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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으로 돌아온 한석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오성을 호출하는 것이었다.
“나 요즘 시키는 일 잘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또 왜······.”
하오성은 지난번에 극악한 죄인인 김대걸의 탈옥을 막지 못한 죄가 있으므로 한동안 한석구에게 감히 대들지 못했다.
원래 한량이었던 그가 한석구의 명령을 얌전히 듣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는데 요즘 들어 슬슬 마음 속에서 불만이 싹 트고 있었다.
내가 잘못을 한 건 맞다. 그러나 잘못에 대한 속죄는 충분히 하지 않았느냐? 나도 조금 있으면 영주 될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동네 똥개 부리듯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니고, PVP는 마법사보다 도적이 훨씬 우위에 있는데 내가 왜 빌빌 기어야 하나? 수틀리면 김창처럼 그냥 칼 꺼내고 확······.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야. 그냥 뭐 좀 시킬 일 있어서 그래.”
한석구가 종이 한 장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거기에 뭐거 적혀 있나 하고 봤더니 웬 이름들이었다.
죄 본 적 없는 이름들이었는데 뭔가 길고 복잡한 걸 보니 귀족의 이름이 아닌가 했다. 하오성이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한석구가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이름 잘 봐둬. 다 외웠나? 그럼 태워버리게 줘.”
하오성이 영문 모를 얼굴로 이름을 전부 외웠다. 그리고 종이를 다시 돌려주자 한석구가 불씨를 일으켜 종이를 재로 바꾸었다.
“뭘 시키려고······.”
“내가 알기로 도적은 게임 안에서 암살자 역할군이지. 어둠 속에 숨어 상대의 뒤를 급습하여 죽음을 선물하는.”
뜬금없는 소리에 하오성이 미간을 좁혔다. 한서구가 책상 위에 떨어진 재를 후 하고 불어 날리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아까 명단에 적혀 있던 사람들, 가서 죽여. 흔적 남기지 말고 싹.”
그 말을 들은 하오성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항상 한석구한테 굽실거리던 그 멍청한 얼굴이 아니었다.
날카롭다 못해 살기가 느껴지는 시선에 한석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왜? 너 원탁 생기기 전에 암살자 길드에서 일하지 않았나? 내가 돈 많이 줄 테니까 이상한 짓거리 하지 말고 와서 일 좀 도우라고 너 데려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설마 현장 떠난 지 오래됐다고 실력 녹슬거나 한 건 아니지?”
“···왜 나야? 이런 일 시킬 거면 김창한테 시켜도 되잖아.”
“걘 안 돼. 내 장담하는데, 걔한테 암살 임무 맡기면 마주치는 사람 죄 죽이고 올 거다. 그리고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 아니냐고 할 테지. 그런 건 안 돼. 내가 원하는 건 학살이 아니라 암살이야. 그리고 원탁에서 그걸 제일 잘하는 사람은?”
나지. 하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는?”
“네 영지는 향후 삼 년 동안 세금이 면제될 거다. 이건 국왕과 이야기를 마친 사항이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영지 부흥을 위해 이래저래 돈 들어갈 일이 많은 상황에서 삼 년 동안이나 세금이 면제된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큰 보상이다.
하오성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하면 돼?”
“가능한 빨리, 가능한 깔끔하게.”
“금방 소식 가져오지.”
하오성은 소리도 없이 방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심민우의 방이었고 사정을 이야기하고선 곧장 차원문을 통과했다.
그는 첫 번째 암살 대상이 있는 도시에서 밤이 되길 기다렸고, 태양이 자취를 감추자 바로 행동에 나섰다.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담을 넘어 완벽히 어둠과 동화했다. 영주궁 안에는 여러 병사가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하오성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듯 지나갔음에도 그들은 뭔가 지나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극한으로 단련된 은신술은 거의 인식 저해 마법 수준에 가까웠다. 때문에 사람들은 어둠 속에 숨은 하오성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보더라도 인식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 뭔가 있긴 있는데 그게 날카로운 칼을 든 암살자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덕분에 하오성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영주의 침실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도적답게 문의 잠금장치는 손쉽게 열어버리고 등 뒤에 달린 단검을 손에 들었다.
“레오스 백작······.”
죽여야 할 대상이 맞는지 확인하고서 망설임 없이 단검을 휘둘렀다. 곤히 잠들어 있던 레오스 백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다음.”
처리해야 할 대상은 총 여섯 명. 방금 하나를 해치웠으니 이제 남은 건 다섯이다.
“동이 트기 전에 끝나겠군.”
하오성은 처음 했던 일을 반복했다. 원탁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차원문을 열고, 영주궁에 숨어들어 영주를 죽이기.
너무나도 쉽게 목적을 달성한 그는 날이 밝아오기도 전에 모든 일을 끝마쳤다. 원탁으로 돌아온 그는 아침이 되자 곧장 한석구에게 찾아갔다.
“벌써 끝냈어? 역시 빠르네.”
한석구는 하오성이 밤새 여섯 명을 죽이고 왔다는 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내야 할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정도면 왕의 뜻이 충분히 전해졌겠지. 하룻밤 사이에 여섯 명이 죽었으니 귀족들도 몸을 사려야 할 거야. 오성아, 수고했다.”
한석구가 웃자 하오성이 말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귀족 여섯 명을 그냥 싹 죽여버리는 건······.”
“그런 질문은 사람 죽이기 전에 했어야지. 이미 다 죽였으면서 그런 질문은 해서 뭘 해? 뭔 일 생겨도 내가 알아서 해결하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영주 될 생각이나 해. 복자 말 들어보니까 영주 그거 생각보다 그리 좋은 것도 아니라더라. 그 왜 사람들이 왕이 되면 매일 일 안 하고 맛있는 거나 먹고 그럴 줄 알았는데 실제로 왕의 업무량이 어마어마해서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
쾅!
한석구의 이야기는 갑자기 열린 문소리에 의해 끊겼다. 한석구는 노크조차 하지 않고 멋대로 방 안에 들어온 무례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보려고 고개를 홱 돌렸다.
“티샬레?”
티샬레는 원탁의 정원사로 일하면서 웬만해서는 그 안에서만 지낸다. 누가 바깥으로 나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항상 그러고 있어서 한석구도 억지로 바깥으로 끌어내진 않았다.
그런데 나와도 된다고 해도 정원에서 나오지 않던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몹시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도 노크조차 하지 않고 다짜고짜 문을 열 정도면 뭔가 일이 있다고 봐야 했다.
한석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창이가 너 기어코 죽이겠대? 그래서 도망쳐 온 거라면 나도 어쩔 도리가······.”
티샬레가 한석구의 말허리를 자르고 말했다.
“김창 그 사람 어디 있어요?”
김창한테 죽을까 봐 도망쳐온 게 아니라 오히려 이쪽이 죽이려고 하는 건가? 솔직히 나도 걔 죽일 자신 없는데 얘가 대체 뭔 수로 그러려고.
한석구가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또 방랑벽 도져서 어디 간 건 아니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만날 수 있을걸? 그런데, 걘 또 왜 찾아?”
“저 좀 도와줘요! 그 사람이 있어야 해요!”
티샬레가 김창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김창은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전혀 못 하는 인간이지만 뭔가 부수는 건 잘 한다.
그러면 티샬레가 김창에게 부탁할 일이라고 해봤자 뻔하다.
“누구 죽이려고?”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구하려는 거죠. 아니, 어쨌건 구하려면 누구 죽이긴 해야 하는 건 맞는데······.”
“그래, 누구 죽이려는 건 맞잖아. 그래서 누구?”
“이름을 모르겠군요. 자기 말로는 뭔 승천할 자가 어쩌고 하던데 제가 봤을 땐 그냥 미친놈입니다. 그 요정은 다짜고짜 딜루키둠 가문에 나타나 일족을 학살하고 가주님까지 상처 입혔습니다. 가주님은 제게 소식을 전하고선 쓰러져 지금까지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하더군요······.”
티샬레가 주먹을 말아쥐는 걸 보고서 한석구가 허 소리를 냈다.
“너희 가문이 일곱 요정 대가문 중 하나랬지? 그럼 가문의 위세도 대단할 거고 가주 역시 제법 강할 텐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혹시 다른 가문에서 공격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 요정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습격자는 단 한 명이었습니다.”
“···한 명? 고작 혼자서 그럴 수 있을 리가?”
거기까지 말하고 한석구가 입을 다물었다. 티샬레는 아까 습격자가 승천할 자라고 말했다.
한석구는 하이나라는 승천할 자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었다.
만약 습격자가 정말 승천할 자라면 혼자서 요정 대가문을 습격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딜루키둠 가문의 기수로서,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하지요.”
티샬레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본 한석구가 흠 소리를 냈다.
“창이 혼자만 있으면 되나?”
“가능하다면 더 많은 사람을 데려갔으면 합니다······. 염치없는 소리인 건 알아요. 하지만 이건 단순히 딜루키둠 가문에 대한 습격만이 아닙니다. 의문의 요정은 다른 대가문을 공격하여 굴복시켰습니다. 일곱 대가문 중 네 개나 되는 대가문이 그 요정의 손에 넘어갔어요. 남은 세 가문만으로는 숫자에서 부족합니다.”
한석구로선 티샬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녀가 원탁에서 오래 지내긴 했어도 결국은 플레이어가 아니니까.
원탁의 수장으로서 한석구는 오직 플레이어의 안위만을 중요시한다. 고작 요정 대가문 따위를 위해서 원탁이 나서야 할 이유는 없다.
‘원래 큰돈 벌려면 큰판에 끼어야 하는 법이지. 티샬레 말 들어보면 이건 사실상 내전인데 이런 판에 끼면 돈을 얼마나 받을지······.’
지금이야 영지도 먹고 해서 세금을 거두고 있지만 원래 원탁의 주 수입원은 용병 일이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이래저래 돈 들어갈 일이 많은데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내버리긴 아깝다.
한석구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보상만 확실하다면야. 다만 우리도 여러 일이 있어서 사람 많이 못 빼. 대신 강한 놈들로만 추려갈 테니 실력은 확실할 거야.”
“도움을 주시겠다는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문으로 돌아가 있을 테니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티샬레가 꾸벅 인사하더니 얼른 자리를 떠났다. 정말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오성이 말했다.
“나 방금 막 한 건 뛰고 왔는데 또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안 가려고? 그럼 대타라도 하나 보내던지.”
대장이라고 밑에 사람 너무 부려 먹네. 하오성이 인상을 쓰다가 문득 말했다.
“대타? 지금 칼라드에서 놀고먹는 놈 하나 있지 않나?”
“산자이 말하는 거면 걘 다른 일 때문에 어디 좀 보냈어.”
“아니, 걔 말고. 하나 더.”
“누구?”
하오성이 대답했다.
“랭킹 2위, 주술사 황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