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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구의 대답은 모호했지만 사실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정말 왕이 되겠다고 하더라도 그게 나랑 뭔 상관이란 말인가?
현대 사회에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다수의 지지를 얻은 사람이 국가 원수가 되지만 이 세상에선 아니다.
여기가 꼭 게임 속 세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역사적으로 강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한석구가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그는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강한 초인이요, 또한 자신과 같은 초인을 여러 명 거느리고 있는 사람인데.
그러니 그가 정말 왕이 된다고 하면 그건 강자의 논리에 따라 몹시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자. 정복자가 기다리겠다.”
김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한석구 역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은 전해줬나?”
“일단 사람 시켜서 보낼 수 있는 만큼 보냈는데 난민들 숫자가 많아서 얼마 안 가서 다 떨어질걸. 그래서 민우는 애들 몇 명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추가로 식량 구매할 거야.”
“그거 돈 많이 들 것 같은데 괜찮냐?”
한석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을 리가? 내가 전쟁이라는 걸 처음 해보는데 이게 왜 돈 먹는 괴물인지 알겠다. 물론 원탁은 대규모로 병력 운용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만큼 식량 구매할 이유가 없긴 한데, 원래 병사 수천 명씩 부리면 돈이 이 정도로 빠져나간다는 거 아니야? 아산트 섬이랑 마탑에서 나오는 돈이 있으니까 버텼지, 칼라드 하나만이었으면 오히려 여기 사람들이 난민 될 뻔했어.”
김창이 알기로 원탁은 이미 호엔의 재건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것만 해도 원탁 재정에 제법 부담이 될 텐데, 전쟁이 끝나고 나면 주인 잃은 도시들의 전후 복구비는 어디서 조달할 생각인가?
그에 대한 의문을 한석구에게 말하자 그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는데, 방법이 하나 있긴 해. 그건 일단 전쟁 끝나고 나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한석구가 방법이 있다고 했으니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정 안 되면 다른 도시에서 돈이라도 뜯어오지 않겠나?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원문 쪽으로 걸었다. 그대로 차원문을 통과하니 곧장 호엔이었다.
전에 왔을 때 호엔은 상당히 스산한 동네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나 옷 입은 것만 봐도 전보다 생활이 훨씬 더 나아졌다는 게 훤히 보였다.
당장 난민들이 몰려들고 어쩌면 이 도시도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 한 점 없는 것은 신기하다 못해 의아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알만했다.
“너희 왔구나. 어제도 말했지만 도와줘서 고맙다.”
그건 정복자 덕분이다. 천상에서 내려보낸 신의 대전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강대한 신성력을 가진 성기사는 요즘 이 땅의 구세주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가진 신성력이 신에 대한 믿음이나 고결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치세를 보여주고 있는 정복자를 존경하다 못해 숭배하고 있다.
그들은 역병 군주가 아무리 강해도 정복자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이번 사태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기사가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그건 어이가 없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믿음이지만 아주 틀린 믿음은 아니다. 정복자는 결국 이번 일을 해결하긴 할 테니까.
그게 자기 혼자만의 힘은 아닐 테지만 뭐 어떤가? 사람들은 원탁의 도움 역시 정복자의 인망 덕분이라고 생각할 텐데.
“상황은 어때? 난민들은?”
한석구가 묻자 정복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이 갈수록 난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어. 전부 성안에 수용할 수 없어서 일단 성벽 아래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긴 했는데, 그것도 이젠 슬슬 무리야. 아직은 역병 군주의 군세가 호엔까지 오진 않았는데 이 상태로 있으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싹 다 죽어.”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로서도 기꺼운 일이지. 사람들 다 죽으면 그만큼 적 늘어나는데, 그러면 일도 더 많이 해야 할 테니까.”
정복자가 뺨을 움찔거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건 그는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정찰병의 정보에 의하면 역병 군주의 군세는 호엔에서 이틀 정도 떨어진 곳까지 왔다고 하더군. 그러니 우리가 거기까지 나가서 싸워야 해.”
역병 군주의 군세는 강대하다. 그에 비해 원탁의 병력은 한 줌에 불과하다. 그만한 숫자 차이를 성벽도 끼지 않고서 맞서 싸우겠다는 건 자살 행위에 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는.
“그래, 그러지 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여기에 애들 몇 명 남겨두고 가자. 성 지킬 사람도 있긴 해야 하니까.”
한석구는 별 고민도 없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압도적인 힘이 숫자를 무시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 갈까?”
한석구가 원탁의 사람들을 이끌고 성을 나섰다. 호엔의 사람들이 성벽 위에서 정복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에 성벽 아래에서 지친 얼굴로 쉬고 있던 난민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정복자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가진 호엔 사람들과 다르게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역병 군주의 무서움을 몸소 경험한 탓에 한 줌에 불과한 원탁의 병력이 그리 미덥지 않았다.
게다가 원탁 사람들은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저들끼리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걷고 있으니 더욱 믿음이 가지 않았다.
저들이 과연 역병 군주의 군세를 막아줄 수 있을까? 한석구는 난민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 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인 법이다.
“전장까진 마차 타고 간다! 다들 마차 탑승해!”
정복자는 빠른 이동을 위해 미리 마차를 대기시켜뒀다. 물론 호엔 사정상 농부들이 쓰는 짐마차였지만 그래도 전장까지 걷지 않고 체력을 온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원탁의 병력을 실은 마차 무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뒤에서 기대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들을 배웅했다.
“이대로 하루는 꼬박 가야겠군. 저쪽에서도 하루 동안 이동할 테니 그럼 중간 지점에서 만날 테니까.”
한석구와 같은 마차에 탄 김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는 한석구 외에도 산자이와 하오성도 타고 있었는데 나름 랭커라고 가장 큰 마차에 태운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다른 마차와 그리 차이가 나진 않았지만.
“석구 아저씨, 우리 다 같이 싸우러 나가는 거 이번이 처음 아니야?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산자이가 말하자 한석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지. 지금까진 우리가 단체로 몰려가서 싸워야 할 만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자주 있을 거다. 우리 세력이 커지면 분명 견제하러 들 놈이 생길 테니까.”
“그래봤자 죄 좆밥들 아닌가? 걔네가 아무리 뭉쳐서 덤벼도 우리한텐 안 될 것 같은데.”
한석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좀 더 말이 이어질 거로 생각했던 산자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김창은 혼자서 승천할 자들에 대해서 떠올렸다. 한석구의 말대로 모두가 플레이어보다 약한 건 아니다.
꼭 승천할 자가 아니더라도 플레이어를 죽일 만한 강자들은 많다. 가령 대악마라던가 암흑 의회라던가.
그런 위험한 놈들을 자신이 죄 죽이고 다니니 약해 보이는 거지, 그들은 원래 이 세상을 위협할 만한 거대한 악이다.
“정지! 정지!”
정복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선두에서 마차를 몰고 있었는데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가 정지 신호를 말하자 줄지어 따라오던 다른 마차들도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같은 마차에 타고 있던 한석구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소리쳤다.
“왜 그래? 뭔 일 있어? 역병 군주의 군세가 있는 곳까진 아직 멀었잖아?”
“원래라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이 새끼들 벌써 반나절 거리까지 진군했어.”
한석구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한 그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마치 망원경을 보는 것처럼 저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과연 정복자의 말대로 괴물로 이루어진 군세가 보였다.
“저거······ 선발대 같은데? 본대가 움직이면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호엔처럼 작은 도시는 선발대 먼저 보내서 점령하려는······.”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군세의 본대라고 보기엔 숫자가 적었다. 하지만 아무리 선발대라고 해도 그 숫자가 어마어마해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뭐 잘됐네. 적을 각개격파 할 수 있다면 우리로선 좋은 일이니까.”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숫자는 오십 명이었는데 원탁의 전부를 데려온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추려서 데려왔다.
그러니 여기 있는 오십 명은 원탁의 핵심 인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여러 괴물과 싸우며 자신의 강함에 강한 확신을 가진 자들.
원래 세상에선 벌레 말곤 뭘 죽여본 적도 없는 사람들일 테지만 몇 년의 시간은 그들을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한석구는 말없이 자기 장비를 점검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작게 웃었다.
“이번 전투는 랭커들은 빠진다.”
“우린 빠진다고? 아니, 그냥 네가 마법 한 번 날리면 싹 정리하고 시작하는 건데 굳이 왜······.”
하오성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한석구의 눈빛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
“그거 재밌겠네! 내가 공격 신호 내려도 되지?”
하오성과 달리 산자이는 씩 웃었다. 분명 종족이 요정일 텐데 그 웃음이 고귀해 보이기는커녕 사악해 보여서 김창이 허 소리를 냈다.
“석구야, 굳이 왜 쟤네한테 맡기는 거야? 오성이 말대로 우리가 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는데.”
정복자의 물음에 한석구가 대답했다.
“우리 애들 실력도 좀 보려고.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가 너무 세서 애들이 약해 보이는 거지, 쟤네도 바깥에 나가면 괴물 소리 듣고 다녀.”
“아니, 그거야 그럴 테지만······.”
정복자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무는 사이에 산자이가 무리의 선두에 섰다. 그녀가 씩 웃으며 소리쳤다.
“혹시나 무서워서 도망갈 사람은 없지? 그런 사람 있으면 빨리 도망가시고. 없다고? 그럼 됐어. 자, 공격!”
산자이가 머리 위로 손을 들었다가 휙 하고 휘두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렸다.
그건 확실히 한석구의 것보다 훨씬 약했다.
어디까지나 한석구의 마법보다는.
“키에엑!”
“크아악!”
적들을 보고 흥분해서 달려오던 괴물들이 뭉텅이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열 명의 마법사가 번갈아 가며 마법을 날리고 있으니 잠깐의 틈도 없이 쉴 새 없이 공격이 이어지는 셈이었다.
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긴 하지만 저런 식으로라면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한참은 걸릴 것이다.
“공격! 다들 공격!”
대기하고 있던 원탁의 전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하고 거칠게 대지를 박차는 그들의 모습은 성난 황소와 같았다.
말을 타고 있지 않음에도 그들의 돌격은 기마병의 충돌과 비슷할 정도의 위력을 냈다.
이미 마법사들의 공격에 대열이 흐트러졌던 적들의 2열 역시 전사들의 돌격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키에엑!”
괴물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전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힘에선 밀릴지언정 숫자에선 이쪽이 유리하니 그걸로 반격하려는 모양이었다.
“큭!”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었더라도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다. 전열에서 맞서 싸우던 전사들의 몸에 자잘한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복자가 내가 나서야 하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빛이여!”
“축복을!”
후열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전열의 전사들의 몸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들은 언제 다쳤냐는 듯 다시 적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키에엑······.”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괴물들은 원탁의 전열을 뚫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후열의 마법사들이 연신 마법을 날려대고 있으니 이길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전사 하나를 겨우 쓰러트려도 사제들의 치유 덕분에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싸우기까지 했다.
이건 이길 수 없다. 지성이 없는 괴물들이라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고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었다.
싸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석구가 장담했던 대로.
“전쟁한다고 매번 미사일 쏠 수는 없지. 보병 보내도 충분한데 굳이 미사일은 왜 쏴?”
한석구가 씩 웃는 걸 보며 정복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