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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황금성. 너는 고등학생 때 수학 시간에 확률도 안 배웠냐? 무슨 승률이 5할이야.”
한석구가 타박하자 황금성은 왜 혼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불만스러운 얼굴이 됐다. 김창은 물론이고 티샬레까지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슬쩍 에리엇의 얼굴을 보니 그는 입을 살짝 벌리고 황금성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황금성의 무식한 발언에 말문이 막혀버린 걸까?
그러나 곧 열린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전대 기수였던 내 스승님이 자주 하신 말씀이 있지.”
에리엇의 얼굴은 진지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개소리하지 말라고 쏘아붙일 참인가?
스승의 이야기까지 들먹일 정도면 정말 그러려는 걸지도 모른다. 잘못하면 기분 상한 황금성 때문에 싸움이라도 일어나는 것 아닌가, 김창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리엇이 말했다.
“죽거나 죽이거나, 전사의 운명은 오직 둘 중 하나라고.”
다행스럽게도 에리엇이 황금성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말을 옹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싸움은 오직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지. 그래,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군. 겁쟁이가 돼버린 것처럼 전사로서의 운명을 잊고 있었던 거야.”
에리엇은 뭔가 깨달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인은 바보의 헛소리에서도 뭔가를 배운다고 했던가?
그는 결심이 섰는지 곧장 응접실을 나서며 말했다.
“가주님에게 다녀오지. 그리고 황금성? 이 겁쟁이에게 전사의 운명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해주어 고맙다.”
“음? 내가 뭘 했나? 어쨌든 내가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
황금성이 호탕하게 웃는 가운데 한석구와 김창이 한숨을 내뱉었다.
에리엇이 떠나고 나서 응접실에 남은 네 사람은 일단 휴식을 취했다. 원탁에서 온 세 사람은 딱히 지치지 않았으나 딜루키둠 가문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티샬레는 바람 꺼지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김창이 물었다.
“많이 지친 모양이지.”
“아, 네······. 아무래도 아라비타스 님이 쓰러지고 기수인 제가 가주 대행을 맡고 있는지라.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힘들기만 하군요. 하지만 기수로서 제 의무를 다할 생각입니다.”
“딜루키둠 가문의 피해가 상당한 것 같더군. 그에 비해 테네벨레는 아직 멀쩡한 것 같던데 습격자는 왜 딜루키둠을 노렸지?”
“그게······.”
티샬레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라비타스 님의 말씀으로는 습격자가 자신의 것을 찾으러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보물고를 확인해봤는데 사라진 건 낡은 술잔 하나였습니다. 그건 보물도 아니고 그냥 오래된 물건일 뿐인데 왜 하필 그걸 가졌는지 모를 일입니다······.”
김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신성을 가져갔군.”
“네?”
“신성을 가져갔다고. 습격자의 정체는 아마 천 년 전의 요정일 거다. 요안니스라고 하는데 한때 승천할 자였지. 그는 여러 물건에 담아뒀던 자신의 신성을 되찾으러 온 거야.”
“승천할 자라고요? 그것도 무려 천 년 전의? 아니, 요정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천 년을 살 수는······.”
티샬레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 소리를 냈다.
“···왕족이라면 가능하긴 하겠지만 요안니스라는 왕족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거야 요정왕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지. 그리고 요안니스가 흑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천 년을 살려면 왕족인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혹시 이 사실을 에리엇 님도 알고 있습니까?”
“요안니스라는 요정에 대해 조사하라고 하긴 했지. 하지만 별말이 없는 걸 보니 소득은 없는 모양이지만.”
티샬레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왜 저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지요? 에리엇 님은 왜 그 사실을 숨긴 겁니까?”
“숨긴 게 아니라 애초에 자기 자신부터가 그 말을 믿지 않은 거지. 그래서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네게 말하지 않은 거고. 천 년 전의 승천할 자가 이번 시대까지 살아남아 신좌를 노린다? 심지어 그 요정이 숨겨진 왕족이기까지 하다고? 믿기 힘든 소리긴 해.”
티샬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소리였다.
“···다른 네 가문이 그토록 쉽게 왕가를 배신한 이유가 있었군요. 상대가 정말 왕족이라면 정통성 역시 있을 테니.”
“아니면 힘으로 굴복시켰거나.”
승천할 자라면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티샬레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복도에서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났다.
한 명이 아니고 둘이었는데 이쪽으로 오는 듯했다. 잠깐 기다리니 곧 문이 열렸다.
아까 방을 나갔던 에리엇과 테네벨레의 가주인 비아스였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군.”
비아스가 김창을 보며 인사하자 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본 비아스는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다. 본래 요정은 늙지 않지만 지금 비아스의 얼굴엔 주름이 조금씩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게 지친 듯한 분위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쨌건 그가 지금의 상황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성큼성큼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비아스가 원탁의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움에 감사한다, 원탁의 전사들. 요정 왕국 내부의 일에 외부인의 손을 빌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이야.”
한석구가 원탁의 대장으로서 대답했다.
“공짜로 하는 일도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그래서, 직접 찾아온 걸 보니 그 결심이라는 게 선 모양이지?”
비아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적들의 세력은 사실상 우리의 두 배. 단순히 공성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전면전을 하겠다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굳이 설명할 것도 없겠지.”
비아스의 시선이 잠깐 황금성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생존이 아니라 승리니까. 전사라면 응당 무기를 들고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티샬레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말씀은···?”
“그래. 출정한다. 저 어리석은 배신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서.”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 티샬레, 비아스 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티샬레의 우렁찬 외침은 허세가 아니었다. 항상 웃기지도 않는 허세만 부리며 손해를 보던 그녀였지만 지금의 결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딜루키둠의 기수는 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불사를 것이다.
“출정은 일주일 뒤.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그리고 원탁의 전사들.”
비아스가 원탁의 세 사람을 바라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전공을 올리길 기대하지.”
솔직하게 말해서 비아스가 출정을 결정한 건 티샬레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정론이라고 해서 그게 항상 옳은 말인 것은 아니다.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적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건 목숨을 내버리는 일과 같으니까.
그걸 알고 있는 비아스의 마음이 바뀐 것은 역시 원탁의 지원 덕분이다. 이 세상에선 항상 힘의 논리만이 옳은 법이다.
“그럼 다들 쉬도록. 나는 이만.”
비아스가 에리엇과 함께 응접실을 나가자 티샬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가봐야겠습니다. 가문의 요정들에게 비아스 님의 결정을 알려야 하거든요. 여러분이 쉴 방은 아마 조금 기다리면 하녀가 와서 안내해줄 겁니다. 그럼 일주일 뒤에 뵙죠.”
요정들이 모두 떠나고 응접실에 남은 건 인간 셋뿐이었다. 황금성이 말했다.
“그러면 일주일 동안 여기 관광이나 좀 하고 있으면 되나? 원래 외국 나가면 카지노 한 번 가줘야 하는데 여기도 있으려나?”
있겠냐? 김창과 한석구가 쏘아보자 황금성이 목을 움츠렸다.
“그냥 해본 말이야······.”
황금성이 또 구박을 당하고 있는 사이에 하녀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가 세 명에게 방을 안내해주자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세 사람은 딱히 준비할 게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딜루키둠, 테네벨레, 아이테르. 세 개의 대가문은 병력을 이끌고 진군했다. 김창 일행은 어느 부대에 소속된 게 아니라 세 명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사실상 그 세 명이 한 부대 이상의 화력을 낼 수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배신자 놈들도 우리가 진군하고 있다는 걸 알 겁니다. 저쪽이 병력 상으로 우위에 있으니 아마 전면에서 깨부수러 들겠지요.”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티샬레의 말을 들으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루한 진군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적이 마음만 먹었다면 매복을 하거나 기습을 통해 이쪽을 흔들어 둘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을 걸 보면 정말 전면전에서 끝장을 볼 생각인 듯했다.
김창으로서도 그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괜히 잔꾀 부리지 않고 정면에서 싸우려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가.
다만 그 탓에 지루한 행군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거야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 일이다.
“조금 있으면 적이 보일 듯합니다.”
행군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난 시점. 정찰병이 저 멀리 적의 본대가 보인다고 알려왔다.
요정 전사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제 지루한 행군은 끝나고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될 차례였다.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누군가는 살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법이기에 그들은 그저 승리를 위해 싸울 뿐이다.
“···모두 정지.”
비아스의 말에 전 병력이 정지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척 보기에도 이쪽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보였다.
또한 왕가를 배신한 네 가문의 가주며 기수가 보였는데 그들을 보자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저 쓰레기 같은 놈들. 왕가를 수호하고 충성해야 할 의무를 잊었단 말인가? 아니면 충성할 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고르겠다는 뜻인가?
어느 쪽이든 불경한 짓거리다. 비아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티샬레, 에리엇, 투린.”
딜루키둠의 기수 티샬레, 테네벨레의 기수 에리엇, 아이테르의 기수 투린.
세 사람은 비아스의 부름에 응했다.
“너희는 저 배신자 가문의 기수들을 상대해라. 남은 한 명은 내가 직접 처단하지.”
“아닙니다, 가주님. 어찌 가주님이 직접 나서겠습니까? 제가 두 명을 맡지요.”
에리엇의 말에 비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황금성이 말했다.
“싸움이라는 것도 홀짝이 맞아야 하는 법이지. 그 기수인가 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하나 맡을게. 그러면 됐지?”
에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신은 아르겐툼의 기수를 맡아 주면 고맙겠군. 저기 깃발 든 사람들 중에서 제일 키가 큰 놈.”
“그러지 뭐.”
황금성이 비아스와 이야기하는 동안 한석구는 김창과 대화하고 있었다.
“우린 어쩔까?”
“어쩌고 말고 할 게 있나. 넌 그냥 마법이나 난사하면서 적 숫자나 좀 줄여.”
“저쪽에서도 날 우선적으로 제거하려 들 텐데.”
“쟤네가 뭔 재주가 있어서 널 제거해? 엄살 부리지 말고 열심히 싸워.”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넌 어쩌려고?”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김창이 고개를 돌려 적들을 쳐다봤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요정들이 점처럼 보였지만 그가 찾던 사람의 모습은 똑똑히 보였다.
두 눈이 녹색으로 불타고 있는 요정. 그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새끼, 쪼개기는.”
승천할 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 아무런 대화 하나 없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