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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좆됐다고······.”
김창이 고개를 돌려 지옥의 문을 쳐다봤다. 거의 성벽만 한 크기의 문은 쉴 새 없이 괴물들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저걸 보니 새삼 김용걸이 원탁 랭킹 1위가 맞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는 건 대악마가 자신의 군세를 모두 이끌고 현세를 정복하러 온다는 뜻인데, 그건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사건이다.
아무리 마탑의 마법사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대악마를 불러낸 건 김용걸이었으니 그는 혼자서 이만한 사건을 일으킨 셈이 된다.
“확실히 이건 좀 큰일이군.”
김창이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카룩스가 쿨럭쿨럭 기침하며 말했다.
“좀 큰일 정도가 아닙니다······. 지옥의 문이 열렸으니 곧 거대한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이 대륙의 명운을 걸 만큼 거대한 전쟁이······.”
김창은 여전히 지옥의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벼락 때문에 뒤로 날아갔던 김용걸이 몸을 일으켜 욕설을 내뱉고 있었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도망이라도 치려는 것인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슬쩍 한석구 쪽을 보니 성기사들 역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한 것인지 싸움을 멈추고 지옥의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괴물들은 쏟아지고 있었고 조금 있으면 수백 마리까지 늘어날 것 같았다.
“좋군.”
뜬금없는 소리에 카룩스가 하 소리를 냈다. 그가 칼에 베인 상처를 손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정말 악마숭배자였던 겁니까? 좋다니? 대체 뭐가 좋다는 겁니까?”
“신성을 얻어본 적 있나?”
아까부터 뭘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는 거지? 카룩스가 얼굴을 찡그리자 김창이 말했다.
“신성이라는 것은 신이 되기 위한 자격이고 그걸 얻기 위해선 아무나 해내지 못할 위업을 이루어내야 한다더라고. 그러니 좋은 거지. 대악마 하나만 썰어도 신성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거기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괴물이라? 이 일을 끝내고 나면 얼마나 많은 신성을 얻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아.”
카룩스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신성이라니, 저 남자가 그걸 대체 왜······.
“솔직히 이만한 잔칫상이 있으면 나 혼자 다 먹고 싶은데, 그러면 배 터질 것 같아서 못하겠군.”
“대체 뭔 소리를······.”
“뭔 소리를 하긴. 청소하는데 너희도 좀 거들라는 소리지. 설마 칼 좀 맞았다고 못 하겠다고 빼는 건 아니겠지? 정복자 걔는 칼 맞아도 신성력으로 치유하니까 금방 낫더니만.”
김창이 정복자를 들먹이자 카룩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김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신을 섬기는 성기사로서 내 의무를 다할 겁니다.”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빨리 가서 해.”
카룩스가 입술을 꽉 깨물면서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모든 것은 태양을 위하여!”
그의 목소리에 멍하니 있던 성기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카룩스를 보고서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다.
성기사들이 카룩스에게 치유 주문을 써주는 걸 가만히 보던 한석구가 김창에게 말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냐? 아니, 대악마만 불러내는 거 아니었어? 저 문은 또 뭐야?”
“보면 모르냐, 지옥의 문이지.”
“누가 몰라서 물어봤냐? 저게 왜 나온 거야?”
“카룩스 말로는 김용걸이 너무 잘나서 그런 거라던데. 일단 쟤나 좀 불러봐.”
한석구가 한숨을 쉬더니 크게 소리쳐서 김용걸을 불렀다. 자신을 부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김용걸이 점멸 마법으로 곧장 거리를 좁혔다.
“씹, 저거 뭐야? 저 문 왜 생긴 거야?”
네가 했으면서 왜 나한테 물어. 김창이 간단히 대답했다.
“네가 너무 잘나서 지옥의 문까지 열어버린 거라니까 너도 문제 해결하는데 손 좀 보태.”
“뭐? 내가 잘난 건 맞지만 그게 뭔······.”
김용걸이 어이없어하는 사이에 응급처치를 마친 카룩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아직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제 어쩔 겁니까? 뭔가 작전이 있나요?”
“있지, 작전.”
김창이 말하자 카룩스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그럼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너희가 괴물들을 죽인다.”
“···그리고요?”
“내가 헤인리히스를 죽인다.”
“······그딴 건 아무도 작전이라고 안 합니다. 성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전부 합쳐 봐야 백 명을 조금 넘을 건데 저만한 숫자를 뭔 수로 상대합니까? 그리고 당신 혼자서 헤인리히스를 죽인다고요? 그게 가능하리라 믿습니까? 물론 당신이 전에 칼레드리온을 죽인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힘을 잃은 반쪽짜리 대악마였습니다. 이번에 온전한 상태로 현현한 헤인리히스는 격이 달라요.”
“아깐 네 의무를 다하겠다면서 말 되게 많군. 이게 작전이 아니라고?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 훌륭한 작전이라고 할걸.”
카룩스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김용걸과 한석구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그게 낫겠군. 솔직히 내 마법으론 따까리들 쓸어버리는 건 가능해도 대악마는 못 죽일 것 같으니까.”
“하기야 게임에서도 쫄 처리해 줄 놈이 있긴 해야지. 내가 대악마 상대하는 거 도와줄 수도 있는데 이건 원래 거래 내용에 없던 일이니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는 없을 것 같네. 애초에 나 없어도 되잖아?”
이건 김창에 대한 신뢰가 큰 건가 아니면 그냥 현실 감각이 없는 건가? 카룩스가 당황하는 사이에 한석구가 크게 소리쳤다.
“어이, 마탑주 아저씨! 이리로 와요!”
슬금슬금 물러나며 도망치려 하던 로에라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가 못 들은 척을 하고 있자 한석구가 다시 외쳤다.
“아저씨, 도망가면 나한테 죽어! 그냥 빨리 와!”
“이런 씨발.”
로에라가 욕설을 내뱉으며 점멸 마법을 썼다. 그가 가까이 오자 한서구가 어깨를 두드려 주며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존나 센 거 알지? 대악마고 뭐고 우리한테 걸리면 꼼짝 못 하니까 가서 싸워요.”
“무, 물론 알지······.”
로에라는 원탁의 이방인들을 쳐다봤다. 한석구만 해도 괴물인데 김창과 김용걸은 그보다 더한 괴물이다.
고작 이만한 숫자로 대악마의 군세와 싸운다고 하면 그게 뭔 미친 짓이냐고 했을 텐데 이 세 명의 도움이 있으면 정말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싸움에선 이겨도 자신은 죽을 수 있으니 목숨을 걸어야 할 테지만.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합시다. 자, 다들 해산. 괴물들 더 나오기 전에 문 닫고 집에 가야지.”
한석구가 짝 박수를 치자 로에라가 에휴 한숨을 쉬며 마법사들 쪽으로 돌아갔다.
정말 이대로 싸우나? 카룩스가 당황하면서도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하기야 이대로 싸우다 죽으면 그 또한 영광된 일일지니······.
“그럼 시작합니다! 내가 신호하면 다들 돌격해!”
한석구가 머리 위로 두 손을 들었다. 김창과 김용걸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로에라와 마법사들, 카룩스와 성기사들은 긴장된 얼굴로 지옥의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백 마리까지 불어난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약간의 흐느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곧 거대한 굉음에 의해 묻혔다. 파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한석구의 머리 위로 모여든 마력이 창백한 빛을 발했다.
처음엔 그냥 마법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점차 강해지는 빛의 세기를 보고서 당혹감을 느꼈다.
마법사 수십 명을 모아도 저런 마법은 못 쓸 것 같은데, 지금 저만한 마력을 휘두른다면 대체 뭔 일이······.
“뒈―져―라!”
빛이 내달렸다.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간 창백한 빛이 공기를 달구고 대지를 태웠다.
그건 일소였다. 말 그대로 일직선상에 있는 괴물들을 약간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전부 지워버렸다.
마치 지우개로 종이 위의 검정을 지워버린 것처럼 깔끔한 직선이 이어졌다. 마법은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고 기이한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던 괴물들조차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 정도였다. 방금 그 일격으로 백 마리도 넘는 괴물들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저 미친 괴물 새끼······.”
로에라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카룩스가 허 하고 입을 벌렸다.
“이게 원탁의 이방인인가?”
한석구가 날린 마법의 압도적인 위력에 모두가 감탄했지만 김창과 김용걸만은 무덤덤했다.
“저걸로도 문은 못 부수는 건가.”
“되게 튼튼하네. 대악마를 죽여야 문이 닫히려나?”
“아마 그럴지도.”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한석구가 크게 소리쳤다.
“공―격!”
그 외침에 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리고 성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돌격을 시작했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으나 방금 한서구가 보여줬던 무시무시한 일격 덕분에 모두가 조금씩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러면 나도 시작해볼까.”
뒤에서 뒷짐만 지고 있던 김용걸이 움직일 낌새를 보이자 카룩스가 슬쩍 그를 보았다.
한석구만 해도 저 정도 위력의 마법을 휘두르는데 그럼 지옥의 문을 불러낼 만큼 강력한 흑마법사는 대체 얼마나 강할까?
은근한 기대를 하며 쳐다보고 있으니 김용걸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한석구만큼 시각적으로 강렬한 자극은 없었는데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언데드다! 죽은 괴물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웬 성기사의 외침에 카룩스가 눈을 부릅뜨며 그쪽을 쳐다봤다. 과연 성기사의 말대로 죽은 괴물들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괴물들만 상대하는 것도 벅찬데 죽여도 다시 일어나기까지 한다고? 카룩스가 입술을 꽉 깨물며 적들을 향해 달려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음?”
죽음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난 언데드들은 어째서인지 괴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언데드들의 공격을 받아 죽은 괴물은 다시 언데드가 되어 일어났다.
저게 대체 뭔? 저건 대악마의 힘이 아니었던 건가?
“설마?”
카룩스가 얼른 고개를 돌려 김용걸을 쳐다보자 그의 몸에서 어두운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시체 군단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라 카룩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원탁만으로 왕국과 전쟁도 할 수 있겠는데······.”
대악마를 불러내서 죽이겠다는 미친 짓을 뭔 깡으로 하나 했더니 정말 그럴 만한 능력이 있던 모양이다.
카룩스는 연신 헛웃음을 흘리다가 칼을 들고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이젠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태양신을 위하여!”
강력한 성기사인 카룩스까지 전장에 가세하자 괴물들이 우수수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지옥의 문에서 괴물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김용걸의 사령술 덕분에 숫자에서 밀리는 일은 없었다.
싸움이 이어지자 누가 더 유리하다고 할 것 없는 고착 상태가 길어졌는데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선 결국 우두머리끼리 붙어야 했다.
김창은 칼 한 자루를 들고서 지옥의 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괴물들이 겁도 없이 달려들었으나 그가 칼을 휘두를 것도 없이 하늘을 나는 칼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다.
이쪽의 우두머리가 나섰으니 이젠 저쪽의 우두머리가 나설 차례다. 김창이 가만히 지옥의 문을 쳐다보고 있자 쿵 소리가 나며 거대한 손이 문을 붙잡았다.
“지옥의 문이 열리는 그날, 이 세상엔 종말이 찾아오리니.”
대악마 헤인리히스의 육체 중 겨우 손 두 개만 현세에 나왔을 뿐인데 급격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이 주변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다. 칼레드리온과 다르게 온전한 상태로 현현하는 것이라더니 확실히 그 기세가 압도적이었다.
헤인리히스는 대악마답게 덩치가 컸다. 날카로운 뿔이 달린 염소 머리뼈 가면을 쓴 대악마의 머리만 해도 어지간한 악마만큼이나 거대했다.
그건 존재 자체가 사악한 독이었다. 지독한 악취와 함께 숨 쉬기 괴로울 만큼 공기가 무거워졌다.
심약한 자라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고 정신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대악마의 존재감은 분명 그 정도였으니까.
헤인리히스는 지옥의 문 너머로 머리만 내밀고서 정면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겁도 없이 대악마를 불러낸 얼치기들을 무참히 쓸어버리는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 왔나?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그럼 한 번 붙자.”
어째서인지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시체 군단,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강력한 마법, 함성을 내지르며 신성한 빛을 흩뿌리는 성기사단.
그리고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칼잡이. 그 내면에 깃든 신성은 반신에 가까울 만큼 찬란하다.
“······.”
끼이익.
헤인리히스가 조용히 두 손으로 지옥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