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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사는 전사와 마법사의 하이브리드 캐릭터고 주술사는 무투가와 마법사의 하이브리드 캐릭터다.
게임 속에서 하이브리드 캐릭터라고 하면 각 캐릭터의 장점만 가져오거나 아니면 단점만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마검사와 주술사는 바로 그 두 경우에 해당했다.
전사와 마법사의 장점을 모두 가진 마검사는 강력한 근접전 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마법으로 여러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대규모 업데이트 기념으로 추가된 캐릭터답게 남들보다 훨씬 신경 쓴 모델링, 그리고 멋있는 설정 덕분에 특히나 더 인기가 많기도 했다.
그러면 주술사는 어떤가? 마검사와 똑같은 하이브리드 캐릭터인 만큼 인기도 많고 성능도 우월했을 것인가?
아쉽게도 아니었다. 주술사는 게임 초기 때부터 존재했던 캐릭터지만 언제나 인기가 없었다.
무투가의 단점과 마법사의 단점만 가졌기 때문에? 그건 아니었다. 게임 초기 캐릭터가 으레 그러하듯 밸런스에 약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아주 쓰지 못할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니까.
그럼 왜? 답은 간단했다. 마력 중첩 때문이다.
주술사는 모든 스킬에 마력 중첩이라는 걸 쓸 수 있다. 말 그대로 마력을 중첩하여 데미지를 올리는 것인데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애초에 마력 중첩을 사용하는 걸 전체하고 스킬의 데미지를 책정했기 때문에 기본 데미지가 너무 낮다.
두 번째 문제는 마력 중첩에는 실패 확률이 있다는 것이다. 너무 낮은 기본 데미지 때문에 마력 중첩을 꼭 해야 하는데 이게 실패할 확률이 있다는 게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이 두 가지 문제가 서로 복합적인 시너지를 일으켜 주술사는 똥캐라는 낙인이 찍혔다.
캐릭터에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도 구제를 해줘야 하는 법인데 운영진은 마력 중첩이 주술사의 상징이기 때문에 절대 건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그러니 주술사는 비인기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랭킹에서도 주술사 캐릭터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단 한 명, 랭킹 2위의 황금성을 제외하고선.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말을 한다. 황금성은 주사위 같은 사람이라고.
주사위 눈 1이 나왔을 때는 누구한테나 질 수 있지만.
“어이, 귀쟁이.”
주사위 눈 6이 나왔을 때는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설마.”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친다. 단순히 주먹에만 마력이 모이는 게 아니라 전신에서 마력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 전부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바로 가까이서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색 마력은 마치 갑옷처럼 황금성의 몸을 감싸고 접근하는 모든 것을 분쇄했다.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굴러온 돌멩이가 마력에 부딪혀 고운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넌 뒈졌다.”
카리스는 황금성을 보고 깨달았다. 열 번의 마력 중첩에 성공한 지금, 황금성은 무적이나 다름이 없다고.
저걸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정면에서 분쇄하거나, 아니면 마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버티거나.
‘어느 쪽도······.’
카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 쪽도 해낼 자신이 없다. 잘은 몰라도 열 번의 마력 중첩에 성공한 황금성은 승천할 자와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게 겨우 몇 분 수준이라고 해도, 그 몇 분이면 자신을 몇 번이나 갈아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와라, 끝을 보자.”
카리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의 도발을 듣고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치 맹수를 만난 초식 동물처럼 그대로 얼어붙어 멍하니 있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기회 줬다. 네가 안 온 거야.”
바닥을 박차는 소리를 듣고서 카리스는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땐 이미 황금성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입술을 세게 깨물며 다급히 눈알을 굴려보지만 황금성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카리스가 황금성의 위치를 알게 된 것은 묵직한 주먹이 투구를 부수고 얼굴에 꽂힐 때였다.
비명을 지를 수조차 없었다. 광대뼈가 무너져 내려 입 안에 자꾸만 피가 고였다.
저도 모르게 벌린 입술 사이로 피가 줄줄 흘렀다. 카리스는 연신 자신의 몸을 두드리는 주먹에 숨 쉴 틈도 없이 얻어맞기만 했다.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뿐이다. 너무 얻어맞아서 이젠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하도 맞아서 몸이 으스러지기 직전인데 너무 많은 고통이 한꺼번에 느껴지니 오히려 뇌가 그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끝이다.”
황금성이 주먹을 들었다. 타오르는 듯한 마력이 카리스의 얼굴에 직선으로 꽂혔다.
역시나 비명은 없었다. 카리스의 얼굴은 그 자리에서 터져 버렸고 남은 몸은 비틀거리다 힘없이 아래로 쓰러졌으니까.
싸움은 그걸로 끝이었다.
“휘유, 오랜만에 땀 좀 뺐네.”
열 번 중첩됐던 마력이 서서히 사라지고 황금성이 몸을 한 번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의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봤던 비아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놀라운 실력이군······. 하지만 그 싸움 방식은 너무 위험하지 않나?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물론 위험하지. 목숨 걸고 하는 일이야.”
“그런데 왜? 내가 볼 때 열 번 중첩까지 갈 필요도 없었을 것 같은데. 세 번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목숨은 말이요, 따서 갚으면 돼.”
“···뭐?”
“따서 갚으면 된다고. 방금 봤잖아. 목숨 걸어서 목숨 딴 거. 그러면 된 거 아니야?”
제정신인가? 비아스가 질렸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황금성이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럼 난 잠깐 뒤에서 마력 회복하고 있을 테니까 위험해지면 부르시고. 곧 전쟁 시작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내가 기선 제압 확실히 한 거 맞지?”
비아스가 고개를 돌려 카리스의 시체를 보았다. 배신자 세력에서 가장 강대한 가세를 지닌 아르겐툼의 기수의 머리통을 날려버렸으니 기선 제압은 확실히 됐을 것이다.
“···그래.”
비아스가 다시 말을 몰고 전진했다. 그가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서 크게 소리쳤다.
“봤느냐! 배신자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다! 목숨이 아까운 자는 투항하라! 외압에 이기지 못해 자신의 충심을 숨겨야 했던 자들 역시 투항하라!”
배신자 군대에서 술렁임이 나오긴 했지만 투항하는 자들은 없었다. 멍청하 놈들. 비아스가 쯧 하고 혀를 찬 뒤에 다시 소리쳤다.
“내 마지막 자비를 걷어차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군! 이제 너희가 맞이할 건 죽음뿐이다! 오직 죽음! 용맹한 전사들이여! 저 한심한 배신자들을 섬멸해라!”
명령이 떨어지자 군대가 진격했다. 배신자 군대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대강 보기에도 적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들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창백한 빛이 번쩍였다.
“끄아아악!”
“마법사다! 마법사가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이······.”
빛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적들이 뭉텅이로 사라졌다. 일개 마법사가 부린 마법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말도 안 될 정도의 위력이라 적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요격해! 우리도 맞대응하라고!”
“마법사 부대!”
“쏴라!”
당연한 말이지만 배신자 군대에도 마법사 부대가 있었다.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요정답게 마법사 역시 인간 마법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법사 부대가 한석구의 마법에 대응하려 들었다. 일부는 공격을,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방어를.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려 드는 건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단지 상대가 규격 외의 강자라는 게 문제였을 뿐.
“보호막이 뚫린다!”
“마력을 더 짜내!”
“공격 멈추고 전부 다 보호막에 붙어! 이대로면 다 죽는다!”
한석구의 화력은 마법사 부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공격 대신에 방어에 매달려야 했다.
“다들 열심히 싸우고 있군.”
김창은 뒤에서 전장을 관망하고 있었다. 티샬레와 에리엇, 그리고 투린은 각자의 상대를 찾아갔고 비아스는 열심히 병력을 지휘하는 중이었다.
남들 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놀고 있을 수는 없다. 돈을 받았으면 그만큼 일해야 한다는 게 김창의 지론이기에 천천히 전장 속으로 걸어갔다.
전장이라는 곳이 으레 그러하듯 이곳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아군과 적이 한데 모여 소리를 꽥꽥 지르며 무기를 휘두르고 있으니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긴 어려웠다.
일단 가까이 오는 놈이 있으면 무기부터 휘두르고 보는 곳이 바로 전장이다. 김창이 설렁설렁 전장 위를 걷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적들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칼을 뽑지 않았다. 그냥 걷고만 있어도 적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미친 칼이다!”
하늘을 나는 칼은 김창의 주변을 맴돌며 적들을 하나씩 쓰러트리고 있었다. 마치 제 주인에게 다가가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위협적으로 굴었다.
칼은 무생물인데 의식이 깃들 수도 있나? 아니면 저게 요도라서 조금 특별한 것일지도······.
김창이 혼자 생각하며 걷고 있으니 어느새 그의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건 하늘을 나는 칼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요정 때문이기도 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 그러나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살기를 내뿜고 있는 초록색 머리카락의 요정.
김창은 저 요정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바로 알아봤다.
그건 요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봤다고 해도 서로를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런 운명이었다. 승천자의 규율에 매여 단 한 명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를 두고 다퉈야 할 운명.
“구구절절한 자기 소개할 필요가 있나?”
요안니스가 씩 웃었다.
“성질이 급한 놈이로고. 나는 승천자가 되기 위해 무려 천 년을 기다려왔노라. 요정에게 숫비 년의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천 년은 너무나 길지. 그런 나에게 잠깐 몇 분의 시간조차 내주지 않을 셈이냐?”
혓바닥이 왜 이리 길지? 우리가 뭐 친목 다질 사이도 아니고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데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김창은 짜증스러웠지만 그래도 곧 죽을 놈을 위해 잠깐의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지껄여봐.”
“말투가 참으로 천박하구나. 하기야 열등종 놈이 다 그런 법이지. 너는 모르겠지만 천 년 전의 승천할 자들 사이엔 싸우기 전 지켜야 할 법도가 있었느니라. 지금은 세월의 흐름 속에 잊힌 옛 법도지. 하지만 나는 그 시절에 살았던 요정이요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요정이니 그것은 옛 법도가 아니라 지금도 지켜야 할 법도라고 하겠다. 그러니 너는 무기를 들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며 신성한 법도에 따라······.”
챙!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줄곧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요안니스가 사납게 소리쳤다.
“너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냐? 어찌 감히 결투의 시작을 알리기도 전에 이딴 짓을?”
김창은 당당하게 말했다.
“지껄이라고 했지, 들어주겠다고는 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