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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가 그 요안니스인가 하는 놈이야?”
한석구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눈가로 가져갔다. 마력으로 강화된 시력이 저 멀리 떨어진 요안니스의 얼굴을 선명히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녹색의 머리카락과 불타듯 반짝이는 두 눈.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중성적인 외모를 가졌지만 칼을 든 손은 크고 단단하다.
저 요정은 학살자다. 천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온 지난 시대의 학살자.
“요정이란 게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저게 천 년도 넘게 살았다며? 그런데 얼굴 생긴 것만 나보다 동생인 것 같으니 참.”
“그건 네가 겉늙은 거야.”
“···내가 아무리 겉늙어도 천 년만큼 겉늙었겠냐?”
김창이 작게 웃더니 비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각 군대의 총사령관이 말을 타고 전장 한가운데로 나오고 있었다.
“아르겐툼의 타몬! 이 배신자 녀석! 권력이 그리 탐나더냐? 요정왕에 대한 충의를 모두 져버릴 만큼?”
타몬이라 불린 요정이 비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테네벨레의 비아스. 멍청한 녀석. 넌 딜루키둠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보고도 느끼는 게 없나? 시대는 변했다! 이젠 새로운 요정왕이 탄생할 때다! 너는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라! 나는 그 흐름 위에 탈 것이니!”
“새로운 요정왕이라고? 너는 누구인지도 모를 요정 놈을 단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왕으로 세울 셈이냐? 차라리 네가 직접 요정왕이 되겠다고 했으면 야망이 있다고 칭찬이라도 했을 텐데, 참 멍청하기 그지없군.”
“···놈!”
타몬이 분을 참지 못하고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걸 본 비아스 역시 무기를 꺼내며 비웃음을 날렸다.
“왜, 결투라도 해볼 셈이냐? 우리가 삼백 살 때였나? 네가 나에게 지고 바닥을 구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군. 그때보다 몇 백 년을 더 산 지금에도 그 치욕을 감당할 자신이 있나?”
“비아스! 이 모욕을 더는 참지 못하겠군! 결투다!”
요정 사회에서 결투는 신성한 의식이다. 누군가 결투를 신청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걸 알기에 비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일개 병졸의 입장이었다면 결투 신청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군대의 총사령관이다. 만약 자신이 질 리는 없겠지만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럼 군대의 지휘에 큰 차질이 생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저 건방진 놈의 결투 신청을 거절할 수는······.
“가주님이 직접 나설 것 없소. 저 늙은이는 내가 처리하지.”
아르겐툼의 깃발을 든 기수, 카리스가 말을 몰아 타몬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손에 든 창을 빙글 돌리더니 그 끝으로 비아스를 겨누었다.
“비아스 공,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그 상대는 내가 대신하겠소. 이분은 우리의 총사령관인지라. 만약 필요하다면 그쪽도 대타를 내보내도 괜찮소. 그게 결투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니.”
결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사정에 따라 대타를 내보낼 수 있다. 카리스는 지금 그 규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한시름 놨다고 해야 할까. 비아스는 안도한 티를 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에리엇······.”
“아니, 내가 하지. 저거 원래 내 상대잖아?”
대타로 나온 건 에리엇이 아니라 황금성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웬 인간 놈을 보고서 카리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인간···?”
“나 인간 맞는데 왜?”
“비아스 공,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단명종 따위가 어째서 여길?”
타몬이 빈정거렸다.
“질 것 같으니 단명종 용병이라도 부리는 모양이지. 하여튼 단명종 따위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넌 부끄러움도 모르나?”
비아스가 발끈하는 순간 황금성이 말했다.
“말 되게 많네. 입으로 싸우냐? 그만 주절거리고 덤벼. 아니면 인간한테 지는 게 두렵나? 그런 거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지.”
카리스가 부득 이를 갈더니 말했다.
“···후회하지 마라.”
“후회를 왜 해?”
“가주님, 그리고 비아스 공. 뒤로 물러나 주시오. 곧 결투가 시작될 것이니.”
두 가주는 카리스의 말에 따라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황금성이 히죽 웃더니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
“그러지.”
결투는 곧 시작될 터였다. 뒤쪽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티샬레가 김창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황금성이라는 사람, 얼마나 강합니까? 물론 원탁의 사람이니 당연히 강하겠지만······.”
“랭킹 2위야.”
“오, 그러면 원탁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는 소리로군요? 아마 그 순위는 당신을 빼고 정한 걸 테지만요.”
“근데 쟨 자기보다 약한 애한테도 지고 그래. 옛날에 PVP 대회가 있었는데 16강에서 떨어졌던가? 상대는 아마 랭킹 30위쯤이었던 것 같은데.”
티샬레는 PVP가 뭔지 모르지만 어쨌건 강함을 겨루는 대회에서 황금성이 일찍 탈락했다는 것만을 알았다.
그녀가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원탁의 랭킹 2위라면서요? 그런데 무슨 16강에서······.”
“주술사니까.”
대체 주술사가 뭐 어쨌길래 저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티샬레가 답답함을 느끼는 사이에 김창이 말했다.
“그런데 아마 황금성이 이길 거야.”
“그건 또 어째서요? 원탁의 랭킹 30위보다 아르겐툼의 기수가 더 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기수가 그 정도로 약하진 않을 텐데요.”
“아니.”
“그럼?”
“주술사니까.”
뭔 대답이 그래? 주술사니까 질 수도 있고 주술사니까 이길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런 건 전혀 대답이 되지 않는데.
티샬레가 입술을 깨물자 김창이 말했다.
“그냥 잠자코 봐. 황금성이 이길 테니까.”
티샬레는 결국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결투는 시작된 참이었다.
“금방 죽여주마!”
카리스의 특기는 마창술. 그가 말을 타고 거침없이 질주해 황금성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거대한 군마와 요정 기수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일격은 바위도 분쇄할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아무리 황금성이 원탁의 랭커라고 해도 저 일격을 정면에서 받아내면 몸에 구멍이 뚫릴 게 분명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황금성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말을 몰아 카리스 쪽으로 질주했다.
‘무기도 들지 않고 정면에서 맞서겠다고? 제정신이 아닌 놈이군.’
두 마리의 말이 서로를 향해 질주했다. 이대로면 충돌한다. 카리스의 창이 황금성의 몸을 그대로 꿰뚫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황금성이 말의 머리를 홱 틀어서 방향을 바꾸고선 자신은 말의 등을 밟고서 하늘 위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뭣?”
달리는 말에서 뛰는 것은 위험천만한 짓이다. 숙련된 기병조차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텐데 이 미친놈은 대체 뭔가?
카리스는 당황하면서 내질렀던 창을 회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자신 쪽으로 뛰어든 황금성의 주먹이 얼굴에 꽂혔다.
“크악!”
뼈가 부러질 듯한 충격과 함께 카리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금성은 낙법을 취해 그다지 다치지 않았지만 카리스는 바닥에 그대로 떨어져 몸 전체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그나마 갑옷을 입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 위안일까? 카리스가 이를 갈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놈!”
카리스가 바닥에 떨어트린 창을 손에 쥐고서 황금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황금성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두 주먹에서 하늘색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뭔가를 했다는 걸 알았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카리스는 베르고니아 못지 않은 창의 명수였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합을 내지르자 창날에 녹색의 빛이 맺혔다. 오러였다. 상대가 갑옷을 입고 있더라도 통째로 분쇄할 수 있는 힘.
황금성은 이걸 막아낼 수 없다.
그럴 줄 알았다.
“뭐냐, 그건?”
황금성의 주먹과 카리스의 창이 충돌했다. 원래라면 주먹이 우그러지고 뼈가 갈려 나가며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 따윈 없었다. 황금성은 재빠르게 창을 쳐내면서 오히려 이쪽을 압박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건틀릿을 꼈다고 해도 오러로부터 무사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맨손으로?
아니다. 맨손이 아니다. 황금성의 주먹에 맺힌 저건······.
‘오러는 아니야. 그냥 단순히 마력을 몇 겹이고 중첩한······.’
주먹으로 한 대 후릴 때마다 묵직한 충격이 느껴진다. 마치 주먹이 아니라 공성추로 후리는 듯한 느낌.
하지만 아무리 마력을 중첩했다고 해도 이런 위력이 나오는 게 가능한 것인가? 대체 마력을 얼마나 중첩했기에?
카리스는 연달아 날아오는 공격에 오직 방어에만 집중해야 했다. 반격을 하려고 하면 황금성이 그럴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연신 주먹을 날렸다.
‘제기랄, 이대로 가면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한다······.’
아무리 방어를 하고 있어도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다. 공격을 막는다고 해서 모든 충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카리스는 지금 자신의 몸에 충격이 상당히 누적된 상태라는 걸 알았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혹시나 크게 당하더라도 기회를 노려야 했다.
‘마침 주먹의 빛도 희미해지고 있으니.’
마력이라는 건 유한하지 않다. 황금성의 주먹을 감싼 마력이 점차 희미해지는 순간에 카리스가 창을 휘둘렀다.
창날이 주먹과 부딪치자 황금성이 작게 신음을 흘리는 게 보였다. 마력의 양이 줄어들면서 더는 오러로부터 손을 보호할 수 없게 된 탓이다.
됐다. 이거라면 반격할 수 있다. 드디어 공세를 잡은 카리스가 벼락처럼 창을 내질렀다.
“큭!”
먹혔다. 이번에는 확실히 자신의 차례다. 카리스가 사나운 미소를 흘리며 황금성을 향해 돌격할 때였다.
“마력 중첩 5연속.”
마력 중첩? 그러면 아까 그 막대한 양의 마력이 다시 주먹에 모인단 말인가? 카리스가 입술을 깨물며 다리를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 전에 끝내야 한다.
“죽어라!”
황금성이 주먹을 내질렀다. 카리스의 창이 공기를 찢으며 질주했다. 주먹과 창이 부딪쳤다.
“···씹.”
서로 다른 두 개가 충돌하면 하나는 부서지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실패했네.”
황금성이 너덜너덜해진 팔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살갗이 벗겨진 주먹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실패했다? 설마······.’
카리스는 공격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지 않았다. 몸은 전투의 열기로 뜨거웠지만 머리는 그 어떤 때보다 차가웠다.
‘그렇군. 마력 중첩이라는 건 말 그대로 마력의 중첩. 한 번 중첩할 때마다 실패할 확률이 있고 많이 중첩할수록 실패 확률이 커지는 것이군. 그리고 방금 저 단명종 놈은 내 공격을 막기 위해 다섯 번 연속으로 중첩하려 했고, 실패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오러를 상대하기 위해선 다섯 번은 중첩할 필요가 있다는 뜻······.’
잘은 몰라도 마력을 다섯 번까지 중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터다. 원래라면 황금성도 그런 무식한 횟수를 중첩하지 않았을 테지만 위기 상황이라 도박수를 던졌으리라.
‘다섯 번은 실패할 확률이 크다. 그건 다시 말해서 저 단명종이 내 오러를 받아내지 못하겔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
아마 처음에 마력 중첩을 다섯 번이나 성공한 건 운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운이 따르지 않았다.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를 행운에 기대어 마력을 낭비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저 녀석은 이제 세 번의 중첩 정도로만 싸우겠지. 그 정도는 실패할 확률이 낮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날 이길 수 없어!’
카리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가 크게 웃으며 창을 내질렀다.
“마력 중첩 5연속.”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였다. 카리스가 더 크게 웃으며 창을 휘둘렀다. 황금성의 몸은 튼튼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강철은 아니었다.
몸 곳곳에서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마력 중첩 5연속.”
실패.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황금성이 또 말했다.
“마력 중첩 5연속.”
실패.
“마력 중첩 5연속.”
실패.
“마력 중첩······.”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황금성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답답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카리스는 연신 무기를 휘두르다 말고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 정신 나간 놈! 대체 언제까지 그것만 하고 있을 셈이냐! 하루 내내 그러고 있을 거냐! 적당히 하고 싸워! 싸우라고! 꼭 다섯 번까지 중첩하지 않아도 싸울 수 있잖아!”
그 외침에 황금성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뭔 개소리야. 다섯 번이 아니면 의미가 없잖아.”
“오러 때문이냐? 다섯 번이 아니면 오러를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인 거냐?”
“오러? 아니, 그건 세 번만 중첩해도 막을 수 있을걸.”
이걸 세 번의 중첩으로도 막을 수 있다고?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서, 그럼 대체 왜 다섯 번의 중첩을 고집한단 말인가?
카리스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황금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기억해라. 정배로 돈을 딸 바에야 역배로 잃는 거다.”
광기다. 이건 광기야. 도박에 미친 놈도 저딴 식으로 말하진 않으리라. 카리스는 이제 저 미친놈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짜 두려움은 황금성의 다음 말에서 나왔다.
“마력 중첩 10연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