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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16화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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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기오르가 한 손을 들고 다른 손을 뒤집었다. 그가 뭔가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챈 모두가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쥘 때였다.

“대화는 여기까지 합시다. 더 해봐야 시간 낭비일 것 같으니. 그러면 승천할 자여, 만나게 되어 반가웠소.”

기오르가 양손을 회전시키자 손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서 허공에 붉은 원이 나타났다. 뭘 하려는 건진 몰라도 사술을 부리려 한다는 건 확실했기 때문에 정복자가 반사적으로 모두를 지키고 섰다.

그가 신성력을 끌어올려 기오르의 머리를 철퇴로 내려치려 할 때였다.

“큭!”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따끔함에 순간 철퇴를 휘두르던 손이 흔들리고 말았다. 기오르는 별로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했고 철퇴는 애꿎은 땅만 때릴 뿐이었다.

정복자는 얼른 고개를 돌려 고통의 원인을 파악했다. 아까 자신이 쓰러트렸던 괴물 기사가 갑옷 틈새로 칼을 찌르고 있었다.

“이 새끼···?”

아까 죽은 게 아니었나? 머리 으깨진 걸 보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긴 했는데, 뭔 수로 다시?

정복자는 두 눈을 부릅뜨며 괴물 기사의 목덜미를 손으로 붙잡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몸을 철퇴로 으깨버렸는데 잠시 뒤에 괴물 기사가 몸을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설마? 얼른 고개를 돌려 기오르를 쳐다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날 죽이기 전에는 시체가 무한히 부활한다고 말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김창! 저 새끼 맡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다른 애들은 김창이 저 새끼 죽일 때까지 버티고!”

정복자의 외침에 하오성과 산자이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다시 일어난 괴물 기사들을 때려눕혔지만 역시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슬쩍 뒤를 보니 진군을 멈췄던 괴물들이 다시 괴성을 지르며 언덕 위로 달려가고 있었다. 몹시 다행스럽게도 괴물들은 일단 죽으면 부활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적의 숫자가 많아서 오래 끌 만한 싸움은 아니었다.

“시간 없으니 얼른 시작할까.”

김창이 까딱 고갯짓하자 허리춤에 달려 있던 칼 한 자루가 칼집에서 스르륵 빠져나와 기오르를 겨누었다.

무생물인 칼이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주인을 지키고 있는 걸 보고서 기오르가 호오 소리를 냈다.

다만 감탄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약간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 게 뻔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서러운 일이군.”

“자신 없으면 도망이라도 갈 것이지 굳이 왜 싸우는 거냐. 자존심 때문이냐?”

“도망가선 안 되니까. 사도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기오르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어서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김창은 그 건방진 행동을 보고서 픽 웃더니 곧 기오르를 향해 뛰었다.

오른손에 든 칼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새까만 벽이 솟아올랐다. 힘껏 질주하던 칼은 벽을 깨부수고도 멈추지 않았다.

기오르가 연속적으로 마법을 날렸지만 김창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또 한 자루의 칼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모든 공격을 요격했다.

덕분에 김창은 오직 기오르를 공격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칼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기오르는 몇 발자국씩 뒤로 도망쳐야만 했다.

“······흐음.”

기오르는 자신을 노리는 칼날을 보고서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김창의 움직임을 감상하는 것처럼 때때로 추임새를 흘리며 허공에 손을 휘적이길 반복했다.

그는 열심히 싸우고 있었지만 거기에 승리를 위한 필살의 각오는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제대로 싸우고 있는데 진지하게 싸움에 임한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궁지에 몰릴 주제에 이 의욕 없는 태도는 대체 뭔가? 싸울 마음이 없는 건가? 그런 것치고 날리는 마법은 하나 같이 위협적인 게 우습다.

기오르는 마치 제게 주어진 일만 반복하는 태엽 인형처럼 굴고 있었다. 공격이 날아오면 방어하고, 방어가 끝나면 반격한다.

거기에 자기 의지 따위는 없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고 있을 뿐이다.

싸움이 이어질수록 김창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졌다. 그는 기오르가 이 싸움을 더럽히고 있다고 느꼈다.

신성을 얻기 위한 숭고한 투쟁을 그저 하잘것없는 다툼 따위로 격하시키는 행위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이래선 안 된다. 이 싸움은 의미 있는 투쟁이어야만 한다.

“똑바로 싸워.”

김창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똑바로!”

칼날이 벼락처럼 움직여 기오르의 오른쪽 어깨를 잘랐다. 이미 한 번 썩은 육체는 너무나도 쉽게 잘려나갔다.

어깨 하나가 공중을 나는 것과 동시에 칼 한 자루가 기오르의 왼쪽 가슴을 꿰뚫었다. 이미 죽은 몸이라 심장이 있을 리가 없지만 유효한 타격이긴 했다.

기오르가 울컥 썩은 피를 뱉어내며 몸을 비틀거렸다. 김창은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크게 휘둘러 기오르의 허리를 비스듬히 끊었다.

빛이 한 번 번쩍이고서 하반신과 분리된 상반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오르는 아무런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무력화됐다.

아니, 그는 일부러 방어하지 않았다. 물론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그는 애초부터 김창에게 져줄 생각이었다. 김창은 그 사실에 다시 없을 치욕을 느꼈다.

“너 따위가 감히······.”

김창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건 마법사의 마력과는 달랐고 성기사의 신성력과도 달랐다.

그것은 이 세상의 원류와 연결된 근본적인 힘이었다. 신성. 신이 될 자격이자 승천할 자의 권능.

탁한 잿빛의 신성이 김창의 몸을 휘감았다. 이미 한 번 죽어 숨 쉴 필요가 없는 기오르는 어째서인지 숨을 쉴 수 없다는 감각을 다시금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거대한 두려움.

“감히 내게 일부러 져? 네가 져주지 않으면 내가 널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했나? 대답해!”

화악!

몸에서 퍼져나간 신성이 기오르의 몸을 졸랐다. 그는 모르스의 사도로서 신성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미 숨이 멎은 몸이요, 또한 심장이 멈춘 몸이지만 그는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그 모든 고통을 일시에 느꼈다.

목이 졸리고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기오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우습게 본 적이 없소······. 오히려 이건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경의요······.”

“경의? 지껄인다고 다 말인 줄 아나?”

“지, 진심이오···. 나는 애초에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소······. 그러니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이오······. 내 목숨을 바쳐··· 당신이 신성을 얻을 수 있도록··· 단지 그러려고 했을 뿐······.”

김창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가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한 몸 바쳐서 날 도우려 했다고. 그것참 감동적인 개소리군. 내가 그걸 믿으리라 생각하나?”

“모, 모르스의 사도로서······ 내 신에게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소······. 난 당신을 도우려 했던 거요···. 내 방식이 기분 나빴다면··· 내 진심으로 사과하지······.”

기오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정말 김창을 도우려 했던 게 아니라면 일부러 져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왜? 김창이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묻자 기오르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었다.

이미 근육이 문드러져 잘 움직이지 않는 얼굴이지만 그가 억지로 웃음 비슷한 걸 만들었다.

“아까 당신과 대화하며 깨달았소······. 신은 당신에게 군대를 주려고 했던 게 아니야······. 그 모든 건 내 착각이었지···. 신은 그저······ 당신이 날 제물 삼아 더 위로 가길 원했던 것뿐······. 아, 내 신이여. 어찌 이리 잔혹하십니까? 당신의 열성자를 어찌 이토록 쉽게 내치시나이까? 하지만 내 신이여. 나는 당신의 영광에 눈이 멀었으니 이 썩어 문드러진 몸뚱이를 당신 뜻대로 쓰소서······.”

기오르는 그 말을 끝으로 숨이 끊어졌다. 정확히 말해서 그 몸에 담겨 있던 죽음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영혼이 육체를 떠나버린 것이다.

역병 군주의 영혼이 소멸하자 무한히 부활하던 괴물 기사들도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괴성과 함께 언덕 위로 달려가던 괴물들도 갑자기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섰다.

전투는 갑작스럽게 끝났다. 역병 군주의 죽음과 함께. 김창은 내면에 신성이 깃드는 걸 느꼈다.

“어, 뭐야······. 끝난 거야?”

한참 싸우고 있던 하오성이 멍청한 목소리로 묻자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은데.”

“후,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그런데 저 괴물 놈들 싹 다 죽여야 하나? 그냥 두면 나중에 또 난리 치고 그러려나?”

“혹시 모를 위험의 씨앗을 남겨둘 이유는 없지. 저건 나중에 마탑의 마법사들한테 지원 요청하면 될 거다. 걔네 오면 금방 정리될 거야.”

김창은 정복자와 하오성이 떠들든 말든 하늘을 보고 있었다. 뭔가 생각하는 듯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다가 갑작스레 하늘 위로 칼을 쳐들었다.

“아,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가까이 있던 산자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창은 자기 할 말을 했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넌 뒈진다. 아시겠어? 내가 아까 말했지. 처신 잘하라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거 미친놈도 아니고 갑자기 웬 혼잣말? 게다가 하늘에 칼은 또 왜 겨누고 있나? 산자이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정신 나갔나? 사람 무섭게 뭐해?”

“저 위에 있는 놈이 말을 영 못 알아듣잖아.”

“저 위에 뭐가 있는데?”

김창이 칼집에 칼을 꽂고서 몸을 돌렸다.

“신.”

“······얘 진짜 맛이 가버렸네.”

산자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서 김창은 언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복자와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언덕 쪽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저 위에서 한석구도 그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가 점멸 마법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수고했어! 덕분에 다친 사람 없이 끝났네. 뒤처리는 어쩌지? 다들 지쳤는데 이거 싹 치우긴 어려울 것 같은데.”

한석구의 말에 정복자가 대답했다.

“용걸이한테 연락해서 마탑 사람들 좀 쓰면 안 되나? 걔네 오면 금방 정리될 것 같은데.”

“아, 그럴까? 거기도 영업 뛰느라 바쁘긴 한데 뭐 사람 좀 굴리면 어떻게든 정리되겠지. 그러면 그건 내가 연락할게.”

한석구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싸움이 끝나고서 원탁은 한층 더 광활한 영토를 얻게 됐으니까.

“그러면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부턴 뒤처리로 바빠지겠군. 난민들을 당장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일단은 호엔에서 데리고 있을게. 가능하다면 원탁의 식량 지원도 이어지면 고맙겠는데······.”

정복자가 말끝을 흐리자 한석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 사람들이 이제부터 우리한테 세금 낼 건데, 싹 다 굶어 죽게 둘 수는 없잖아? 다만 식량 지원을 무한정으로 해줄 수는 없어. 무너진 도시 복구하려면 몇 달은 걸릴 테고, 또 자원도 무지막지하게 들어갈 텐데 그동안 난민들 먹을 것까지 다 챙기면 원탁은 파산이야.”

여러 도시를 복구하고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건 강대한 세력을 가진 대영주도 감당 못 할 일이다. 근래 들어 원탁의 세력이 늘어나긴 했지만 전후 복구에 드는 돈을 너끈히 댈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진 않다.

정복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끄응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러면 어쩌지? 그 많은 사람을 다 내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호엔에서 전부 거두기엔······.”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남이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사는 게 정 아니겠어? 우리 도와줄 만한 사람한테 가서 돈 좀 달라고 하지 뭐.”

생각해보니 한석구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 있다고 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지만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한석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원래 나라에 전염병 돌고 그러면 국가 재난 사태인 거 알지? 그럼 그거 수습은 누가 해? 당연히 국가가 하겠지? 그러라고 있는 게 국가니까. 그러면 이번 일도 마찬가지 아닌가? 역병 군주 놈이 역병 퍼트려서 아주 엉망을 만들어놨으니 국가가 수습해야지?

그런데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우리 같이 정의심 넘치는 사람들이 대신 해결해주고 있으니 이건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야. 하지만 칭찬 좀 받는다고 사람 살릴 수는 없지. 중요한 건 돈이고, 우린 그 돈 받을 자격 있어. 왜? 착한 일 하는 거니까. 그러니 가서 돈 달라고 요구하는 건 우리의 정당한 권리이자 사람들 살리기 위한 마땅한 의무야.”

구구절절 쓸데없는 소리가 길다. 김창이 알기로 한석구가 저딴 시답잖은 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건 그다음에 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기 위한 준비다.

그러면 이번엔 뭔 개소리를 하려 하는가? 그걸 알기 위해 한 가지 물었다.

“그래서 누구한테 돈 뜯으려고?”

“이 나라 대빵.”

그래, 그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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