그건 너무 귀찮은 일이야. 나는 트롤들과 거래하기로 했다. 그놈들이 내게 공물을 바치면 나는 그 대가로 마법의 힘을 빌려주기로.”

흑마법사치고 온건한 거래다.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김용걸이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았어. 모든 트롤이 날 좋아한 건 아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어. 나도 트롤들을 건드리지 않았고 애초에 걔네한텐 나 말고도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많았으니까. 아까 이 산에 여러 부족이 있다고 했지? 걔네끼리 세력 다툼하느라 날 건드리지 않더군.”

아무래도 오두막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흑마법사보다는 같은 트롤이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아까는 트롤들이 와서 오두막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나? 한석구의 얼굴에 그런 의문이 떠오르자 김용걸이 대답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세력 다툼이 끝났다. 어느 한 부족이 다른 모든 부족을 굴복시켰고 새롭게 트롤의 왕이 탄생했지. 거기까진 좋아. 거기까진 좋았는데······. 이 미친 트롤 새끼가 이젠 날 거슬려 하더라고. 여긴 트롤의 땅인데 인간 따위가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나? 그래도 지금껏 자기들을 도와줬던 정이 있으니 죽이기 전에 얼른 꺼지라더라.”

“그러면 아까 그게 퇴거 시위 같은 건가? 용역 깡패도 아니고 무슨······.”

“이 산에 처음 들어올 때 본보기로 부족 하나 몰살하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러면 괜히 반발심만 생길까 봐 안 그러고 있었는데 하여튼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

힘을 숨기는 건 이래서 문제다. 조용히 있으려는데 자꾸 날벌레들이 꼬이니까.

김용걸이 쯧 하고 혀를 차는 걸 본 김창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 트롤 새끼들 싹 다 죽여주면 내 부탁도 들어주나?”

“···싹 다 죽일 필요는 없는데.”

“그러면 트롤 왕만 죽이라고? 내가 볼 때 이런 일은 화근을 남겨두지 않는 게 중요해. 그냥 싹 다 죽이자고.”

“아니, 다 안 죽여도 된다고······. 애초에 이번 일은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모두 굴복시켜서 일어난 일이야. 그러니까 트롤 왕만 죽이면 알아서 트롤 왕국은 와해 될 거고 멍청한 트롤들은 다시 여러 부족으로 쪼개져서 자기들끼리 싸우게 될걸.”

김창이 아쉽다는 듯 쩝 소리를 냈다. 그걸 본 김용걸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건 너희가 트롤 왕을 죽여주면 나도 너희를 돕도록 하지. 마탑이라고 했던가? 그 떨거지들 데리고 대악마 불러내면 되는 거 맞지?”

“그래. 그러면 조금 있다가 떠나야 하니까 준비하고 있어.”

“뭔 준비?”

“트롤 왕 죽이면 우리랑 같이 마탑으로 가겠다며? 금방 끝나니까 떠날 준비 하고 있으라고.”

김창이 칼자루를 매만지며 문으로 가는 걸 본 김용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미친놈.”

김창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한석구도 그 뒤를 따라서 가려는데 김용걸이 불렀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솔직히 너희 실력 생각하면 쓸데없는 말일 수도 있는데, 조심해라. 트롤 왕 그 새끼 그냥 트롤 아니야.”

“트롤이 트롤이지, 뭐 다를 게 있나?”

“트롤 걔네 전투 종족인 거 알지? 무식한 만큼 힘도 세고 재생력도 엄청나서 어지간해선 안 죽어. 왜 지금까지 여러 부족이 서로 다투고 있겠냐? 어느 정도 다친 건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싸우니까 승부가 안 나서 그래. 그런데 이번 트롤 왕이 길고 긴 싸움을 끝냈지. 보통 아니라는 소리야. 내가 그 트롤 왕 한 번 본 적 있거든? 근데 걔······.”

“걔 뭐?”

김용걸이 말했다.

“뭔가 다른 힘을 얻은 것 같더라. 확실히 그냥 트롤은 아니었어.”

갑작스럽게 나타나 트롤 부족을 통일한 트롤 왕. 확실히 그 정도면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고전할 만한 상대일 것이다.

물론 그래봤자 랭커의 상대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김용걸이 조심하라고 말한 걸 보면 뭔가 있긴 할 터다.

한석구는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트롤 강하다는 소리지? 그거 창이가 아주 좋아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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