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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한가하군.”
김창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며칠째 원탁에서 머무는 중이었는데, 원래 방랑자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던 사람이 한곳에 가만히 있으려니 지루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딱히 원탁에 정착할 마음도 없으면서 며칠 동안이나 머물고 있는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요안니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고 둘째는 헤인리히스가 지상에 강림하는 걸 기다리기 위해서다.
마음 같아선 잠깐 바람이나 쐴 겸 어디 가서 누구 좀 썰고 왔으면 하는데 괜히 그랬다가 길이 엇갈리면 시간만 낭비하는 셈이 되니 원탁에서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성미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하려니 이것만큼 고역인 것도 없다. 김창은 요즘 시간을 죽이기 위해 홀 구석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을 지켜보는 취미 아닌 취미가 생겼는데, 뜬금없이 관찰 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 시선을 몹시 두려워했다.
언제던가, 원탁에 들렀을 때 산자이의 부하들을 때려눕힌 탓인가? 아니면 한석구랑 어울려 다니며 이것저것 한 탓에 인식이 나빠졌나?
어쨌건 자신이 홀에 있는 바람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하기야 수틀리면 칼부터 뽑고 보는 칼잡이랑 누가 같이 있으려 하겠냐마는.
“네가 인상 쓰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도망가는 거 아니야. 원탁 안에서 칼은 왜 차고 다니는 거야? 넌 집에서도 무기 들고 다니냐?”
김창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한석구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김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미국에선 집에서도 총 차고 다니던데.”
“여기가 미국이냐?”
“한국도 아니지.”
한석구가 또 쯧 하고 혀를 찼다. 그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서 말했다.
“그 테네벨레인가 하는 요정 가문에서는 연락 없어? 걔네가 개눈깔 뒷배를 찾아주겠다고 했다며?”
“티샬레 시켜서 테네벨레 가문에 보냈는데 아직 별말은 없다. 요안니스인가 하는 놈은 하이나랑 다르게 자기가 어디 사는지 안 가르쳐주고 다닌다더라. 그래도 암흑 의회인가? 요안니스 따까리 놈들 흔적 더듬어 올라가면 결국 머리도 찾을 수 있다더군. 어쨌건 걔도 말 들어보니까 하이나 못지않게 나쁜 놈이더만? 그래서 걔 죽여주면 사례할 테니 꼭 좀 칼침 놔달래.”
고귀한 요정 가문이 그런 식으로 저렴하게 말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한석구는 흠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요안니스 놈 먼저 찾아봤자 당장 죽이러 갈 수도 없으니 상관없겠지. 지금 중요한 건 대악마 쪽인데. 그 이름이 뭐랬더라? 헤 뭐시기······.”
“헤인리히스.”
“너 개눈깔 이름도 모르고 다녔으면서 대악마 이름은 잘 외우고 다니네.”
“난 내가 죽일 만한 가치가 있는 놈 이름은 외워.”
“개눈깔은 아니었고?”
“영혼 약탈자가 된 뒤에 만났으면 기억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결국 김용걸을 만나서 이름을 들을 때까지 개눈깔의 본명도 몰랐지 않나? 한석구가 영 의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다가 또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어쨌건 그 헤인리히스라는 대악마를 불러내는 거, 생각보다 잘 되는 중이라더라. 마탑주 양반한테 연락해보니까 용걸이 덕분에 문제없이 착착 진행 중이래. 웃긴 게 그 양반이 용걸이 칭찬을 자꾸 하더라? 그때 만난 게 처음일 텐데 마음에 든 모양이지?”
“마탑주 내가 보니까 너보다 김용걸한테 더 호감을 느끼는 것 같던데. 마법사로서 실력도 김용걸이 너보다 더 위겠다, 아주 그쪽으로 줄을 갈아타려는 걸지도 모르지.”
그 말에 한석구가 얼굴을 싹 굳혔다.
“하, 안 되겠네. 가서 또 난리 한 번 쳐줘?”
남의 업장 가서 난리 치는 깡패도 아니고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김창이 쯧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언제 끝날 것 같대?”
“별일 없으면 내일이나 의식 진행할 것 같다던데. 당연히 너도 의식에 참여할 거지?”
“그래야 나오자마자 칼침 놔줄 수 있을 테니까.”
한석구가 하하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출발하자고.”
“그러지.”
내일이면 이 지루한 시간 죽이기도 끝이 난다. 김창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러 가지 짐들이 보였다. 여기 처음 왔을 땐 아무것도 없이 썰렁했는데 여러 일 때문에 자주 머물렀더니 어느새 짐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원탁에 정착해 버릴지도 모르겠는데. 김창은 혼자 웃더니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원래 할 일 없을 때는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는 게 제일인데 여긴 그게 없어서 아쉽다.
어쩔 수 없지. 이럴 땐 잠이나 자는 게 제일이다. 김창은 눈을 감고서 곧 새까만 어둠과 마주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아마 내일 나올 대악마의 미래도 저럴 테지. 김창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곧 잠이 들었다.
“······음.”
칼잡이의 아침은 빠르다. 옛말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던가? 칼잡이도 마찬가지다. 일찍 일어나는 놈이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
음, 이건 좀 아닌가. 아직 잠이 덜 깨서 헛소리를 중얼거리던 김창은 세숫물로 대충 얼굴을 씻고 바깥으로 나왔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으니 한석구가 다가와서 알은체를 했다.
“일찍 일어났네? 용걸이한테 연락해보니까 점심 때쯤이면 의식 진행할 수 있을 거라더라. ”
“그거 잘됐군. 점심 먹을 때 소환해서 저녁 먹기 전에 끝내면 되겠어. 일 끝나고 다들 회식이나 한 번 할까.”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마탑 사람들도 고생했을 테니 이럴 때 식사나 한 번 대접해야지. 내가 보니까 사람이라는 게 채찍만 휘두르면 안 되고 당근도 주고 그래야 하더라고.”
그걸 아는 사람이 매번 마탑주를 갈궜나? 김창이 웃더니 식기를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올 테니까 나중에 보자.”
“정문으로 와. 거기서 차원문 열어서 갈 테니까.”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당을 나왔다. 그는 세면장에서 몸을 씻고 양치를 한 후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칼 두 자루를 허리춤에 단단히 메고서 정문으로 나가니 한석구가 미리 차원문을 열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갈까?”
김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차원문을 통과했다.
“여긴 어디야? 마탑은 아닌 것 같은데.”
차원문을 통과해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다. 너른 들 위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제단이 있었고 그 주변은 마치 죽음의 땅처럼 메말라 있었다.
제단 위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돼지나 소 따위의 제물들을 보니 여기가 마치 공포 영황의 세트장처럼 느껴졌다.
들판 위에 뜬금없이 이런 게 있으니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김창이 허 하고 소리를 내자 한석구가 대답했다.
“마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들판. 아무리 그래도 마탑 안에서 대악마를 불러낼 수는 없으니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지.”
“그런데 이런 데서 대악마를 불러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보지 않나?”
“여기 사유지야. 원래 무기 시험할 때 바다에 미사일 쏘거나 산에 포탄 쏘는 거 알지? 마법도 똑같아. 뭔가 마법 테스트할 일 있으면 이런 데서 해보는 거지. 그래야 누가 휘말릴 일이 없을 테니까.”
설명에 납득한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나?”
“그래, 이제 시작한다. 원래는 밤에 하거나 아니면 어두운 공간에서 해야 성공할 확률이 올라가는데 지금은 사정상 어쩔 수 없지.”
대답한 건 김용걸이었다. 그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손에는 웬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사악한 흑마법사처럼 보였다.
“자신은 있고?”
“실패하면 마는 거지 뭘. 이거 준비하는데 내 돈 들어간 것도 아니고, 내가 쓴 거라곤 시간뿐인데 그건 많아서 괜찮아.”
그러면 실패하면 괜한 돈 쓴 마탑만 피눈물을 흘리겠군. 생각해보니 이미 원탁에 착취당하는 중 아니었나? 이번 의식이 실패하면 다음 마탑주 선거에 큰 영향이 있을 듯했다.
김창은 슬쩍 로에라의 얼굴을 봤는데 안색이 창백한 게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준비를 한 듯했다.
“제발, 제발 성공하게 해주세요······.”
마탑주가 대악마를 불러내는 의식을 성공하게 비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원탁에서 까라면 까야지.
“그러면 시작한다! 마력 회로 점검하고! 제단 상태 마지막으로 확인해! 다 끝나면 각자 위치로!”
김용걸이 크게 소리치자 마탑의 마법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며칠 같이 지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 무리를 다 휘어잡은 걸까?
하기야 마탑 사람들은 한석구한테도 벌벌 떠는데 그보다 더 강한 김용걸한테 대들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할 것이다.
로에라까지 김용걸에게 명령을 받는 걸 보니 누가 마탑주인지 모를 일이었다. 김창이 웃으며 한석구와 함께 의식의 진행을 지켜봤다.
“라 세라 후르아 호리······.”
김용걸이 영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우고 있으니 제단에서 붉은빛이 반짝였다. 의식의 영향인지 제단 위에 올려뒀던 제물들이 불타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많은 양의 제물을 바쳤는지 열기가 따듯하다 못해 뜨거울 지경이었다.
김창은 악마 소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지만 문외한이 봐도 의식이 제대로 진행 중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면 아마 몇십 분 내로 헤인리히스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마탑의 마법사들과 김용걸, 그리고 한석구가 마법을 퍼부을 것이고 대악마가 약해진 틈을 노려 김창이 목을 벨 것이다.
그러면 다 끝난다. 이토록 쉽게 신성도 벌고 돈도 벌 수 있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아직 대악마가 하나 더 남았으니 며칠 뒤에 또 불러내서 죽여야지.
김창이 즐거운 상상을 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던 차에 저 멀리서 무언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만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걸 보면 한 명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오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여긴 마탑의 사유지가 아니었던가?
“야, 저거 뭐냐?”
김창이 어깨를 툭 치면서 묻자 한석구가 고개를 돌렸다.
“음? 저거······?”
한석구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오른쪽 눈에 가져다 댔다. 마법의 힘으로 시력을 강화하자 저 멀리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웬 갑옷 입은 놈들이 떼를 지어서 달려오는데? 저거 대체······.”
갑옷 입은 놈들? 설마 요정 전사들은 아닐 것이다. 그쪽과는 이미 합의가 됐으니 굳이 병력을 보낼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러면 저들은 누구인가? 김창이 생각하는 사이에 한석구가 말했다.
“선두에 선 사람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 왜 저번에 원탁에 잠깐 왔던 그 성기사 아닌가? 이름이 이든인가 했던······.”
성기사? 김창이 그 말을 듣고서 아 소리를 냈다.
“신전에서 보낸 건가?”
“신전? 거기서 우리가 뭘 하는지 어떻게 알고 성기사들을 보내?”
“거기에 팅게르의 수정구인가 하는 거 있어. 세상에 위협이 닥치면 그게 경고를 해줘.”
“별 신기한 물건이 다 있네. 그러면 그거 보고 여기까지 온 건가? 너 신전에 연줄 있다고 안 했어? 거기랑 이야기가 다 된 거 아니야?”
“연줄이 있는 건 맞는데 이야기는 따로 안 했어.”
“야! 그러면 어떡해! 쟤네가 오해하잖아!”
김창이 진정하라는 듯 손을 흔들더니 다가오는 성기사 부대를 향해 움직였다. 선두에 선 건 두 명의 성기사였는데 양쪽 다 아는 얼굴이었다.
성기사 이든과 카룩스. 그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든은 왜 또 이런 짓을 했느냐 하는 얼굴이었고 카룩스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김창이 모습을 드러내자 카룩스가 손을 들어 부하들을 멈추게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카룩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비밀이야.”
“하기야 비밀이겠죠. 남한테 말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뭘?”
카룩스가 김창의 등 뒤에 있는 제단을 쳐다봤다. 의식은 한창 진행 중이라 아까보다 붉은빛이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악마를 불러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대악마를 말입니다. 이봐요, 김창. 나는 원탁의 이방인들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당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 자각이 있긴 합니까?”
“뭔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이거 다 오해야. 우린 대악마를 불러내려는 거 아니야. 내가 잘 설명해줄 테니까 내 이야기 좀······.”
“성기사는 악마숭배자와 협상하지 않습니다. 비키십쇼. 저 제단을 파괴하고 의식을 막아야겠으니.”
이럴 때일수록 흥분하면 안 된다. 말로 잘 설득해야지. 김창이 말했다.
“감히 의식을 막으려 해? 넌 뒈졌다.”
저 말 언젠가 들어본 적 있지 않나? 이든이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