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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15화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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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믿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소. 당신이 보기에 나는 그저 군세를 일으켜 도시를 침략하고 다니는 사악한 존재에 불과할 테니.”

역병 군주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김창이 칼로 그의 얼굴을 겨누며 말했다.

“잘 아는군. 그럼 괜한 헛소리로 네 목숨을 구해보려 하지 마라. 네가 뭘 지껄이든 간에 난 널 죽일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듣기에도 역병 군주가 하는 말은 죄 헛소리였다.

그가 이끌고 온 이 거대한 군세가 김창을 위한 선물이라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그건 누가 봐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되는대로 지껄인 헛소리에 불과했다.

역병 군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흉흉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덤덤히 자기 할 말을 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지. 그리고 대화는 복잡하게 꼬인 매듭조차 끊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있소. 그러니 우리 대화합시다. 칼을 내려두고, 대화합시다.”

역병 군주의 목소리는 무거웠고 말투는 점잖았다. 역병을 뿌려 마구잡이로 군세를 늘리고 거침없이 도시를 공격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정말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듯 김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혹시 대화를 미끼로 자신을 방심시켜 기습하려는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역병 군주는 연기의 천재일지도 모른다. 지금 그의 몸에선 아무런 적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야, 저 헛소리를 왜 가만히 듣고 있어? 그냥 칼 꺼내서 목이나 쳐. 네가 잘하는 일이잖아.”

정복자의 목소리에 김창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 말 들으니까 바라는 대로 해주기가 싫은데.

“대화라? 그래, 한 번 지껄여봐라.”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복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 쟤 말을 왜 들어주고 있는데?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애들은 싸우고 있다고! 빨리 이 새끼 죽이고 전쟁 끝내야지!”

김창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정복자의 말대로 아직 언덕 쪽에선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서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끌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역병 군주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안위가 신경 쓰인다면 걱정하지 마시오. 대화하는 동안엔 전투를 멈출 테니.”

역병 군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언덕 위로 달려가던 모든 괴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은 공격을 받더라도 반격하려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도망치기만 할 뿐이었다.

언덕 위의 사람들이 이게 대체 뭔 일인지 당황하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갑작스럽게 중지된 전투에 전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기이한 침묵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대화합시다. 설마 신성한 대화의 장에 창칼을 들이미는 무식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믿겠소. 나는 당신들에게 믿음을 보였으니 당신들 역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오.”

정복자가 슬쩍 김창을 쳐다봤다. 그는 정말 대화를 하겠다는 듯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복자는 감히 김창에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가 없었다. 지위로도, 그리고 힘으로도.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다. 승천할 자의 이유 모를 변덕을.

“말해봐라.”

김창의 허락이 떨어지자 역병 군주가 말했다.

“내 이름은 기오르요. 세간에는 역병 군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건 내 본질이 아니오.”

“네 이름 따윈 관심 없다. 본론만 말해. 내 인내심이 다 떨어지기 전에.”

“그러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당신에게 내 군세를 바치러 왔을 뿐이오. 믿기 힘든 말일 테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오. 그러니 내 묻겠는데, 나와 이 군세를 기꺼이 거두어 주시겠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복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오성은 이게 대체 뭔 소리인지 몰라서 멍한 얼굴이었고 산자이는 실실 웃는 얼굴로 흥미진진하게 대화를 경청하게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김창의 입으로 모였다. 그가 대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나? 내가 뭐 때문에 너 따위를 거두어야 하냐고.”

이번에도 거절이었지만 기오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신께서 그걸 원하니까.”

“신?”

천상에 있는 신성 덩어리? 김창이 혼자 불경한 생각을 하는 가운데 기오르가 이어 말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나는 죽음의 인도자이자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의 추종자요, 또한 검은 칼날의 종복이오. 감히 내 주인의 신명을 말하자면 그것은 모르스이며 나는 죽음의 신을 섬기는 사도요.”

죽음의 신이라는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정복자였다. 그는 언젠가 김창과 함께 모르스의 사도를 죽인 적이 있었다.

그때 사도의 이름이 람이라고 했던가? 정복자가 기억하기로 람은 사도답게 엄청난 양의 신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기오르의 몸에선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람과 같은 신의 사도라면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네가 신의 사도라고? 헛소리를 하는군. 내가 전에 만났던 모르스의 사도는 강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네 몸에선 약간의 신성력조차 느껴지지 않아. 감히 그딴 말로 우리를 속이려 드는 거냐?”

정복자가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기오르가 웃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왜 내 몸에서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이게 그 이유에 대한 답이 됐으면 기쁘겠소.”

기오르가 가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모두가 윽 소리를 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가면 아래에 가려졌던 기오르의 얼굴은 살갗이 전부 썩어문드러졌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구더기가 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죽은 자의 몸에는 신의 은총이 깃들지 않는 법이지. 나는 원래 모르스의 신자로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죽음 이후에 모두 잃었소. 그러나 내 신앙심만은 여전히 내 주인을 향하고 있으니 모르스께선 그것을 기특하게 여겨 나를 사도로 삼은 것이오.”

기오르가 눈가의 구더기를 손가락으로 튕겨낸 후에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 혹시 시체 주제에 악취가 나지 않는 것도 해명해야 할까? 그거라면 당신들을 위해 마법의 힘을 빌린 것이니 혹시나 오해하진 말아 주시오.”

정복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산자이가 으악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그 역겨운 면상 좀 가려요! 더러워 죽겠네!”

“요정 아가씨, 내 실례했소. 그럼 원하는 대로.”

기오르가 다시 얼굴을 가렸다. 한결 나았다.

“그러면 대화를 이어서 해봅시다. 어디까지 했더라. 왜 당신에게 군세를 바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말했던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내 신이 원하기 때문이오. 모르스는 당신이 군세를 거느리길 원해.”

아까 하늘에다 대고 협박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굳이 달라고 한 적도 없는 군세를 주겠다고 하는 걸 보면?

김창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르스를 협박한 건 아까의 일인데 이 군세가 나타난 건 그보다 더 전의 일이니까.

그러면 모르스는 왜 이런 짓을 꾸몄나? 뭘 위해서?

“내가 군세를 거느리길 원한다고? 왜?”

“장황한 설명은 제쳐두고 핵심만 간단히 이야기하지. 당신의 인내심이 그리 많아 보이진 않으니까. 승천자의 규율에 대해선 물론 아시겠지?”

“그래.”

“모르스가 당신이 군세를 거느리길 원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오. 승천자의 규율 때문에 세상은 곧 거대한 전쟁에 휘말리게 될 거요. 모든 승천할 자는 자신만의 세력을 거느리고 있고 그들이 움직이면 휘하의 세력 역시 움직일 테니까. 그건 필연적인 일이요. 거부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시대의 흐름이지.”

“그래서.”

“모르스는 당신이 신이 되길 원하오. 다른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천상의 권좌를 손에 거머쥐길 바라고 있소. 그래서 당신을 도우려 하는 거요. 오직 당신만이 어떠한 세력도 없이 홀로 싸우고 있으니까.”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모르스는 내가 신이 되길 원한다고? 대체 왜?

‘그래서 자신한테 득 될 게 뭐가 있다고?’

아무리 부하 직원을 아끼는 상사라도 그 부하 직원이 자신과 같은 직급이 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부하는 어디까지나 자기 밑에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부하가 자신과 같은 위치까지 올라와 버리면 그건 그냥 경쟁자만 늘리는 일이 아닌가?

신이 되는 것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 신이 자신의 대전사에게 아끼지 않고 지원을 해주는 건 대전사가 활약할수록 신도의 숫자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신의 힘 역시 늘어나게 된다. 그러니 신의 입장에선 대전사가 많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 대전사가 유명해지다 못해 승천하여 신이 돼버리면? 어제까진 부하였던 놈을 이젠 동격의 대상으로 대우해줘야 하는데 신으로서 그건 별로 재밌는 일이 아니다.

김창은 애초에 모르스의 신도가 아니지만 어쨌건 그가 신이 되는 건 모르스에게 득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두 명의 신을 믿진 않으니 새로운 신이 늘어나는 건 괜히 신도만 나눠 먹는 일이다.

“모르스가 그걸 왜 원하는데? 그래서 이득 볼 게 대체 뭔데?”

“그거야 한낱 미천한 종복에 불과한 내가 어찌 알겠소? 나는 그저 신의 뜻을 행하는 대행자일 뿐. 잘은 몰라도 지고한 존재에겐 지고한 뜻이 있는 것 아니겠소?”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찬 뒤에 말했다.

“그래서 나보고 이 군세를 가지라고? 그래서 다른 승천할 자들과의 경쟁에서 싸워 이기라는 거냐?”

“맞소. 군세의 관리는 내가 할 테니 당신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소. 지금은 고작 수천에 불과한 군세지만 몇 달만 더 있으면 수만까지 불어날 거요. 귀찮은 일은 다 내가 할 테니 당신은 그냥 이 군세를 마음대로 쓰기만 하면 되오. 나는 이제 당신의 칼이니 원할 때마다 휘두르시오.”

기오르가 머리를 숙이자 김창이 대답했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군대라? 솔직히 탐이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정복자가 화들짝 놀라 김창을 쳐다봤다.

“야, 너 미쳤······.”

“난 말이야.”

김창의 목소리는 낮았다. 늘 그랬듯이.

“플레이어는 죄 깡패라고 생각해. 돈 받고 사람 죽이고 다니는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원탁은 그냥 조폭 비슷한 거지. 지금까지 내키는 대로 살아왔으면서 인제 와서 착한 척 위선 떠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해.”

기오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깨끗하기만 한 인간이 어디 있겠소? 당신은 무려 신이 될 자격을 가진 자인데 그 정도 흠결이야 없는 것과 다를 게 없지. 그러니 더는 망설이지 말고······.”

“하지만 난 깡패에겐 깡패로서 따라야 할 법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들 보기엔 깡패 새끼 주제에 뭔 헛소리냐고 할지 몰라도 난 진지해. 깡패는 말이야, 사람 팰 때 이유가 있어야 해. 돈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길을 가다가 어깨를 부딪쳤다거나 하는 그런 같잖은 이유라도 있어야 한다고. 그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 패면 뭔 줄 아나? 양아치야. 그리고 나는 그런 양아치를 아주 혐오해.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겠나?”

“글쎄, 잘······.”

“그래, 모를 거야. 그러니 내 설명해주지. 나는 지금 죄 없는 사람들 싹 죽여서 만들어온 군대를 감사하다고 받을 줄 알았냐고 말하는 중인 거다. 이제 이해가 돼? 그러면 내가 할 대답도 뭔지 알겠군?”

김창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좆까.”

모르스의 사도가 한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 신까지 모욕한 일이다. 신을 섬기는 사도로서 응당 분노해야 할 일이지만 기오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날 뿐이었다.

“그런가. 처음부터 신은 이걸 원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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