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05화 (105/200)

105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기야 그 실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가. 하지만 이번 상대가 만만치 않을 거야.”

에리엇이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여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약간 떨어져서 대기 중이었다.

원탁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흑요정들을 보고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요정 자체도 보기 드문 종족인데 흑요정은 그보다 숫자가 더 적어서 웬만해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흑요정을 처음 보는 건 한석구도 마찬가지라서 그가 김창에게 물었다.

“저 친구가 그 흑요정이야?”

“그래. 이름은 에리엇이라고 하는데 테네벨레의 기수야.”

“허, 그러면 티샬레와 동급의 요정이라는 거지? 제법 강해 보이긴 하네.”

에리엇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곧 웃음과 함께 말했다.

“칭찬 고맙군. 나는 에리엇이라고 한다. 방금 들은 대로 테네벨레의 기수지. 그쪽은?”

요정의 길쭉한 귀는 장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었는데 그걸 전부 들은 걸 보고서 한석구는 왠지 민망해졌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뒤에서 수군거린 셈이 됐으니까. 한석구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나는 한석구요. 원탁의 의장이지. 그러니까 여기 대장.”

“아, 그쪽이 원탁의 주인인가? 그 괴물 같은, 실례, 욕은 아니었어. 어쨌건 그 대단한 이방인 무리를 이끄는 자란 말이지? 이거 거물을 만났군.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이 상당해. 하긴 이 정도는 돼야 원탁의 대장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 ”

에리엇은 한석구가 원탁 안에서 제일 강하기 때문에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한석구가 바로 정정했다.

“혹시나 내가 제일 강해서 원탁의 대장 자리를 맡았다고 생각하는 거면 그건 착각이야. 원탁에는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많아. 당장 여기 김창만 해도 나보다 강하고.”

에리엇의 얼굴이 당황으로 잠깐 굳었다.

“···그쪽보다 강한 사람들이 더 있다고? 난 그쪽이 대륙에서 제일 강한 마법사라고 주장해도 솔직히 믿어줄 의향이 있는데.”

“내가 강한 건 맞지만 제일 강한 건 아니지. 그 왜 플레이어 외에도 강한 사람들 많잖아. 저번에 보니까 하이나인가? 분하지만 걔는 나보다 훨씬 더 강하던데.”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에리엇이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그녀는 승천할 자니까. 애초에 승천의 자격을 얻지 못한 우리와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지. 내가 말한 건 승천할 자를 제외한 마법사 중에서 제일 강해 보인다는 거였어.”

에리엇은 애초부터 승천할 자를 비교 대상에 놓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격이 다르니까.

세상에 아마추어와 프로를 비교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건 불필요한 비교였다.

한석구는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을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붙어보니까 정말 강하긴 하더라. 창이 없었으면 우리 싹 다 죽었을걸.”

“음? 한 번 붙어봤다고? 승천할 자 하이나랑 말인가?”

“그래. 우리가 걔 죽였고 아산트 섬도 먹었는데, 왜?”

“하이나가 죽어? 그럴 리가······. 그녀는 승천할 자야.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하이나의 본거지는 아산트 섬이고 거긴 마법사 외엔 환영하지 않는 폐쇄적인 환경 탓에 그녀의 죽음이 섬 바깥으로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석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창이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 칼 맞고 안 죽는 놈은 없어. 창이가 칼 찌르니까 죽더라.”

에리엇은 멍하니 있다가 김창을 쳐다봤다.

“하이나를 죽였다면······.”

에리엇은 김창이 승천할 자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김창의 몸 안에서 넘실대는 엄청난 양의 신성을 보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 싸워야 할 적인 요안니스 역시 승천할 자라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그에 대해서 알려진 정보는 극히 드물다. 하이나가 아산트 섬의 주인인 것처럼 승천할 자들은 각자의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법이지만 요안니스는 달라. 그 음습한 놈은 암흑 의회라 불리는 조직 하나만을 휘하에 두고 있고 항상 어둠 뒤에 숨어서 암약하지. 그래서 양지에서 당당하게 활동하는 다른 승천할 자들과 달리 그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아. 요안니스 역시 하이나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정체를 드러내는 걸 꺼린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얼마나 뒤틀렸는지······.”

“그만. 누가 너보고 구구절절 설명하래? 걔가 남들한테 얼굴 드러내는 거 싫어하는 대인기피증 환자든 뭐든 상관없어. 그냥 걔 어딨는지만 말하라고.”

“······우린 엄밀히 말해서 요안니스를 찾은 게 아니라 그 부하인 암흑 의회가 있는 곳을 찾았다. 암흑 의회는 마치 쥐새끼처럼 여러 도시에 은거지를 마련해두고 주기적으로 모임 장소를 바꾸더군. 우리의 조사에 따르면 이번 모임 장소는 겔타르라는 곳이다.”

“내가 요안니스 찾아오라고 했지, 언제 그 따까리 놈들 찾아오라고 했어?”

김창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에리엇은 긴장했다. 그는 저 칼잡이가 하이나까지 죽인 승천할 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요정 기수가 잘났어도 승천할 자를 상대론 아무것도 아닌 법이다. 에리엇이 변명하듯 말했다.

“암흑 의회는 요안니스의 수족이야.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백 년도 넘게 살아오고 있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요안니스가 그들에게 힘을 나누어 주고 수명을 연장했기 때문이야. 그냥 쓰고 버릴 말에 불과했다면 요안니스가 그 정도로 정성을 쏟았겠나? 그럴 리가 없지. 암흑 의회를 들쑤시면 요안니스는 반드시 나타나.”

승천할 자 정도 되면 남 수명도 늘려줄 수 있는 건가? 어쩌면 반쯤 언데드로 만들어서 강제로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럼 결국 겔타르로 가서 암흑 의회를 찾아내는 게 먼저라는 소리군.”

“암흑 의회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이걸 가져가.”

에리엇이 건넨 건 개눈깔의 안대였다.

“이건 왜?”

“요안니스의 마력을 토대로 추적 마법을 걸어놨어. 그게 있으면 암흑 의회가 어디 숨었든 바로 찾을 수 있을 거다. 지금은 거리가 멀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만 겔타르로 가면 암흑 의회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갈 거야.”

“호오.”

길찾기 시스템인가.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눈깔의 안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면 용건은 다 끝난 건가?”

“음? 아, 그렇지······. 그런데 지금 가려고?”

김창이 자기 몸을 한 번 살펴봤다. 아까 막 대악마 헤인리히스와 격렬한 전투를 끝내고 온 참이지만 새롭게 신성을 얻은 탓에 몸에는 힘이 넘쳤다.

상처도 벌써 다 아물었으니 이대로 또 싸움을 하더라도 문제 될 건 없었다. 혹시나 다른 놈들이 먹잇감 채가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왜, 그러면 안 되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큰 싸움을 앞두고 뭔가 준비라도 해서 가야 하지 않나······.”

“준비하고 간다고 안 죽는 놈이 죽는 거 아니고 준비 안 하고 간다고 죽을 놈이 안 죽는 거 아니야. 그냥 가면 돼.”

저건 승천할 자로서의 자신감인가 아니면 그냥 만용인가? 에리엇은 어느 쪽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에리엇, 이제 너희 가문으로 돌아갈 거냐?”

“아마도······.”

“그러면 가는 길에 딜루키둠에 들려서 말 좀 전해.”

“무슨 말?”

“대악마 헤인리히스 죽였다고. 나중에 다른 놈들도 죽일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

“아니, 잠깐? 뭘 또 죽였다고? 저번에 아라비타스 님이 의뢰 맡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걸 벌써?”

얜 뭐 도살자라도 되는 건가? 지금껏 존재했던 승천할 자 중에서 이토록 왕성하게 뭔가를 죽이고 다니는 놈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에리엇이 아연한 사이에 김창이 한석구에게 말했다.

“겔타르로 가는 차원문 열 수 있나?”

“정말 바로 가려고? 뭐, 네가 말린다고 들을 놈도 아니니······. 잠깐만.”

한석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원문을 열었다. 김창은 간단히 손만 한 번 흔들더니 그대로 차원문을 통과해서 떠났다.

뒤에서 당황한 에리엇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무슨 피에 미친 살인광도 아니고 한시도 안 쉬고 뭐 죽이러 다니네······.”

다 들려, 새끼야. 차원문을 통과한 김창은 픽 웃더니 주머니에서 개눈깔의 안대를 꺼냈다.

에리엇의 말대로 그건 겔타르에 도착하자 혼자서 공중에 뜨더니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김창은 그 뒤를 따라갔다.

“여기가 겔타르인가? 생각보다 멀쩡한 곳이군.”

지난번에 매장결사가 숨어 있던 호엔은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겔타르는 달랐다. 여긴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도시였고 암흑 의회 같은 위험한 놈들이 숨어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기야 그 주인인 요안니스부터가 어둠 속에 숨어 사는 겁쟁이니 그 부하들이라고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진 않을 터다.

“이쪽으로 가라고?”

혼자서 하늘을 날던 안대가 멈춘 곳은 어느 술집 앞이었다. 거기엔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술이나 한 잔 하려고 이곳에 찾아온 일반적인 손님이었다.

김창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문을 열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옵쇼!”

가게 주인이 커다란 목소리로 김창을 반겼다. 문득 안대를 쳐다보니 그건 여전히 하늘에 뜬 채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곧 가게 주인을 가리켰다.

“음? 그건 뭐요? 애완 동물 같은 건가?”

김창은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가게 주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주문을 뭘로 하겠소? 우리 집은 술도 맛있지만 안주도 기가 막힌데.”

안대는 이제 가게 주인의 뒤쪽의 술 진열대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잠시 뒤에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 여기라는 말이군. 김창이 바 뒤쪽으로 돌아가더니 술 진열대를 마주 보고 섰다. 뜬금없는 행동에 가게 주인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김창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다짜고짜 휘두른 칼에 술 진열대는 물론이고 그 위에 있던 술까지 전부 반 토막이 났다. 그걸 본 술집 주인이 경악한 듯 입을 쩍 벌리는 가운데 김창이 혼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맞군.”

갈라진 술 진열대 너머로 검은색 통로가 보였다. 아마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일 것이다.

“아니, 씨발! 이게 뭐야! 내 가게에 뭐 이딴 게 있어?”

뭐야, 가게 주인은 암흑 의회 소속이 아니었나? 그럼 이 새끼들은 남의 가게에 자기 마음대로 은거지를 만들었단 말인가?

김창이 주머니를 뒤적여 금화 한 줌을 가게 주인의 손에 쥐여줬다. 그걸 본 가게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이, 이건······.”

“왜, 너무 적나?”

“아니, 너무 많은데······.”

“정직한 가게 주인이로구나. 하지만 돈 더 줄 생각은 없으니까 꺼져.”

다짜고짜 칼 들고 술 진열대 잘라버린 놈이 꺼지라는데 버티고 있을 놈은 없다. 가게 주인이 얼른 도망치자 김창은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하여튼 쥐새끼도 아니고 뭐 이딴 걸······.”

통로 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김창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아래로,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 여긴 지하 2층쯤 되지 않을까? 김창이 그리 생각하며 걷던 중에 저 멀리 주홍색 불빛을 발견했다.

“도착했군.”

김창은 뚜벅뚜벅 걸어서 웬 방으로 들어갔다. 승천할 자의 부하들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겨우 초 몇 개 켜놓고 자기들끼리 머리 맞대고 있는 열 명의 사람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뭔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도 기척을 숨기고 다가온 김창이 다가온 것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왔는데 본 척은 해야지.

김창이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머리를 잡고는 그대로 테이블에 처박았다.

쾅!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양옆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그 목이 돌아갔다.

순식간에 세 명을 제압한 김창을 보고서 맞은편의 사람 세 명이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그러나 갑자기 날아온 칼이 여섯 개의 손을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빙글빙글 돌던 손들이 툭 하고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걸 본 사람들은 잠깐 침묵했고 곧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끄아악!”

“침입자인가? 하지만 여긴 어떻게 알고······.”

“누구냐, 너는? 누군데 감히 이곳에······.”

여섯 명을 무력화하고 남은 것은 넷.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안심해라. 너희 죽이러 온 건 아니니까. 너희가 내 요구에 잘 협조한다면 반병신이 되는 선에서 끝날 수 있다.”

대체 저 말을 듣고 뭘 안심하라는 거지? 남은 네 명이 침을 꿀꺽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