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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12화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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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따지면 보병 보낸 것도 아니고 전차 보내서 싹 쓸어버린 건데······.’

보병 오십 명으로는 적의 선발대를 분쇄할 수 없지만 전차라면 가능하다. 정복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수고했어! 역시 잘 싸우더라. 이대로만 하면 역병 군주의 본대와 싸우더라도 큰 위험은 없을 것 같네. 혹시 어디 다친 사람 있나? 있으면 사제한테 힐 좀 받고. 이상 없으면 다들 마차 탑승!”

한석구의 외침에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모두가 마차에 탑승하자 다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격렬한 전투가 한 번 있었지만 사람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지루한 쫄 구간을 통과할 때 잡담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있으면 역병 군주의 본대와 맞붙게 될 텐데 누구도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건 원탁의 강함을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게임이랑 현실을 혼동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양쪽 다일 수도 있다. 선두에서 마차를 몰고 있던 정복자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역병 군주의 선발대를 사상자 없이 무찌른 건 고무적인 일이지만 본대를 상대로도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탁의 랭커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곳에서 죽기엔 너무 강하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살 수 있으리라 장담하긴 어렵다.

원래 전쟁이 그런 법이다. 아무리 잘 싸우는 장수라도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을 수 있는 곳이 전장이니까.

그러니 이 전쟁에서 누군가는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럼 한석구는 그 사실에 어찌 반응할 것인가? 자신의 사정 때문에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전장까지 끌고 온 자신은?

정복자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는 오늘 인간 정복자가 아니라 성기사 정복자여야만 했다.

“정지! 여기서 야영한다!”

마차의 행렬은 쉬지 않고 달렸고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원탁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초인이니 밤이 되든 말든 강행군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적진을 점령하는 게 아니라 호엔으로 오는 모든 병력을 분쇄하는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역병 군주의 군세가 있는 곳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그냥 길목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면 저쪽에서 다가올 테니까.

“뒤쪽 마차에 식량 가져온 거 있어. 같은 마차 탄 사람끼리 불 피우고 음식 알아서 해 먹어!”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땔감을 모아오면 마법사들이 불을 붙여줬다. 그리고 땅속의 수맥을 찾아 물웅덩이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식량을 꺼내 손질하고 모닥불 위에 솥을 걸어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만 보면 어디 놀러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라 정복자가 허 하고 웃었다.

“긴장감이 없군, 다들 긴장감이 없어······.”

원래 전쟁에서 군기가 느슨한 부대는 쉽사리 전멸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원탁의 부대는 당장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검으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 저 전사 하나가 일개 보병이 아니라 전차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긴 했다.

“복자야! 음식 다 됐어!”

정복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오성이 국자를 들고 이쪽을 향해 흔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식사 당번인 듯했다.

“왜 너 혼자 음식 만들어?”

가까이 다가가니 하오성이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누가 해? 석구가? 아니면 김창 그놈이? 산자이는 뭐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정복자가 하오성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이 녀석도 어디 나가면 무시 당하고 살 놈은 아닌데 하필이면 여기 껴서······.

“식겠다. 일단 먹자.”

하오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튜를 그릇에 담아 건넸다. 먹어 보니 그리 나쁜 맛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으니 어느새 나머지 세 사람도 다가와서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도 다 끝났으니 정리 하고 쉬자. 그리고 오성이? 너는 잠깐 정찰 좀 다녀와.”

한석구의 명령에 하오성이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다.

“나만?”

“여기서 발 제일 빠른 게 너잖아. 그리고 원래 이런 건 도적이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복자가 정찰 나가고 네가 내일 전열에 서서 탱킹 할래? 나는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어느 게임이든 다 그런 법이지만, 도적은 딜은 세도 몸이 약한 직업이라는 인상이 있다. 물론 하오성 정도 되는 레벨이라면 어지간한 적의 공격은 웃으면서 맞아 줄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기사만큼 몸이 단단하지는 않다.

게임 속에서 직업이 나뉘어 있는 건 서로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하오성도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올게.”

하오성이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행동이 어찌나 은밀한지 뭔가 마법적인 은신을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

그가 떠나고 나서 남은 사람들은 주변을 정리하며 취침 준비를 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불침번을 서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에는 마법사들이 작은 소환수를 불러냈다.

그건 전투 능력은 전혀 없지만 대신 적이 접근하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주변에 알린다고 했다.

플레이어 마법사 열 명과 한석구의 것까지 총 열 개의 소환수가 야영지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불침번도 안 서도 된다니, 마법이란 참 편리하군. 김창이 감탄하는 가운데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김창은 슬쩍 소환수를 봤지만 작은 새를 닮은 그건 조용히 하늘을 날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제대로 작동하는 거 맞나?

그런 의구심을 느끼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하오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소환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저거 누가 다가오면 소리를 지른다며? 그런데 얘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안 내던데 믿어도 되는 거냐?”

김창이 묻자 한석구가 대답했다.

“오성이 정도의 실력자가 작정하고 숨으면 마법으로도 못 찾아. 그러니 소환수도 당연히 반응 안 하는 거고. 그리고 저거 애초에 기초적인 마법이라 엄청 정확하지도 않아. 은신술 조금만 익혀도 반응 안 할걸.”

“뭐? 그러면 저거 소환해봤자 아무 소용 없잖아.”

“상대가 강하면 별 소용 없는데, 우리 적은 지성이 없는 괴물이잖아? 걔네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성능이 나쁘진 않아. 그러니까 그냥 자면 돼.”

하기야 그 멍청한 괴물 놈들은 조용히 다가올 줄도 모르니 저런 게 없더라도 금방 접근을 눈치챌 것 같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석구가 하오성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정찰하고 오니 어떻든?”

“저쪽도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전진했어. 내 생각에 아마 점심 때쯤이면 우리랑 충돌할 것 같은데.”

“적 숫자는?”

“밤중이라 정확히 셀 수는 없었지만 대략 수천 정도? 생각보다 숫자가 적던데 내 생각엔 호엔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도시에도 선발대 보내서 공격 중인 것 같아. 이거 가만히 두면 이 지역 전체가 아주 괴물들로만 득실거리겠던데.”

“수천이라? 많군. 겨우 오십 명 정도로 부딪히기엔 너무 많아.”

중얼거림은 정복자의 것이었다. 역사에는 소수의 군대로 다수를 무찌른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략의 승리였을 뿐이다.

이런 허허벌판에서 정면으로 맞부딪혀 승리를 쟁취해낸 경우는 없다. 적들이 막 징집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이 아닌 이상은.

“걱정할 거 없어. 싸움 시작할 때 내가 마법 한 번 날리면 그대로 이백 마리쯤은 사라지고 없을걸.”

한석구의 말에 산자이가 반응했다.

“하기야 석구 아저씨가 마법 난사만 해도 잡몹들은 다 사라지고 없겠네. 그러면 우리는 보스만 잡으면 되나?”

“복자랑 나는 애들 데리고 적 본대랑 싸울 거야. 산자이랑 오성이는 역병 군주의 친위대를 맡아. 그리고 창이는? 뭐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석구가 짝 하고 박수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러면 잘까? 내일 대비해서 체력 보존해야지. 다들 취침! 쓸데없이 잡담하면서 늦게 자지 말고 지금 바로 자!”

무슨 수련회 감독하는 선생도 아니고 한석구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얼른 자라고 성화를 냈다.

김창은 그 모습을 보며 웃다가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밤이 되니 추웠지만 그래도 모닥불의 온기 덕분에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런 식으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어느새 졸음이 몰려왔다. 잠에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

그리고 잠에서 깨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시간을 알 수 없으니 얼마나 잤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금방 깬 것 같진 않고, 그래도 두세 시간 정도는 잔 것 같은데 주변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모닥불이 꺼졌나? 불침번은 안 세워도 불 지키는 담당은 정했어야 했는데.

쯧 하고 혀를 차는데, 어둠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누가 용변이 마려워서 잠에서 깼나? 그런 것치곤 숫자가 좀 많은데.

김창은 점차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보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쪽에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뭐, 손이라도 잡아달라고? 그러면 내 사양 하지 않고.

뿌득!

“크에엑······.”

김창이 목을 꽉 졸랐던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아마 상대는 목뼈가 부러져서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몸을 일으켜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줄곧 조용히 움직이던 침입자들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괴성을 내질렀다.

“키에엑!”

“입 닥쳐.”

김창은 칼을 뽑아 괴물의 목구멍을 찔러줬다. 더는 비명을 지를 수 없게 된 괴물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뭐야!”

“불! 마법사, 불 켜!”

화르륵!

괴성을 듣고 잠에서 깬 사람들이 재빠르게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마법사들이 불꽃을 일으키자 주변이 훤히 보였다.

“이런 씹! 이 괴물 새끼들 언제 여기까지!”

“죽여!”

“소환수는 뭘 하고 있던 거야?”

김창이 슬쩍 소환수를 쳐다봤다. 그건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문득 한석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간의 은신술만 익혀도 반응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저 괴물들이 은신술이라도 익혔단 말인가?

생긴 게 보통 괴물이랑 다르게 늘씬한 걸 보면 정말 야습에 특화된 개체일지도 모른다. 아마 저쪽에서도 원탁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알고서 기습을 꾸민 모양이었다.

어쨌건 김창으로선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가 칼을 휘둘러 괴물들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키엑!”

비명과 함께 웬 괴물 하나가 김창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가만히 보니 머리가 완전히 으깨져서 곤죽이 된 상태였는데 누가 그랬나 하고 고개를 돌리니 산자이가 보였다.

주먹과 발만으로 괴물들을 으깨버리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오싹한 장면이었다. 그녀는 요정치고 덩치가 작았는데 체격의 차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압도적인 위력으로 괴물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김창이 말했다.

“잘 싸우네. 직업이 무투가랬나? 무기도 안 들고 맨손으로 괴물 때려죽이는 거 그리 쉬운 일 아닐 텐데.”

산자이가 씩 웃었다.

“나 원래 현실에서도 무술 배우고 그랬거든? 중국 무술 유명한 거 알지? 그리고 무협 소설도 많이 읽고 그랬는데 그래서 더 잘 싸우나 봐.”

그럼 나도 현실에서 칼 쓰고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었나? 김창이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산자이의 등 뒤에서 갑작스레 괴물이 튀어나왔다.

김창이 바로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산자이도 기습에 반응했다. 그녀가 휙 하고 몸을 돌리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괴물의 목덜미를 강하게 찔렀다.

괴물이 바르르 몸을 떨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산자이가 휘유 하고 휘파람을 부는 걸 본 김창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 그거 뭐냐?”

“뭐긴? 칼 몰라?”

“나도 아는데······. 무투가가 그런 거 써도 되나? 너 현실에서 무술 배웠다며? 무술 배운 사람이면 그런 거 쓰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산자이가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바로 대답했다.

“뭐래? 중국 무술의 무서움은 무기를 꺼냈을 때 나오는 건데?”

그럼 무투가가 아니잖아, 새끼야. 김창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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