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98화 (9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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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하여튼 네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시건방진 칼잡이 놈, 그러면 날 죽이러 와봐라. 날 너무 기다리게 하지는 말고.”

요안니스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곧 사라졌다. 김창은 혼자 어깨를 으쓱이더니 뒤쪽을 돌아봤다.

혼자서 트롤 전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한석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더 싸우지 않는 걸 보면 트롤 왕이 죽자 트롤 전사들도 저항 의지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들은 지금 상황에 뭘 어째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한석구는 김창과 눈을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얘네 이제 어쩔까? 생각보다 빨리 끝났는데 싹 치워? 그러면 이제 김용걸 건드릴 놈도 없어지니 셈이니 우리 부탁 잘 들어줄 것 같은데.”

“굳이 그럴 것까지야. 이제 얘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느라 김용걸 신경 쓸 시간도 없을 텐데 그냥 둬. 그리고 거기 트롤 놈.”

한석구와 김창이 한 일을 얼빠진 얼굴로 보고 있던 헤럴이 몸을 움찔하며 말했다.

“···왜, 왜?”

“트롤 왕 죽었으니까 이제 하던 일이나 마저 해. 가서 너희들끼리 또 영역 다툼하고 그러라고.”

“어, 어어······.”

김창은 그걸로 할 말 끝났다는 듯 목책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한석구도 그 뒤를 따라서 떠나자 트롤 전사들이 그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걸 그냥 보내야 하나? 그럼 안 보내면 뭘 어쩌려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동족을 학살한 놈들인데 그냥 보내는 건······. 안 보내면 싹 다 뒈질 것 같은데······.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걸 들으며 김창과 한석구는 산을 내려가 김용걸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쪽으로 가니 김용걸이 마법으로 나무를 쪼개며 장작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자 혼자 움직이고 있던 도끼를 손가락으로 저 멀리 날려 보냈다.

“벌써 끝내고 왔어?”

“조심하라더니 별거 없던데.”

김창의 무심한 말에 김용걸이 미간을 좁혔다.

“물론 그 트롤 왕이 네 상대가 되진 않았겠지. 그래도 뭔가 이상한 힘을 가진 것 같던데, 아니었나?”

“분신술 쓰던데. 그거 말고 다른 능력도 있다던데 그거 보여주기 전에 죽여서 자세한 건 모르겠다. 그리고 그거 트롤 아니더만?”

“뭐? 그거 트롤 아니었어? 어쩐지 덩치가 크더라.”

얜 눈이 없나? 누가 봐도 트롤이랑 다르게 생겼는데 뭔 트롤 타령이야? 김창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김용걸이 무시했다.

“하기야 걔가 트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어쨌건 걔 죽이고 온 건 맞지?”

“그래. 내가 트롤들한테 하던 일이나 마저 하라고 했으니까 이제부터 너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러면 나도 너희 부탁을 들어줘야지. 그런 거래였으니까.”

세상엔 자기 받을 것만 받고서 입 싹 닫는 놈들이 있다. 그런 놈들은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칼침 몇 번 놔줘야 하는데 김용걸은 거래가 뭔지 아는 사람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석구가 말했다.

“우리 부탁은 아까도 말했듯이 대악마를 불러내는 거야. 소환에 필요한 준비는 마탑이 알아서 다 해결할 거야. 그리고 의식의 진행도 도와줄 거고. 너는 그냥 가서 대악마만 불러내면 돼. 쉽지?”

“쉽기는 염병. 내가 대악마에 대해 잘은 몰라도 걔네가 위험한 놈이라는 건 알아. 혼자서 나라 하나도 멸망시킬 수 있는 놈을 불러내는 게 쉬울 리가 있나?”

“그래서 안 할 거야?”

김용걸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솔직히 하기 싫은데, 그러면 저 미친놈이 내 목에 칼 들이밀 것 같아서 하긴 해야지.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난 그냥 캐릭터 직업이 흑마법사인 거지, 여기서 몇십 년 동안 흑마법만 연구하던 진짜배기 흑마법사는 아니야. 그러니까 대악마를 불러내는 의식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건 알아둬라.”

“참고하지. 나도 대악마 소환해본 적은 없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건 알아. 그러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안 되면 또 다른 흑마법사한테 부탁하면 되니까.”

김용걸이 슬쩍 김창을 쳐다봤다. 실패하면 쟤가 가만 안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바로 마탑으로 갈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악마도 단칼에 죽여야 하지 않겠냐.”

뭔가 말이 이상한데. 김용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한석구가 마탑으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었다.

세 사람은 그대로 차원문을 통과해 마탑으로 이동했다. 마탑을 떠난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돌아온 그들을 보고서 마법사들의 몸이 굳었다.

마탑주 로에라는 다시 돌아온 김창 일행을 보고서 벌레라도 씹은 얼굴이 되었다. 저 아저씨, 저번엔 한석구한테 벌벌 기더니 이번엔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시키니까 반항심이 생기는 모양이지.

김창이 픽 웃는데 로에라가 말했다.

“···여긴 또 왜 왔나?”

“왜 오긴? 흑마법사 데려오면 대악마 불러낼 수 있다고 했었지? 그럼 빨리 준비해요.”

이 미친놈들, 기어코? 로에라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석구가 멀뚱히 선 김용걸을 향해 말했다.

“이쪽이 마탑주야. 인사해. 마탑주 양반, 이쪽은 김용걸. 우리 원탁의 흑마법사.”

로에라가 김용걸의 얼굴을 보다가 몸을 움찔했다. 그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는 지금까지 원탁에서 제일 강한 마법사가 한석구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그보다 더 위가 있는 모양이었다.

로에라가 원탁의 무서움에 덜덜 떨고 있을 때 김용걸이 말했다.

“반갑수다, 김용걸이요. 어쩌다 보니 일 하나 같이 하게 됐는데 잘 부탁해요. 그런데 이 양반은 뭘 또 이렇게 굳어 있어? 내가 형씨보다 나이 적은 것 같은데 편하게 하쇼.”

편하게 하라고? 원탁의 인간은 죄 깡패뿐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식적인 사람도 있는 듯했다.

김용걸이 한석구보다 더 극악한 마법사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고 있던 로에라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대악마를 불러내라고만 했지, 누굴 불러내라고는 안 했는데 뭘 불러내면 되나?”

김창이 대답했다.

“뭐 아무거나 대충 부르면 안 되겠어? 소환하고 있으면 누구는 하나 오겠지.”

“···대악마 불러내는 게 무슨 바닷가에서 낚시하는 건 줄 아나? 애초에 소환술이라는 건 불러낼 대상을 명확히 정해야만 하네. 아무거나 불러내는 건 없어.”

“난 대악마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일단 만네르헤임은 안 되고, 칼레드리온은 죽었으니까 나머지 둘 중 하나에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로에라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헤인리히스는 어떤가? 대악마 중에서 그나마 얌전한 놈인데. 뭐 물론 대악마가 얌전해봤자 얼마나 얌전하겠냐마는.”

“난 아무거나 상관없다. 그냥 대악마만 불러내면 돼.”

“그러면 헤인리히스를 불러내는 걸로 하지. 당연한 말이지만 대악마를 불러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닐세. 의식을 위한 제단도 준비해야 하고 대악마가 만족할 만한 제물도 있어야 하지. 그리고 소환을 위한 넓은 장소도 필요해. 그러니 너무 재촉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려주게.”

로에라가 한석구와 김창의 눈치를 보더니 덧붙였다.

“···마탑 찾아와서 빨리하라고 난리 쳐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 얌전히 기다리라는 소리일세.”

“누가 뭐래? 그러면 우린 이만 갈 테니까 준비 다 끝나면 그때 불러.”

로에라가 고개를 끄덕이니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거겠지?”

“또 뭐가?”

“대악마 불러내는 거 말이야, 정말 괜찮은 거냐고. 내가 알기로 대악마를 불러내는 걸로 난리칠 만한 곳이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요정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신전일세.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우리를 악마숭배 집단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마탑은 망하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 싹 다 길거리에 나앉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악마숭배자라는 누명을 쓰고 쫓기게 될 텐데······.”

“걱정도 많군. 내가 전에 말했잖아. 신전에 아는 연줄이 있어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그럼 요정 왕국은?”

“애초에 내가 대악마 죽이려는 것도 요정 대가문의 가주에게 의뢰를 받아서 그런 거야. 다 합의된 사안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

“저, 정말인가? 그런데 내 생각에 요정 대가문의 가주가 대악마를 죽이라고는 했어도 직접 불러내서 죽이라고는 안 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러면 대악마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어쨌거나 대악마 죽이려면 누군가가 불러내야 하는데 그 더러운 일을 내가 대신해주고 대악마까지 죽여주겠다는데 누가 뭐라 해?”

대악마 불러내는 건 네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건데? 로에라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그쪽만 믿고 있겠네. 솔직히 마탑 망하면 이건 전부 다 원탁 책임이니까 피해 보상해줘야······.”

“만약 누가 뭐라고 하면 내가 가서 말로 잘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진짜 말로 해결하는 거 맞나? 로에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어쨌건 준비가 다 끝나면 부르겠네. 우리도 대악마를 불러내는 건 처음이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결과가 있길 빌지.”

김창이 그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가만히 있던 한석구가 김용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면 용걸이는 수고 좀 해주고. 나중에 돌아오면 식사나 한 끼 하자.”

“그래, 나중에 연락하마.”

한석구와 김용걸이 간단히 인사하더니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김용걸은 한석구가 김창과 함께 원탁으로 돌아가는 걸 가만히 보더니 곧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다들 뭘 그리 멀뚱히 있나? 일합시다, 일. 빨리해야 나도 집 가지.”

그 말에 마법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에라는 김용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마법사들을 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별일 없겠지······?”

* * *

성기사 카룩스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그는 신전 제일의 성기사로서 이미 대적할 자가 없는 강자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위를 향해 정진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부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요즘 들어서 훈련량을 더욱 늘렸다. 사람들이 어째서 그러냐고 물으면 항상 웃으며 신의 칼날로써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복자 경······.’

정복자는 신을 믿지 않는 성기사다. 그러면서 자신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강력함을 가지고 있다.

카룩스는 남을 질투하는 게 죄악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은 어째서 그런 불신자에게 그만한 힘을······.

‘···그리고 김창.’

카룩스는 딱 한 번 만났던 칼잡이를 잊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김창은 정복자보다도 더 강한 게 분명했다.

정복자만 하더라도 대륙에서 손꼽힐 만한 강자일 텐데 그보다 더 강하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카룩스는 태양신의 기사로서, 그리고 대륙의 악과 맞서 싸워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보다 약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악에 물들어 사람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민다면 누가 감히 대적할 것인가?

“오롯이 내 의무로다······.”

카룩스는 혼자 중얼거리며 단련실을 나왔다. 그가 가볍게 몸을 씻고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복도에서 소아라 추기경과 마주쳤다.

“아, 추기경님.”

카룩스가 아는체를 하자 소아라 추기경이 웃으며 말했다.

“카룩스 경, 또 수련하고 오는 길이오? 요즘 들어 너무 몸을 혹사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오.”

“괜찮습니다. 태양신의 기사로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하하하, 그것참 성기사다운 말이로군.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오.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소?”

“과하면 덜어내면 되지만 모자라면 채울 수 없으니 차라리 과한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아라 추기경이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웃더니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 가는 길이오?”

“방에 잠깐 휴식을 취하러 갈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러면 내 방에서 잠깐 차라도 마시지 않겠소? 물론 싫다면 거절해도 괜찮소.”

“아닙니다. 가시지요.”

카룩스와 소아라 추기경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무실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소아라 추기경이 찻물을 끓이는 걸 보던 카룩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수정구가 있었다. 물론 저게 보통의 수정구가 아니라 신전의 성물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거 보통 때는 수정구가 아니라 그냥 철구의 모습으로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뭔가 비치고 있는데······.

“···소아라 추기경님.”

카룩스가 나직이 말하자 소아라 추기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역시 팅게르의 수정구를 보고서 입을 쩍 벌렸다.

“저, 저거······.”

수정구에는 미래에 있을 한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제단과 수많은 마법사, 잠깐 시간이 지나자 모습을 드러낸 대악마와 그걸 보며 씩 웃고 있는 칼잡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아닙니까?”

카룩스가 말하자 소아라 추기경이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칼잡이 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김창 저 인간, 이제 진짜 막 나가기로 한 건가? 카룩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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