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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언제부터 마탑이 원탁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까?”
당황스러운 건 카룩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 김용걸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김용걸은 삐딱하게 목을 기울이고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냐고? 그건 대악마 불러내기 전부터 그랬지. 마탑이 갑자기 단체로 돌아버린 것도 아니고 자기들 마음대로 대악마를 불러내려 했다고 생각해? 그럴 리가 있나. 전부 다 원탁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한 일이었어. 그리고 마탑주는, 그러니까 전(前) 마탑주 로에라가 이번 일에 협조하는 대가로 원탁의 보호를 요청했지. 분명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책임을 물으려 들 사람이 있을 테니까.”
로에라는 허 하고 입을 벌렸다. 저건 거짓말이다. 자신은 그런 부탁을 한 적도 없고 대악마를 불러내는 일에 협조한 건 한석구의 협박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김용걸이 하는 말 전부는 자신과 마탑을 지켜주려고 하는 거짓말이다. 고마운 일이지만 굳이 왜? 설마 마탑주 자리가 탐나서?
설마 그러려고. 김용걸 정도 되는 흑마법사가 대체 왜 마탑주 자리를 탐내겠나? 마탑의 주인이라는 이름보다 원탁에서 가장 강한 흑마법사라는 타이틀이 훨씬 더 가치 있을 텐데.
‘그냥 순수하게 우리를 지켜주려고······.’
로에라는 순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원탁에는 순 깡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정상인도 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김용걸은 대악마를 불러내기 위한 의식을 준비할 때도 마탑의 사람들을 잘 대해줬다.
한석구였다면 일이 너무 느린 거 아니냐, 지금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냐, 한 번 매운맛 좀 보여야 빨리 일할 거냐 등등의 폭언을 내뱉었겠지만 김용걸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그게 정말입니까?”
카룩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석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까 한석구는 카룩스의 말에 동의하면서 마탑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김용걸의 말은 거짓말이다. 한석구와 합의조차 되지 않은 즉흥적인 거짓말.
“원탁이 마탑 먹었다는 게 진짜냐고?”
한석구는 김용걸과 카룩스, 그리고 로에라를 한 번씩 쳐다봤다.
그는 마탑과의 인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말해서 그들에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금껏 여러 마법 물건을 싼 가격에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던 건 전부 마탑 덕분이다.
또한 이번 의식 역시 마탑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도움을 받았다면 보답을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자신은 보답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가볍게 버리려 하고 있지 않나?
한석구는 혼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원탁의 안위가 중요하다 해도 이래선 안 된다.
생각해보면 원탁이 언제부터 남 눈치를 보면서 행동했나? 항상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면서 왜 지금은 또 남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한석구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마탑이 원탁 밑으로 들어오긴 했었지. 그런데 내가 다른 일로 바빠서 용걸이가 대신 일 진행했거든? 그래서 내가 까먹고 있었나 보네. 마탑 우리 거 맞아. 그러니까 쟤네 건드리면 우리 건드리는 거랑 똑같은 거야.”
카룩스는 한석구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한석구의 선택이라면 존중해야 했다.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야. 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무탈하시길.”
카룩스는 거기서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부하들에게 돌아갔다. 성기사단을 이끌고 신전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김용걸이 한석구에게 말했다.
“나한테 뭐라고 안 할 거냐?”
한석구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니, 됐어. 잘했어, 잘한 거야. 나도 마탑이랑 알고 지낸 인연이 좀 되거든? 쟤네한테 도움도 많이 받고 그랬는데 인제 와서 갑자기 짐짝 버리듯 내치는 건 쓰레기나 할 법한 짓이지. 그러니··· 이게 맞아. 이게 맞다고.”
김용걸이 한석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고맙다. 난 저 사람들이랑 알고 지낸 지 며칠 안 됐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밤 새면서 같이 부대끼고 했더니 차마 그냥 버릴 수가 없더라.”
“이런 걸 보면 너는 흑마법사가 아니라 사제 같은 걸 해야 했는데. 하여튼 흑마법사라는 새끼가 착해빠져선······.”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난 그냥 게임 캐릭터가 흑마법사인 것뿐이야.”
김용걸과 한석구가 서로를 보며 작게 웃었다. 곁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로에라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고맙네······.”
김용걸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뭘, 별거 아니었는데.”
“하지만 우리 때문에 원탁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됐지 않나.”
“애초에 그 큰 위험이라는 것도 우리 때문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런가···. 하지만 그래도 내 고맙다는 말은 꼭 해야겠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마탑은 악마숭배자로 몰려 끔찍한 고문을 당했을 걸세. 다음에 마탑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하게. 반드시 달려갈 테니. 이건 마탑주로서 하는 맹세일세.”
김용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뭔 마탑주로서의 맹세?”
“음? 아니, 원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 지고 도우러 가겠다는 말이네만.”
“그러니까 아저씨가 왜 마탑주로서 맹세를 하느냐고. 마탑주는 이제 난데.”
“···뭐?”
아까 그거 신전으로부터 지켜주려고 그냥 지껄인 말이 아니었나? 그러면 정말 원탁이 마탑을 먹겠다고?
로에라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 한 말 진심이었나?”
“그러면 우리가 뭐 아무 대가도 없이 마탑을 지켜주는 줄 알았나? 우리도 얻는 게 있긴 해야지.”
“아니, 애초에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한 건 전부 다 원탁 때문이잖나!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우리도 이런 일 당할 일 없었어!”
“맞는 말이야. 그런데 마탑을 지켜주는 것도 원탁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되지. 과정이야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 아닌가? 아니면 가서 성기사 양반 불러올까? 사실 아까 한 말 다 거짓말이고 마탑은 악마숭배 집단이니까 싹 잡아다 고문하라고 하면 되나?”
로에라는 이제 어이가 없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김용걸 이 새끼, 나름 인격자인 줄 알았는데 결국 근본은 깡패랑 다를 게 없다.
“······잘못했네.”
“뭘 잘못까지야.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수다. 그러면 마탑으로 가서 이야기 좀 나누실까?”
김용걸이 로에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마법사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한석구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면 이제 호엔에 아산트 섬, 그리고 마탑까지 먹은 건가. 원탁이 쭉쭉 성장하고 있네. 이대로면 정말 나라 하나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호엔은 정복자가 영주 자리에 오르고 나서 원탁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에 빠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원탁의 비호 아래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주변 영지에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하기야 원탁이 없더라도 정복자라는 강력한 성기사가 있는데 누가 시비를 걸려고 들까.
“생각해보니 아산트 섬에도 영주 하나 보내야 하는데. 누가 좋을지 모르겠네.”
원탁에서 식량이나 축내고 있는 랭커들 중 하나를 보내면 열심히 일할까? 어쩌면 자기 땅이 생겼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할지도 모르겠다.
당장 영주 노릇에 별 관심 없던 정복자도 지금은 열성적으로 영지 개발에 힘쓰고 있지 않나?
그런 걸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뭐 그 문제야 나중에 돌아가서 생각해보고. 일단은 돌아갈까.”
신전의 성기사들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떠나고 이곳에 남은 것은 김창과 한석구뿐이었다.
그는 마치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김창에게 다가갔다.
“야, 집에 가자!”
한석구의 외침에 줄곧 가만히 있던 김창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김창은 한석구가 차원문을 여는 동안 가만히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대악마 헤인리히스를 죽이고 나서 막대한 양의 신성을 얻었다. 그는 이제 반신의 영역까지 단 한 걸음만 남겨두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침 다음 싸움 상대까지 미리 정해져 있으니 이제 남은 건 요안니스를 죽이고 반신의 격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물론 반신이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그건 신이 되기 위한 중간다리일 뿐, 결국 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 신처럼 신도를 거느릴 수도 없고 신도에게 권능을 내려주거나 화신을 지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일개 승천할 자보다 훨씬 더 강해진다는 건 확실했다. 이제 남은 승천할 자는 요안니스를 제외하고 셋.
혹시나 그 셋 중에 이미 반신의 격에 오른 자가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진작 승천자의 규율을 깨고서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았을까?
‘만약 요안니스를 죽인다면 지금 상황에선 내가 제일 강한 셈이군.’
자신이 요안니스를 죽인다면 승천할 자 중에서 제일 먼저 반신의 격에 오르는 셈이고, 그건 곧 그들 중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날 죽이려고 승천할 자끼리 힘을 합칠지도 모르겠어.’
강한 적을 죽이기 위해선 약자끼리 힘을 합치는 게 보통이다. 김창이 반신이 된다는 건 달리 말해서 제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된다는 뜻이니 승천할 자끼리 연합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재밌겠군.”
김창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한석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뭐가?”
“그런 게 있어. 차원문은 다 열었나?”
“그래. 그러면 곧장 돌아갈까? 생각해보니 원래 일 끝나고 마탑 애들이랑 회식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못 했네. 뭐 그거야 나중에 하면 되니까. 일단은 돌아가서 씻고 식사도 하고 좀 쉬자고.”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석구와 함께 차원문을 통과했다.
원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일단 더러워진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한석구가 김창의 몸을 보며 문득 말했다.
“그런데 너 아까 싸우는 거 보니까 엄청 다친 거 아니었냐? 몸이 되게 멀쩡한데.”
“침 바르니까 다 낫더라.”
“···네 침은 무슨 만병통치약이냐?”
옷을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식당이었다. 격한 전투로 힘을 많이 썼기 때문에 뭔가를 먹어줘야 했다.
한석구가 식당의 요리사에게 이것저것 요리를 부탁하고 난 뒤에 사용인들이 식탁에 음식을 가져왔다.
“너 그것만 먹어서 되겠냐?”
한석구의 음식은 푸짐한 반면에 김창의 음식은 간소했다.
대악마와 직접 싸운 김창이 힘을 써도 더 썼을 텐데 먹는 양이 너무 적어서 한석구가 미간을 좁혔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건 거짓말 같은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김창은 분명 격렬한 싸움을 끝내고 왔는데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신성의 영향일까? 육체가 반신에 가까워지면서 뭔가를 먹을 필요가 점차 줄어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천상의 신이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일 터다.
“지금 입맛 없는 모양인데 나중에라도 뭐 좀 챙겨 먹어라. 사실 내가 너 하나 믿고 카룩스한테 그 소리한 건데 너 갑자기 쓰러지면 나도 곤란해.”
장난스럽게 말하는 한석구를 보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다시 홀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서 디저트로 차와 과자를 먹고 있는데 김창이 문득 말했다.
“왔군.”
“뭐가?”
김창이 손가락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공간이 비틀리더니 곧 차원문 하나가 생겨났다.
거기서 나온 건 갈색 피부와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흑요정이었다. 김창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정보는 가져왔겠지, 에리엇?”
“아, 물론이지. 준비는 됐나?”
김창이 씩 웃었다.
“언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