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17화 (116/200)

117

* * *

역병 군주가 일으킨 전쟁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기오르가 죽고 난 후 역병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역병 군주의 군세가 각 도시에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무너졌던 성벽을 다시 세우고 불타버린 집을 다시 짓는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원탁은 물론이고 마탑까지 물심양면으로 전후 복구 작업에 힘을 보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말해서 원탁이 전후 복구 작업에 돈을 쏟아붓고 있는 건 솔직히 말해서 순수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한석구가 굳이 많은 돈을 뿌려가며 사람들을 돕는 건 주인 잃은 영지를 날름 먹어 치우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영지를 자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원탁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도 있다.

남들이 보면 속물적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한석구는 당당했다.

의도가 어쨌건 간에 결과만 괜찮으면 다 된 것 아니냐? 그래서 지금 저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게 누구지? 사람들이 속물적이라고 욕하는 나 아닌가?

한석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 그가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물론 한 나라의 왕에게 돈 뜯으러 가는 것에도.

“그렇게 당당하면 낮에 오면 되지, 뭐 하러 도둑놈처럼 밤중에 가는 거냐?”

모두가 잠든 어두컴컴한 밤. 한석구와 김창이 복도를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원래 왕은 미리 약속을 잡아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우린 약속을 안 잡았잖아? 애초에 왕실에 끈이 없으니 약속을 잡을 기회조차 없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밤에 몰래 만나러 가야지.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 다른 사람들 깨면 어쩌려고 그래?”

네가 목소리가 더 커. 김창이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얼굴을 긁적였다.

“제기랄, 이 복면은 대체 왜 쓰라는 거야?”

“넌 인상이 너무 험해. 내가 볼 땐 얼굴 드러내는 것보다 가리고 있는 게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럼 너는 왜 안 썼는데?”

“난 인상이 괜찮으니까.”

너랑 나랑 뭐가 다른데? 김창이 쏘아붙이려다가 참았다.

그는 지금 한석구와 함께 왕궁에 와 있었다. 방금 했던 대화처럼 당당하게 대낮에 찾아온 게 아니라 어둠을 틈타 왕궁 안에 숨어든 상태였다.

왜 그래야 하는지 한석구가 설명하긴 했지만 김창으로선 납득하기 어려웠다. 원탁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단체가 왕실과의 끈을 만들지 못할 리는 없을 텐데?

그 의문을 말했더니 한석구가 대답했다.

“원탁이 유명한 건 맞는데, 수도의 귀족들에게 있어서 우린 그냥 지방의 야만인 무리일 뿐이야. 수도 사람 외엔 전부 촌뜨기라고 생각하는 그치들이 우리랑 만나줄 것 같아?”

“몇 명 정도는 만나 주지 않을까?”

“그래, 만나 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 장담하는데, 네가 칼을 뽑든가 내가 마법을 날리든가 둘 중 하나야. 원래 수도 사람들이 좀 재수 없어.”

김창은 그게 한석구 개인의 의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내 뒤나 따라와. 정보에 따르면 왕의 침실은 이 근처인데······.”

두 사람은 어둠 속의 복도를 걸어 어느 방에 도착했다. 누가 보기에도 왕이 머물고 있다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문이 보였다.

왕의 침실답게 문 좌우에는 기사가 두 명이나 서 있었는데 그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전에 김창이 우드득 소리가 나게 목을 돌려버렸다.

“···죽인 거 아니지?”

“사람은 목 좀 돌아갔다고 안 죽어.”

“좀이 아니라 많이 돌아간 것 같은데······.”

한석구가 뭐라고 하든 말든 김창이 기절한 기사들을 구석으로 옮겼다.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던 한석구도 이제 자기 할 일을 했다. 그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더니 문고리를 살짝 잡았다. 순간 빛이 작게 반짝인 걸 보면 문에는 뭔가 마법이 걸려있는 듯했다.

“열었어. 가자.”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석구의 뒤를 따랐다. 침실 안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중년의 남자 하나가 자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기척을 죽이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목소리가 울렸다.

“웬 놈들이냐.”

그건 침대 위에서 나는 목소리였다. 분명 기척을 죽이고 다가갔는데 접근을 알아차렸다고?

도적인 하오성만큼 잠입술에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기척을 죽이는 것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침대 위에서 누군가 또 말했다.

“어찌 알아차렸는지 궁금한 얼굴이군. 몸에서 그리 짙은 피 냄새가 나는데 어찌 모르겠나? 내 그대의 이름은 모르지만 수없이 많은 목숨을 취한 수라와 같은 자라는 건 알겠다.”

김창이 한석구한테 물었다.

“나한테서 뭔 냄새 나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들켰으니까 불 좀 켭시다.”

한석구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그리 크지 않은 불꽃이었지만 방 안을 밝히기엔 충분했다.

김창은 침대에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에게 인사했다.

“안심하쇼. 강도는 아닙니다.”

아무리 막 나가는 인생이라도 왕한테 반말을 할 만큼 경우가 없진 않았다. 김창이 말하자 왕이 얼굴을 움찔하며 물었다.

“···얼굴에 복면은 왜 썼나?”

“얼굴 험악하게 생겼다고 이 친구가 쓰라던데. 혹시 불편하면 벗지요.”

김창이 복면을 벗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날카롭다 못해 서늘한 눈매와 자잘한 흉터를 보자 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써라.”

“괜히 기분 나쁜데.”

김창이 주섬주섬 복면을 다시 썼다.

“반갑습니다. 밤중에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원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왕한테 머리 조아리고 그런 건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혹시 불만 있어도 참으쇼.”

한석구의 껄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孤)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원탁의 이방인들이여.”

왕 역시 플레이어들의 악명에 대해서 익히 들었을 텐데 침착함을 유지하는 걸 보고서 김창이 작게 감탄했다.

역시 왕의 그릇은 다르다는 건가? 다른 귀족이었다면 괜히 소리 지르면서 난리 치다가 몇 대 얻어맞았을 텐데.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부탁 좀 하러 왔습니다. 얼마 전에 역병 군주라는 놈이 나타나서 설쳤던 건 아시지요? 그놈 정리한 게 우리고 뒷수습하는 것도 우린데, 이게 원탁만으로는 힘에 부치더군요. 원래 따지고 보면 이건 나라님이 하셔야 할 일인데 우리 같은 놈들이 하고 있으니 참 우스운 일 아닙니까? 뭐 그렇다고 임금님을 책망하는 건 아닙니다. 왕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일 뿐인데 온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다 해결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만.”

빈정거린다고 느껴서 화가 났나? 한석구가 흠 소리를 내는 가운데 왕이 말했다.

“뭘 원하는지 알겠다. 전후 복구를 위한 지원을 약속하지. 이러면 되나?”

아직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이토록 순순히? 한석구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국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왕이라고 해서 막 국고 마음대로 쓰고 그럴 수는 없지 않나? 전후 복구 비용 대려면 큰돈 들어갈 거고 그걸 귀족들이 그냥 쓰라고 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반대하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이건 해야 할 일인데. 그리고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고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어째서?”

왕이 싸늘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그러니 그들을 말이 없게 만들어.”

왕이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뭔가를 죽죽 써내려갔다. 그리고는 그걸 곱게 접어 한석구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종이를 받아 안쪽을 보니 웬 이름이 여러 개 쓰여 있었다.

“그건 고의 뜻에 반하는 자들의 이름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지. 고는 너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 그걸 줄 테니 너희도 고가 원하는 걸 바쳐라. 침묵, 그들에게 영원한 침묵을 내리고 너희의 가치를 증명해.”

흐릿한 어둠 속에서 왕의 안광이 번쩍이는 듯했다. 한석구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우물거렸다가 곧 웃음을 흘렸다.

“···보통내기가 아니시군.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

왕이 손을 뻗자 한석구가 맞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단단히 맞물렸다.

* * *

모든 게 불타고 있었다.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름다운 저택은 물론이요,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애써 가꾸었던 정원이 불길에 휩싸였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불길 속을 내달렸으나 그들 중 누구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허공에서 빠르게 날아다니는 다섯 자루의 칼은 그 누구도 살아서 도망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길은 거세졌고 시체는 늘어만 갔다. 다섯 개의 칼은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늑대처럼 허공을 떠돌길 반복했다.

“···너는.”

바닥에 널브러졌던 시체 중 하나가 몸을 들썩였다. 전부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자 다섯 개의 칼이 일시에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며 칼을 휘둘렀다.

“······큭!”

세 개의 칼은 쳐냈으나 나머지 둘을 쳐내지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뼛조각이 내장을 찔렀다.

황금의 아라비타스. 일곱 요정 대가문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이끌었던 요정은 칼 두 자루에 의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켈룩 소리를 내며 피를 토해내던 그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넌 누구냐······. 나는 긴 세월을 살았으나 너 같은 요정을 본 적이 없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났다. 요정답게 가벼운 발걸음이었으나 감히 얕잡아 볼 수 없는 기세가 있었다.

아라비타스는 한때 요정 기수 역할을 맡았을 만큼 뛰어난 전사였지만 저 요정에게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토록 강한 요정이 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다.

아라비타스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요정을 보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말하는 긴 세월이 어느 정도냐? 혹 수백 년의 시간을 말하는 거라면 넌 아직 애송이니라. 나는 천 년을 넘는 시간을 살아왔으니 너 같은 애송이가 날 모를 만도 하도다.”

천 년이라고? 아라비타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요정은 오래 살지만 천 년까지 사는 건 극히 드물다.

그 정도로 오래 살 수 있는 건 요정왕의 혈통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데. 하지만 요정 왕가의 일원 중에 저런 요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설령 요정왕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해도 다짜고짜 딜루키둠 가문을 습격할 이유가 뭔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요즘 애들은 역사 공부가 부족한 모양이군.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고.”

요정이 쯧쯧 혀를 차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려 다섯 자루의 칼을 모두 자기 주변으로 불렀다.

아라비타스는 문득 저런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또 하나 있던 걸 떠올렸다. 비록 칼 한 자루뿐이긴 하지만 김창도 저런 걸 할 수 있던데. 설마 관련이 있는 건가?

그가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요정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냐······. 설마 딜루키둠의 보물고가 목적이었던 거냐?”

“나는 한때 강처럼 흐르는 황금을 가졌고 보석이 열리는 나무를 길렀었지. 그런 내가 너희의 보물을 탐내겠느냐? 그런 건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도다. 내가 가지러 온 건 마땅히 내게 돌아와야 할 내 보물이니라.”

“네 물건? 딜루키둠의 보물고에 왜 네 보물이······.”

요정이 웃었다. 섬뜩한 웃음이었다.

“너는 알 것 없다. 아니, 곧 알게 되긴 하겠지만 말이야. 꼬마야, 기뻐해라. 내가 너에게 변덕스러운 자비를 내려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그럼 너는 가서 모두에게 전해라.”

성큼성큼 걸어 보물고의 문을 여는 요정의 두 눈이 녹색으로 빛났다.

“긴 시간을 건너, 승천할 자가 돌아왔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