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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적이 강할수록 좋아하는 건 고인물 중에서도 변태 놈들이나 그런 거 아닌가. 그런 거 보면 김창 그 새낀 위험한 놈이 맞아.”
뭘 또 새삼스럽게. 한석구가 씩 웃더니 김용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곧 온다. 기다리고 있어.”
김용걸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한석구가 문을 열고 김창의 뒤를 따라나갔다.
“안에서 뭔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나와?”
김창이 이제야 나오는 한석구를 보며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용걸이가 트롤 왕 조심하래.”
“트롤이 잘나봐야 트롤이지, 조심할 게 뭐가 있어?”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용걸이 말로는 그 트롤 그냥 트롤 아니라던데. 뭔가 이상한 힘을 얻은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봤자 결국 트롤이니 우리 상대는 안 되겠지만.”
“트롤 왕이라는 놈이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싸워보면 알겠지. 일단은 가자.”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창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아까 김용걸이 날려버린 트롤들이 있는 곳이었다.
이 산은 아주 넓다. 무턱대고 트롤 왕을 찾아다닐 수는 없으니 일단은 정보를 얻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김용걸이 어찌나 세게 날렸는지 트롤들은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직도 기절한 채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김창이 트롤들을 가만히 보더니 다짜고짜 한 놈의 뺨을 후려쳤다.
“끄악!”
뺨을 맞은 트롤의 몸이 붕 뜨더니 뒤로 날아가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게 된 트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살짝 때렸는데 뭔 엄살이야. 일어나. 너희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까.”
“씹, 입 안이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 살살 때리긴 뭔······.”
트롤이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쳤다. 그러나 트롤 특유의 재생력 덕분에 입안의 상처는 금세 아물어 더는 피가 흐르지 않게 됐다.
확실히 트롤은 트롤인가. 김창이 작게 감탄하고 있자 트롤이 말했다.
“···너흰 누구냐? 인간인 걸 보아하니 그 흑마법사의 일행이냐?”
“그건 알 거 없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트롤 왕 어디 있어?”
갑자기 나타나서 트롤 왕에 대한 걸 묻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만했다. 트롤이 잠깐 눈치를 보다가 곧 결연한 얼굴로 외쳤다.
“왕에 대한 건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어? 그래, 그러면 말하지 마.”
혼자 고개를 끄덕인 김창이 손을 들었다. 흠칫 놀란 트롤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기도 전에 매서운 따귀가 얼굴을 후려쳤다.
“끄악!”
트롤이 비명을 질렀지만 따귀는 한 대로 끝나지 않았다. 연달아 날아오는 따귀에 트롤은 정신없이 얻어맞기만 했다.
방어를 하려고 해도 한 대 맞을 때마다 얼굴이 찌르르 울리고 몸이 굳어버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할 수 없다고 했지? 그러면 말하지 마. 너 말하면 죽어.”
따귀만으로 트롤 전사를 때려눕히고 있는 걸 사람들이 봤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트롤이 고작 따귀에?
“악! 악!”
“말하지 말라니까.”
김창이 트롤을 때리는 걸 가만히 보던 한석구가 말했다.
“야, 그러다 애 죽겠다. 살살해.”
“괜찮아. 내가 보니까 얘 트롤이라 때려도 안 죽어.”
“그런가? 하기야 좀 처맞아도 금방 재생하니까······.”
인간 놈들이 쌍으로 미쳤나? 한참을 얻어맞던 트롤이 울분 섞인 외침을 토해냈다.
“말하겠다! 물어보는 건 다 말할 테니까 그만 때려, 씹새야!”
“말하기 싫다며? 말 안 해도 돼.”
“아니, 말할 거다! 제발 말하게 해줘!”
트롤이 애원하듯 소리치자 김창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는 말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네가 말하겠다고 한 거다. 나중에 내 탓 하지 마라.”
트롤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욕설을 억지로 삼켰다. 여기서 감정적으로 욕을 내뱉었다간 죽을지도 모르니까.
“···트롤 왕에 대해 물었나?”
“그래, 걔 어디 있어?”
“대답하기 전에 나도 하나 묻지. 전하는 왜 찾는 거지?”
“죽이려고.”
트롤이 침묵했다. 그는 김창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확인하려는 듯 가만히 있다가 곧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왜?”
“의뢰를 받았으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왜 자꾸 나한테 질문하는 거지? 내가 그래도 된다고 했나?”
김창의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트롤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목을 움츠렸다.
“대답을 망설이는 건 트롤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가?”
“···아무리.”
트롤이 살살 고개를 저었다.
“트롤 왕이 길고 긴 전쟁을 끝내고 트롤 부족을 하나로 모으긴 했지만 모두가 그에게 충성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우린 서로 떨어져 살았던 기간이 너무 길었어. 인제 와서 갑자기 우리는 하나라고 해봤자 웃기는 소리일 뿐이지.”
트롤의 신랄한 말을 들으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걸 보니 트롤 왕과 같은 부족 출신은 아닌 모양이군.”
“그래. 트롤 왕은 본래 흰 바위 부족이고 우리는 검은 매 부족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트롤 왕에게 충성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면 잘 됐군. 너는 트롤 왕에 대한 충성심도 없으니 배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리도 없을 테니.”
트롤이 잠깐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트롤 왕은 강하다. 너희를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는 사실상 혼자서 이 길고 긴 전쟁을 끝냈어. 너희가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트롤 왕은 절대 쉽지 않은 상대일 거다. 그리고 그의 밑에 있는 트롤 전사들도 상대해야 할 텐데 둘이선 위험해.”
“그래서?”
트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주변을 확인했다. 혹여나 듣는 귀가 있는지 걱정하는 듯했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부족장님에게 안내해주겠다. 그리고 우리 부족 전사들과 힘을 합쳐 트롤 왕과 싸우는 거다. 너희가 오두막의 흑마법사를 데리고 오면 큰 전력이 될 거야. 그러면 승산이 있어.”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김창이 괜히 시간이나 썼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필요 없으니까 트롤 왕한테 안내나 해. 걘 나 혼자서도 충분해.”
“이봐, 내가 한 말 잊었나? 트롤 왕은 보통이 아니라니까? 게다가 그 밑의 트롤 전사들은 또 어떻게 할 건데?”
“작전을 설명해주지. 내가 트롤 왕을 죽인다. 그리고 한석구가 트롤 전사들을 맡는다. 끝.”
그게 뭔 작전이야? 트롤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김창이 말했다.
“이제 시간 그만 끌고 트롤 왕이 있는 곳이나 말해.”
트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말을 해봤자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원하는 정보나 주고 치우는 게 맞는 듯했다.
“전하는 산 정상에 머물고 있다. 지금쯤 트롤 왕의 거처를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일 거다. 그러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정보 고맙군. 그러면 네 친구들 데리고 잠깐 쉬다가 와라. 너무 빨리 오진 말고. 괜히 휘말린다.”
김창이 한석구를 데리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정말로 둘이서 트롤 왕을 상대하러 갈 기세라서 트롤이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곧 뭔가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꽉 쥐고서 얼른 그 뒤를 따라붙었다. 김창은 자신의 뒤를 따라온 트롤을 보고서 미간을 좁혔다.
“왜 따라와?”
“너희가 정말 트롤 왕을 상대할 수 있는지 보려고.”
“우리랑 같이 가면 너도 위험할 텐데.”
“상관없어.”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 김창이 픽 웃더니 말했다.
“이름이 뭐냐.”
“···헤럴.”
“그래, 헤럴. 나는 김창이다. 이쪽은 아까 들었겠지만 한석구.”
한석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헤럴도 마주 인사했다. 인간 둘과 트롤 하나는 그대로 산을 올라 정상까지 향했다.
세 명 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분위기가 무겁진 않았다. 지금 긴장하고 있는 건 헤럴 하나뿐이었다.
김창과 한석구는 등산이라도 가는 것처럼 가볍게 걷고 있었고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럴 수가 있나? 지금부터 트롤 왕과 그 전사들을 상대로 싸우러 가는데 두렵지도 않은 건가?
그 어떤 트롤 전사도 저토록 태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럴이 꿀꺽 침을 삼키는 가운데 김창이 말했다.
“저기냐?”
김창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목책이 있었다. 저 안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트롤 왕의 새 거처를 위한 공사가 한창일 것이다.
헤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혹시나 목책 위의 트롤 중에 네 친구가 있나?”
“음? 없는데. 그건 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네 친구를 죽이면 기분 찝찝하잖냐. 혹시 네 부족도 저 안에 있나?”
“아니, 우리 부족은 식량 조달을 위해 사냥을 나갔다. 그러니 저 안에는 없어.”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뽑았다.
“그럼 신경 쓸 것 없이 전부 죽일 수 있겠군.”
김창이 겁도 없이 목책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 걸 본 헤럴이 헉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가 말리기도 전에 김창은 이미 목책 가까이 다가간 후였다.
목책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트롤 전사들도 김창을 발견했다. 웬 인간 놈이 양손에 칼을 들고 다가오고 있으니 어이없어하면서 소리쳤다.
“넌 뭐냐! 여긴 트롤 왕의 영역이다! 인간 놈은 썩 꺼······ 켁!”
트롤 전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날아온 칼이 그의 목을 찔렀으니까.
목책 위에 있던 또 다른 트롤 전사는 방금 뭔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눈을 끔뻑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할 때, 날아온 칼이 그의 심장까지 찔렀다.
“이, 이게 무슨?”
트롤 전사들을 당황하면서도 얼른 무기를 들고 목책 아래로 달려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칼은 빠르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들의 목숨을 하나씩 취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모두 내려왔을 때는 이미 숫자가 절반을 줄어든 상태였다. 그럼에도 트롤 전사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저 주문쟁이 놈을 죽여!”
“죽여! 죽여!”
트롤 전사들의 기세는 용맹했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모습은 확실히 압박감이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쾅 하고 울리는 굉음과 함께 그들의 모습이 일순간에 사라졌으니까.
“뭘 이런 걸 일일이 상대하고 있어? 잔챙이들은 내가 맡을 테니까 넌 안으로 들어가 봐.”
헤럴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한석구가 이리저리 손을 휘두르며 목책을 파괴하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거나 지팡이를 휘두르지도 않고서 저런 위력의 마법을 날릴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금방 끝내고 돌아오지.”
김창이 목책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날아다니는 칼의 호위를 받으며 손에 또 한 자루의 칼을 든 채로 걷는 모습은 기이한 박력이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습격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트롤들을 보면서 왼손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머리 위의 칼이 혼자서 날아가 트롤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끄악! 미친 칼이다!”
“잡아!”
김창은 칼을 날려 보내고는 자신도 트롤들을 향해 뛰었다. 엄청난 속도로 트롤 전사들과의 거리를 좁힌 뒤에 무자비하게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이라고 해도 목이 날아가고 허리가 끊어진 걸 재생할 수는 없다.
여러 명의 트롤 전사들이 단 한 명에게 무참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건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김창은 순식간에 열 명도 넘는 트롤 전사들을 썰어버리고는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습격자를 상대하기 위해 트롤 전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전부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다. 김창은 무심히 말했다.
“경험치도 안 주는 잡몹 상대하기 싫으니까 너희 대빵 나오라고 해.”
그 말에 화가 난 트롤 전사들이 소리쳤다.
“건방진 놈! 그 입을 찢어주마!”
“죽여버리겠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군. 김창이 다시 칼을 날려보내려고 할 때, 갑작스럽게 쿵쿵 소리가 울렸다.
그건 땅이 울리는 소리였다. 무언가 거대한 덩치를 가진 존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이로군. 감히 겁도 없이 트롤 왕의 영역을 침범하느냐?”
드디어 보스가 나왔나? 김창이 기대감을 느끼며 트롤 왕을 쳐다봤다.
일단 그건 컸다. 아마 트롤보다 두 배는 크지 않을까. 트롤 왕은 왕답게 거적이나 두르고 다니는 트롤 전사들과 달리 제대로 된 무장을 갖췄다.
저만한 크기의 무장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차치하고 상당히 강력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손에 든 징 박힌 몽둥이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람 열댓 명은 한 번에 터트릴 수 있을 듯했다.
확실히 트롤 왕이라고 불릴 만한 위세였다. 김창은 왜 김용걸이 이게 보통 트롤이 아니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트롤이 아니었다. 오우거지.
“씹, 너 트롤 아니잖아. 근데 왜 트롤 왕이야?”
자기가 트롤이라고 믿는 미친 오우거인가? 김창이 어이없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