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요구에 잘 협조한다면 반병신이 되는 선에서 끝날 수 있다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소리를 내며 말했다.
“뭘 원하는진 몰라도 그딴 식으로 말하는데 우리가 협조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협조해야 할걸. 죽는 것보단 반병신이 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김창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하늘을 날던 칼이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손바닥에 착 달라붙은 칼날에서 잿빛이 반짝였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오러?”
“미리 말하지. 내가 지금 여기서 너희 싹 다 죽이는데 일 분도 안 걸린다. 그러니까 괜한 짓거리 할 생각하지 말고 목숨 챙겨. 이건 내가 너희한테 하는 충고야.”
그건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뜬금없이 나타난 침입자는 위험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열 명 모두가 살아 있었다면 한 번 붙어볼 만도 하겠지만 지금은 기습에 당해서 숫자가 절반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 남은 네 명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지?”
“일단 하나 묻지. 너희가 그 암흑 의회인가 하는 놈들이 맞나?”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 칼부터 휘둘렀나? 만약 우리가 암흑 의회가 아니었다면 무고한 사람을 공격한 셈이 되는데?”
“뭔 헛소리야. 이런 지하에 모여서 머리 맞대고 수군대는 놈들이 무고한 사람일 리가 없잖아. 아까 보니까 너흰 이 가게 주인한테 말도 안 하고 비밀 통로를 만들어뒀던데.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럼 너희는 가게 주인 몰래 여기로 내려오는 거냐? 그거 좀 궁상스러운 짓거리인 것 같은데.”
“···시끄러워. 내가 그런 것까지 대답해야 하나?”
“안 해도 돼. 그런데 내가 처음에 물은 건 대답해야지. 너희 암흑 의회 맞지? 요안니스 따까리들.”
남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김창의 눈치를 봤다. 그들은 아직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그 행동 자체가 물음에 대한 답이 되었다.
김창이 픽 웃으며 말했다.
“맞는 모양이군.”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왜 찾아온 거냐? 수십 년 전이라면 몰라도 요 근래에는 좀 조용히 지냈다고 생각하는데.”
김창이 보기에 이들은 삼십 대 정도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십 년 전부터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정말 요안니스의 힘 덕분에 긴 수명을 얻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칼 찌르면 죽는 건 똑같을 터다.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내가 왜 너희 찾아왔겠냐. 너희 대장 만나려고 온 거지.”
“우리 대장? 요안니스 말인가?”
요안니스? 김창은 제 주인에게 존칭을 붙이지 않는 남자를 보고서 미간을 좁혔다.
원래 강대한 존재의 하수인들은 제 주인을 몹시 두려워하는 법이다. 대악마의 이름을 막 부르는 하수인이 있던가? 아니면 용의 이름을 막 부르는 하수인은?
아무리 암흑 의회가 요안니스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라고 해도 자기 주인의 이름을 존칭도 없이 부르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요안니스가 다른 세력은 전혀 거느리지 않고 오직 암흑 의회 하나만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들의 수명까지 늘려줬다는 걸 생각하면 둘의 사이가 생각 이상으로 돈독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름을 막 불러도 괜찮은 것이라고 하면 영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닐 테니까.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김창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친구. 내가 그 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집 주소를 안 가르쳐주더라고. 그래서 물어물어 여기까지 왔다. 너희라면 요안니스가 어디 사는지 알겠지?”
“잠깐만, 요안니스랑 만나기로 했다고? 그럼 설마······.”
남자가 혼자 고개를 흔들다가 말했다.
“요안니스는 만나서 뭘 하려고?”
“뭘 하겠나?”
김창이 칼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때렸다. 쨍한 금속음이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모두가 몸을 움찔했다.
“우리가 만나서 뭘 하겠어?”
“······정말 싸우려고 온 거냐? 하, 이거 제정신이 아닌 놈이군. 넌 요안니스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지?”
“왜, 내가 겁도 없이 승천할 자에게 싸움을 거는 미친놈처럼 보이나? 그런 거라면 별로 걱정할 거 없어. 나도 그 녀석과 똑같이 승천할 자이니 서로 격은 맞는 셈이니까.”
“승천할 자?”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럼 정말로······.”
“못 믿겠나? 하기야 내가 뭐 이마에다 승천할 자라고 딱지라도 하나 붙이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내가 승천할 자든 아니든 너흰 나랑 싸울 거잖아.”
네 명의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그들이 김창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왜 너랑 싸우리라 생각하지?”
“그딴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는 걸 보면 뻔하지. 너희가 정말 자기 목숨이 중요했다면, 그래서 나에게 협조할 생각이었다면 그딴 말을 하면서 시간이나 끌고 있진 않겠지. 바로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하고 나한테 살려달라고 했어야 맞아. 그런데 안 그러잖아. 그러면 뭐겠어? 나랑 한 번 붙어보겠다는 거잖아.”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그들이 은근히 마력을 모으고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먼저 치지 않은 건 저들이 제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웬 미친놈이 칼 하나 들고 찾아와서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그러니 제발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요안니스는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요안니스의 목을 따면 된다. 그러면 다 끝이다.
“너희 주인한테 구조 요청은 다 했나? 빨리 오라고 해야 할 거야. 그래야 한두 명이라도 목숨을 건지지.”
“이 건방진 놈이!”
남자 하나가 참지 못하고 마법을 날렸다. 방 안은 그리 좁지 않았지만 아주 넓은 것도 아니었다.
칼 든 전사가 마법을 상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그냥 피하는 것이다. 항마력을 가진 무기를 쓰는 게 아닌 이상 날붙이로는 마법을 상대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니 이런 방 안 같은 공간에서 마법사와 싸우는 건 전사에게 제법 불리한 일이었다.
공간이 좁으니 마법사 역시 도망칠 곳이 없어서 불리한 게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선공권이 마법사에게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법사가 더 유리한 게 맞았다.
게다가 이쪽은 마법사가 무려 넷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면서 싸운다면 오러를 다루는 칼잡이라고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물론 화염구를 그냥 칼로 잘라버리는 김창을 보고 그게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됐지만.
“막아! 접근을 허용하면 다 죽는 거야!”
마법사 하나가 크게 외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지하가 무너지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강력한 마법을 휘두르며 김창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그들은 암흑 의회의 일원이자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로서 승천할 자만큼은 아니어도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김창은 그들 한 명이 마탑주 로에라와 비슷한 실력이라는 걸 금세 알아봤다. 여기 들어오면서 여섯 명을 기습으로 쓰러트리고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만한 실력자들을 열 명이나 한 번에 상대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귀찮은 일일 테니까.
“보호막 깨지면 바로 다시 만들어! 너희 둘은 접근 못하게 막고! 공격은 내가 한다!”
마법사 하나가 나름 지휘를 하고 있긴 한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보호막을 만들면 뭐 하나? 칼질 한 번에 두세 개씩 뭉텅이로 썰려 나가는데.
공격 마법은 날려서 또 뭘 하고? 아무리 강력한 마법도 맞아야 의미가 있다. 열심히 마법을 날려봤자 칼에 잘리거나 허공을 가를 뿐인데 그게 대체 뭔 의미가 있나?
일단 접근이라도 막아보려고 해보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김창이 워낙 빨라서 속박 마법은 항상 애꿎은 땅바닥만 붙잡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제기랄! 다들 이대로 뒈질 셈이냐! 더 열심히 싸워!”
남자가 악에 받쳐 소리치자 다른 마법사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우리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지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손을 멈추면 곧바로 죽을 테니까.
물론 열심히 마법을 날린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크악!”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정면에서 달려오는 김창한테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설마 뒤쪽에서 칼이 날아와 목을 찌르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김창이 허리춤에 칼을 두 자루나 차고 있는 걸 봤을 때부터 이런 공격에 대비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서 허를 찔리고 말았다.
“저 칼 막아!”
뒤쪽으로 돌아와 마구잡이로 날뛰던 칼을 잡기 위해 속박 마법을 쓰던 마법사가 마법의 방향을 틀었다.
그 탓에 김창에 대한 견제가 약해졌고 매섭게 질주하는 칼날이 보호막과 함께 마법사 하나의 심장을 찔렀다.
“컥!”
순식간에 둘이 죽고 나니 다른 마법사 하나의 눈에 동요의 빛이 깃들었다. 이거 이길 수 있나? 이기는 건 고사하고 목숨이라도 건질 수······.
“케흑!”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시야가 빠르게 회전했다. 목에서 잘린 머리가 혼자 공중에서 돌면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잃은 몸은 혼자 멍청하게 가만히 있다가 한 박자 느리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김창이 마지막 마법사와의 거리를 좁혔다.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날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칼날에 잘린 손 두 개가 손목에서 덜렁거렸다. 저 칼잡이의 실력을 생각하면 실수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일부러 손목을 자르다 만 것이다. 그래서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지. 너희 죽이러 온 거 아니라고. 내 요구에 잘 협조한다면 반병신을 만드는 선에서 끝낼 수 있다고.”
김창의 시선은 서늘했다. 마법사는 그 시선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네 주인에게 연락해. 빨리 오라고. 너희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으니 얼른 와서 도와달라고 말해. 그러면 넌 살 수 있다. 이건 기회야.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마법사는 입가를 움찔거렸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 한다고 생각한 김창이 칼날을 약간 아래로 내릴 때였다.
콰직! 덜렁거리던 두 손이 폭발하며 거기서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저 미친놈, 기어코 끝장을 보겠다 이거지.
김창은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서서 칼을 휘둘렀을 뿐이다.
빛이 갈라지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길게 이어진 상처에서 피가 물 새듯 흘렀다.
그러나 그 상태로도 마법사는 아직 살아있었다. 김창이 죽는 걸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케흑······.”
“네 주인을 불러라. 요안니스에게 구해달라고 해.”
“크흐흐······.”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김창은 무심한 얼굴 그대로 칼을 휘둘러 그의 어깨를 찔렀다.
그리고 반 바퀴 돌려 근육과 핏줄을 전부 끊어버렸다.
“불러라. 요안니스를 불러.”
“멍청한 새끼······. 너는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어······.”
김창은 대답하지 않고 칼을 뽑아 다시 한 번 찔렀다. 마법사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말했지, 너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고. 날 아무리 찔러도 결과는 똑같아······.”
대단한 충성심이군. 김창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칼을 뽑았다. 그리고 이번엔 어디를 찌를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새끼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 있지 않나? 그 왜 저번에 경박하게 깝죽거리던 목소리······.
“왜 부르지 않는 거지? 네 주인이 내 손에 죽을까 봐 겁이 나서 그런 거냐? 아니면······.”
“부를 수 없으니까. 요안니스를 부를 수 없으니까······.”
마법사가 쿨럭쿨럭 피를 토하더니 억지로 웃었다.
“멍청한 새끼, 있지도 않은 요안니스를 대체 어떻게 부르라는 거야. 그건 다 우리가 만들어낸 거짓말에 불과한데······.”
이건 또 뭔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