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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혹시 내 말에 뭐 불만이라도 있나? 그러면 나와서 이야기해. 아니면 덤비던가.”
다짜고짜 기수를 죽여버려겠다, 거기에 도발까지 하고 있으니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역병 군주의 군세는 더는 기다리지 않았고 커다란 함성과 함께 언덕 위로 질주했다.
한석구는 엄청난 기세로 몰려오는 괴물들을 쳐다보며 양손에 마력을 모았다. 둥글게 뭉쳤던 마력은 손을 내뻗는 것과 동시에 직선으로 곧게 나아갔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쏘아져 나간 빛은 경로상에 있는 모든 적을 소멸시켰다. 괴물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한 줌의 재로 변했고, 여전히 이어지는 빛에 의해 그 재조차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괴물들은 의도치 않게 두 무리로 갈라졌다. 한석구의 마법에 의해 중앙의 괴물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방금 그 공격에 덕분에 못 해도 수백 마리의 괴물이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적들의 규모를 보고 겁을 집어먹었던 원탁의 플레이어들은 다시금 용기를 되찾았다.
저쪽에 괴물들이 많으면 뭐 어떤가? 이쪽엔 괴물을 죽이는 진짜 괴물들이 있는데.
“모두 무기를 들어라!”
커다란 외침과 함게 순간 눈이 멀어버릴 듯한 강렬한 빛이 반짝였다. 그건 한석구가 보여줬던 마력의 빛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훨씬 더 따스하고 권위가 넘치는 빛이었으니 그건 성기사 정복자가 뿜어내는 강렬한 후광이었다.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터질 듯한 용기가 가슴 속에 가득 차는 걸 느꼈다.
전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었고 마법사들이 마력을 모았다. 정복자가 철퇴를 머리 위로 들었다가 크게 내리치며 외쳤다.
“원탁을 위하여!”
쿵!
그가 철퇴로 바닥을 내리치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언덕 위로 달려오던 괴물들이 진동 탓에 몸이 흔들렸고 마법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쏴라!”
“원탁을 위하여!”
열 명의 마법사가 일시에 쏘아내는 마법은 한석구의 것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그들은 원탁 내의 마법사 중에서 고르고 고른 열 명이었고 원탁 바깥에선 전략 병기로 취급될 만큼 강력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존재가 열 명이나 모여 쉴 새 없이 마법을 쏘아대고 있으니 아무리 적들의 숫자가 많아도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거칠게 땅을 박차며 달려오던 괴물들 중 언덕 위까지 도착하는 건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 더러운 괴물 놈들! 덤―벼―라!”
덩치 큰 성기사의 외침은 도발 효과가 있었다. 언덕 위로 올라온 괴물들은 환한 후광을 번쩍이고 있는 정복자에게 달려들었고 날아오는 철퇴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
어찌어찌 정복자의 몸에 달라붙어 그 몸을 깨물더라도 단단한 갑옷에 약간의 흠집을 남기는 데 그칠 뿐이었다.
괴물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강력한 괴력 역시 정복자에겐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는 크게 철퇴를 휘둘러 괴물들의 머리를 박살 내고는 자기 몸에 달라붙은 괴물 하나의 목을 졸라 뼈를 부러트렸다.
그리고 축 늘어진 그 시체를 휙 하고 던져서 언덕을 올라오던 적들을 향해 던졌다. 시체에 맞은 괴물들이 그대로 쓰러져 바닥을 굴러 아래로 떨어졌다.
“빛이여!”
철퇴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소리치자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괴물들을 모두 날려 보냈다. 정복자의 등 뒤에서 번쩍이는 후광은 이제 마치 태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심지어 같은 편마저 눈을 뜨기 어려웠다. 칼을 들고 적들을 썰어넘기고 있던 김창이 불만스레 소리쳤다.
“야, 불 꺼!”
정복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철퇴를 들고 언덕 아래로 달려 나갔을 뿐이다.
그 덕분에 다시 눈을 뜰 수 있게 된 김창이 한석구에게 말했다.
“저 새끼 저거 옛날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아닌가?”
“그럼 더 강해졌나 보지 뭘.”
“네 명령 따라서 괴물들 죽이고 다닐 땐 여전히 좆밥이더니 어째 싸움 그만두고 영주 노릇이나 하는 지금이 더 강해진 것 같네.”
“내가 잘은 몰라도 신성력이라는 건 착한 일 많이 하면 늘어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복자도 영주 일 잘해서 사람들 많이 살리고 그러니까 신성력 늘어났나? 하기야 자기 영지민도 아닌 애들 살리자고 이 난리 치고 있으니 신이 감동해서 신성력 더 내려줬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설정상 모든 성기사는 태양신의 기사다. 그러니 정복자 역시 태양신의 종복인 셈인데, 어쩌면 태양신이 정복자를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태양신의 대전사 직함에 별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그건 신이 정하는 거지, 인간이 정하는 건 아니니까.
‘생각해보면 람인가 하는 놈이 죽음의 신이 날 주시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놈을 죽였는데 상도 안 주고 뭘 하는······.’
아니면 람이 거짓말을 했나? 하지만 모르스의 사도라는 놈이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 텐데.
김창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지금도 나 보고 있으신가?”
들고 있던 칼로 하늘을 겨누며 말했다.
“그럼 처신 잘하쇼. 내가 아직 지상에 있을 때 생각 잘하라고.”
한석구가 이 미친놈이 또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갑자기 정신 나갔니? 하늘에 칼 겨누고 뭐 해? 그럴 시간 있으면 적이나 한 마리 더 죽여.”
“그냥 협박 좀 하고 있었다.”
“···협박? 누구한테?”
“신.”
이 새끼 진짜 미쳤네. 한석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를 무시하고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전장의 상황은 이쪽이 우세였다. 한석구와 열 명의 마법사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화망은 적들의 접근 자체를 차단했고, 어쩌다 언덕 위로 올라오는 적들은 전열의 전사들이 모두 처리했다.
또한 언덕 아래에선 정복자가 날뛰면서 적들을 분쇄하고 있었는데 그쪽에 병력의 일부가 몰리면서 후열의 마법사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다.
“이 역겨운 성기사 놈!”
“우리는 역병 군주를 섬기는 네 기사다!”
“우리가 널 상대해주마!”
겨우 오십 명을 상대로 쩔쩔매고 있으니 저쪽에서도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장 선두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던 정복자에게 갑옷 입은 괴물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역병 군주의 친위대인 모양인데 확실히 다른 괴물보다 더 강했다.
물론 그 넷이 모였다고 정복자를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어찌나 재빠른지 무거운 갑옷을 입은 정복자로선 네 명을 한 번에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신성 마법은 혹시나 적들에게 포위될 때를 대비해서 아껴야 했으니 함부로 남발할 수는 없었다.
정복자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적들을 보면서 짜증스럽게 외쳤다.
“산자이! 하오성! 김창! 내―려―와!”
원탁의 랭커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빠르게 언덕 아래로 내려오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죽여버렸다.
제일 먼저 도착한 건 역시나 하오성이었다. 그는 원탁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진 남자답게 괴물 기사들의 속도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안녕?”
“···뭣?”
기척을 숨기고 괴물 기사의 뒤를 잡은 하오성이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갑옷 틈 사이에 찔렀다.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그 신체는 인간의 것과 다름이 없다. 근육을 끊고 관절을 부러트리며 움직일 도리가 없는 것 인간과 똑같다.
하오성의 직업은 도적. 게임 속에서 역할은 대인 암살. 거대한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인간형의 적이 상대라면 이쪽이 유리하다.
순식간에 괴물 기사의 움직임을 무력화시킨 그가 적의 얼굴에 단검을 꽂았다. 괴물이라고 해서 뇌가 없는 건 아닐 테니 이걸로 사망일 터다.
“휘유, 오성이 아저씨 엄청 빠르네! 그럼 우리도 힘내볼까?”
뒤늦게 달려온 산자이가 주먹을 내질러 괴물 기사의 몸을 후려쳤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갑옷이 우그러지고 괴물 기사의 자세가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괴력에 괴물 기사가 일단 뒤로 물러나서 재정비하려고 했지만 산자이가 그걸 하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괴물 기사가 아주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일단 거리가 벌어지면 다시 잡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가 조금이라도 벌어지려고 하면 바로 따라붙었고 손을 뻗어 갑옷 틈 사이에 손가락을 단단히 고정했다.
이 상황에선 괴물 기사도 도망칠 수 없다. 거리를 벌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무기를 휘두르는 것뿐이었는데 산자이는 웃으며 모두 피할 뿐이었다.
딱 한 번 휘두른 칼이 그 어깨에 닿을 뻔한 적이 있는데 산자이가 오른손으로 기이하게 움직이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대로 튕겨 나갔다.
저게 뭐냐고 경악할 새도 없이 괴물 기사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몸이 휘청거리며 얼굴이 뒤로 젖혀졌지만 산자이가 갑옷을 붙잡고 힘껏 당겨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
쾅! 쾅! 연달아 울리는 타격음 끝에 괴물 기사의 얼굴은 완전히 함몰 돼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산자이는 그제야 웃으며 괴물 기사의 몸을 놔주었다.
“죽―어―라!”
정복자는 다른 사람들이 적을 나누어 맡아준 덕분에 훨씬 더 수월하게 괴물 기사의 머리통을 부술 수 있었다.
그는 철퇴에 맞고 다리가 부러져 바닥을 기고 있는 괴물 기사의 머리를 철퇴로 내리찍어 완전히 박살 냈다.
부서진 머리 안에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액체가 새어 나왔다. 정복자는 그걸 보고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얼추 다 끝난 것 같은데.”
제일 늦게 달려온 김창은 제일 먼저 괴물 기사를 쓰러트렸다. 그는 직접 싸우지도 않고 그냥 칼을 날려 보내 괴물 기사의 심장을 찔렀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고 어이없어했지만 김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친위대도 다 죽였고, 본대도 절반 정도 정리했군. 우리 쪽 피해는 전무하고 이대로면 더 싸워봐야 결과가 뻔하지 않나?”
김창은 군세의 가장 안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승기는 확실히 원탁으로 기울었다.
겨우 오십 명 남짓으로 수천의 군세를 격파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역병 군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당장 친위대만 해도 아무것도 못해보고 전부 죽지 않았나?
그러면 이제 원탁의 괴물들을 역병 군주 혼자서 상대해야 할 텐데 과연 그가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
그건 승천할 자가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승천할 자라고 해도 불가능할지 모르지.
“그만.”
친위대가 죽었음에도 지성 없는 괴물답게 플레이어들에게 달려들려 하던 괴물들이 제자리에 딱 멈췄다.
나직한 목소리는 제 주인의 것이었으며 그들은 그 목소리로부터 저항할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군세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제 주인을 위한 길을 만들었다.
“뭔가 오는 모양인데?”
“긴장 늦추지 마라. 우린 역병 군주가 어떤 놈인지 모르니까······.”
“그래도 뭐 어때? 우리한텐 인간 백정 김창이 있잖아!”
김창이 산자이를 노려봤다. 하여튼 저 짝퉁 요정 놈······.
“원탁의 이방인들.”
갈라진 군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키가 큰 남자였다. 그는 망토로 몸을 가렸고 얼굴에는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왜 옛날에 역병 의사들이 쓰고 다니던 가면이 저랬던가? 저 남자의 별명은 역병 군주이니 복장에 있어서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역병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였지만 역병 군주는 역병을 퍼트리고 다니는 존재라는 점일까.
“그리고 승천할 자.”
목소리는 묵직했다. 가면 때문에 목소리가 울려서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제법 나이가 있다는 건 알았다.
역병 군주의 몸에선 알 수 없는 기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명이나 되는 적을 보고서도,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이 승천할 자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김창은 역병 군주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느꼈다. 정복자를 비롯한 나머지 두 명도 그걸 느꼈는지 표정이 나빠졌다.
“당신들의 강함엔 감탄했소. 과연 내겐 승산이 없군.”
정복자가 물었다.
“···그걸 이제 알았나?”
“승산이 없는 건 애석한 일이지만 뭐 어떤가. 애초에 난 이기고 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소. 내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역병 군주가 고개를 돌려 김창을 쳐다봤다.
“승천할 자여.”
난 또 왜.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목숨 구걸이라도 할 셈이냐? 친위대도 다 죽고 없으니까 덜컥 겁이라도 났나?”
“만약.”
역병 군주의 가면 사이로 스산한 빛이 반짝였다.
“이 모든 군세가 당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면, 그러면 믿으시겠소?”
“믿겠냐?”
“······.”
이 새끼 이거 죽기 싫으니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김창이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