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가만 보니 중국 무술 배웠다는 년이 갑자기 무기 들고 설치니까 어이없다는 얼굴이네? 그런데 그게 왜? 무술이라는 건 원래 인간이 자기 몸 지키려고 배우는 거 아닌가? 말 그대로 무(武)를 다루는 기술인데, 맨손으로 싸우면 무술이고 무기 들면 무술이 아닌 건가?
그리고 원래 중국 무술은 무기 들고 싸우는 게 기본이거든? 애초에 옛날엔 누구 죽이려고 무술 배웠을 텐데 당연히 맨손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 무기 들고 싸우는 게 더 효과적일 테니까.”
산자이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하기야 그녀의 말에 틀린 점은 없으니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김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무술이라는 건 무를 다루기 위한 기술이다.
지금이야 심신의 단련을 위해 무술을 익힌다지만 먼 옛날에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무술을 익혔을 테니 맨손만 고집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니 산자이가 추구하는 무술은 오히려 그 근원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러 무술이 현대 사회에 접어들어 미디어에 의해 꾸며지고 실전성을 잃은 것과는 반대로.
김창도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거기까진.
“네 말대로 무기 쓴다고 무술이 아닌 건 아니지. 그런데 너는 무투가잖아. 내가 알기로 게임 속 무투가는 맨손으로 싸우는 직업이고, 무기도 너클 같은 거 말고는 못 끼는 걸로 아는데.”
게임 속에서 직업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착용할 수 있는 장비다. 세상 그 어떤 게임에서도 지팡이 들고 다니는 전사는 없고, 활 들고 다니는 마법사도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칼 들고 다니는 무투가도 없다. 왜? 그런 식으로 무기 제한을 두지 않으면 직업을 나누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거야 게임 속에서나 그런 거구. 여기가 게임 속이야? 아니잖아. 게임에선 마법사나 사제가 갑옷 입으면 죽일 수가 없으니까 밸런스 때문에 못 입게 하지만 여기선 아니야. 물론 걔네 근력으로는 그거 입으면 얼마 가지도 못해서 헥헥 거릴 테지만, 어쨌건 입을 수는 있어. 이론상으로는 마법사가 갑옷 입고 칼 들고 마검사 해도 되는 거고 사제가 중무장하고 성기사 해도 돼. 그럼 무투가는? 원래 맨손 가지고 싸우는 직업이지만 무기 들고 싸워도 된다는 소리지.”
말이야 맞는 소리다. 게임에선 다른 직업의 장비는 착용할 수 없게 돼 있지만 여긴 아니니까.
실제로 다른 직업의 무기를 사용하려던 사람들도 몇 명 있긴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래의 무기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 쓰던 무기는 숙련도가 있으니 쉽게 다룰 수 있지만 새로 쓰는 무기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뭔가를 처음부터 배우는 건 몹시 지루한 일이다. 사람들은 지금 가진 기술만으로도 어디 가서 안 맞고 다닐 수 있는데 굳이 새로운 걸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산자이는 현실에서부터 무술을 배웠으니 무기 다루는 법에도 익숙한 모양이지. 그래서 새롭게 배울 필요도 없이 바로 다루는 거고.’
칼이라는 건 그냥 휘두른다고 되는 무기가 아니다. 아까 산자이가 칼로 괴물의 목덜미를 정확히 찔러 죽이는 건 그녀가 칼질에 숙달된 사람이라는 걸 의미했다.
“그럼 나도 마법 같은 거 배우면 마검사 될 수 있는 건가?”
“뭐 이론상으로는? 근데 내 생각엔 네 성격에 마법을 진득하게 배우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김창은 뭐라 반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하던 거나 열심히 해. 내가 듣자 하니 너 요즘 엄청 강해졌다던데? 그래서 어쩌면 네가 원탁 랭킹 1위일지도 모른다더라. 그게 정말이라면 축하해!”
원탁 랭킹 1위는 김용걸이다. 물론 그는 강하지만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김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날 다 샜군.”
“그러네.”
어둠이 걷히고 차츰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전투는 이미 끝난 후였고 사람들은 욕을 내뱉으며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 자고 있어야 할 새벽에 습격을 받았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김창이 보니 한석구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불침번 대신 불러낸 소환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물론 그도 괴물 중에 기습에 특화된 개체가 있는 줄은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만.
“···간단히 아침 식사하고 바로 출발한다. 오성이 말대로라며 점심쯤에 적들이랑 충돌할 것 같으니 장비 점검은 미리 끝내둬.”
괴물들의 기습은 별 피해를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원탁의 심기만 긁었다. 원래 밤에 자고 있는데 모기가 앵앵거려서 잠을 설치면 그것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지 않은가?
역병 군주의 공격이 딱 그랬다. 별 대단한 것도 아니면서 괜히 사람 잠만 방해하는 짓거리.
안 그래도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다들 지쳐있는데 잠까지 설친 터라 모두가 씩씩거리며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장비 점검에 들어갔다.
한 시간 뒤에는 모두가 마차에 탑승해 적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오십 명 남짓한 사람을 태운 마차의 행렬은 수천의 대군을 상대로 맹렬히 진격하고 있었다.
“선발대와 기습조 전부를 격파했으니 저쪽에서도 우리를 신경 쓰고 있을 거야. 우리가 역병 군주의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도 느꼈을 테고.”
마차 안에서 하오성이 말하자 한석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서 뭐? 우리가 센 거 알면 뭐 어떻게 되나? 걔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우리한테 병력 들이받고 전부 산화하는 것뿐이야.”
“···우리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왜 저렇게 심통을 부리나? 자기 마법이 뚫렸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히 저거 믿어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래도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으면서 인제 와서 괜한 심통이군.
김창이 혼자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니 싱글싱글 웃고 있는 산자이가 보였다.
“넌 뭐가 그리 즐겁냐?”
“뭐가 즐겁냐구? 왜 안 즐겁지? 이 전쟁 끝나면 나도 이제 영주 직함 달게 될 텐데 당연히 즐겁지?”
생각해보니 한석구는 전쟁이 끝난 후에 하오성과 산자이에게 영주 자리를 주기로 했다.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요직을 채우겠다고 했던가?
‘그거 전형적인 인맥 정치인데.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지양해야 할······.’
한석구 입장에선 말도 안 듣는 놈들에게 영주 자리를 줘야 할 이유가 없긴 하다. 그게 인맥 정치든 뭐든 간에 결국 그 인맥이 능력이 있으면 별 상관 없는 문제 아닌가?
아마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김창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정지! 정지!”
정복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따라 마차들이 하나둘씩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김창을 따라서 사람들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저 아래로 거대한 군세가 보였다.
“어째 어제보다 더 늘어난 것 같은······.”
하오성은 어젯밤에 정찰을 통해 적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미리 보고 왔다. 그런데 오늘 언덕 위에서 보니 그 숫자가 훨씬 더 늘어나 있었다.
설마 그새 또 도시를 점령하고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 것일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역병 자체가 이 지역에 돌고 있으니 괴물이 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군세에 합류한 것일지도 몰랐다.
“마침 위치가 좋네. 굳이 내려가서 싸울 필요는 없고, 이 언덕 위에서 올라오는 애들만 상대하면 될 테니까.”
적들의 숫자는 수천인데 이쪽은 고작 오십 명 남짓이다. 이 정도 숫자 차이면 말 그대로 일당백의 무용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마법사들 대기! 전사들 전부 전열에 서. 혹시나 싸우다가 위험해지면 바로 우리 불러! 도와주러 갈 테니까. 나도 너희가 강한 거 아는데, 어제 싸워봐서 알겠지만 쪽수 앞에 장사 없다고 다구리 맞으면 그대로 가는 거다. 그러니까 너희도 각자 조원 잘 챙겨. 걔네 살려야 너희도 사는 거야.”
정복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하며 웃는 얼굴이던 플레이어들은 이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싸움은 끽해야 병력 수백 명 동원하는 영지전에 불과했으니까.
실제로 수천이나 되는 거대한 군세를, 심지어 인간조차 아닌 이형의 군세를 마주하게 된 것에 상당한 압박감이 느꼈다.
그들은 자신의 강함을 믿지만, 자신들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괜히 이 판에 끼었나? 이거 잘못하면 좆 되는 거 아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복자는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착잡한 시선을 보냈고 하오성 역시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 누구 하나라도 죽어버리면 그대로 모랄빵 나서 다 튀는 거 아니야? 내 보기엔 그런데.”
불안감이 마치 역병처럼 전염되는 가운데, 진군을 계속하던 역병 군주의 군세가 제자리에 멈췄다.
가만히 보니 저 멀리 인간을 감염시킨 괴물 외에도 짐승들이 변한 괴물도 있었다. 곰이나 늑대 따위가 원래 크기보다 훨씬 더 부푼 채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는데 그런 맹수 말고도 말 역시 형체가 뒤틀려 있었다.
괴물들 주제에 기병까지 운용하나? 김창은 이거 생각보다 더 제대로 된 군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 군세를 지휘하는 역병 군주도 생각 이상으로 강한 놈일지 모르고. 그가 남몰래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저쪽에서 괴물 말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그 위에는 당연히 괴물이 타고 있었는데 제법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병사 출신이었던 건지 제대로 된 무장을 했고 손에는 깃발까지 들었다.
깃발에 문양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아마 저게 군기(軍旗)인 듯했다. 괴물들 주제에 저런 것까지?
김창이 허 하고 혀를 차는 가운데 괴물 병사가 소리쳤다.
“우, 우, 우리는 위대한 역병 군주님을 섬기는 죽음의 군세다! 너, 너, 너희는 누구냐!”
아무래도 저놈이 부대의 기수인 듯한데 생각보다 말을 또렷하게 해서 놀랐다. 원탁의 랭커들이 누가 나갈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정복자가 한 발자국 나서는 순간이었다.
“네가 대장이냐?”
말을 내뱉은 건 한석구였다. 그는 인상을 확 찡그린 채로 괴물 기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나, 나는 너희가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긴, 씹새야. 원탁이지. 너흰 이 땅에 살면서 원탁의 이름도 안 들어봤냐?”
“워, 워, 원탁? 이, 이, 이방인들의 집단이로군. 가, 가, 감히 겁도 없이 죽음의 군세와 맞서느냐?”
“말 되게 더듬네. 시끄럽고, 네가 대빵 맞아? 아니면 대빵 데려와.”
“가, 가, 감히 너 따위가 역병 군주님을 뵈려 하느냐? 거, 건, 건방진 놈! 네, 네, 네가 역병 군주님을 뵙는 건 죽은 이후······.”
괴물 기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한석구의 마법이 그 머리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대빵 데려오라고 했지.”
순간 전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잘은 몰라도 역병 군주 역시 방금 장면을 봤을 것이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한석구가 말했다.
“난 말이다, 너희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든 내 알 바 아니야. 땅따먹기 할 거면 다른 곳에서 하든 말든 난 신경 안 써. 대륙을 다 처먹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그런데 씹새야, 우리 나와바리에서 설치면 안 되지.”
여기가 언제부터 우리 거였는데? 저 미친놈, 땅 먹기도 전부터 여기가 자기 땅이라고 기억 왜곡이라도 된 건가?
‘말하는 것만 보면 아주 훌륭한 깡패야.’
아니, 행동하는 것도 깡패던가?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