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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창이 늘 하던 말이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고? 죽으면 죽는 거지, 뭘 호들갑이냐?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땐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만큼 개소리인 게 없었다.
죽으면 그냥 죽는 거라고? 천수를 누리고 안락한 침대 위에서 따스한 죽음을 맞는 거라면 그 말도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창은 칼밥 먹고 사는 칼잡이고, 지금껏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전사였다. 그런 그에게 안온한 죽음 따위는 없었다.
그가 죽을 곳은 언제나 전장 위였고 죽음은 항상 고통스러웠다.
몸 곳곳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뼈가 부러지고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태가 되니 이제야 깨달음을 얻었다.
죽으면 그냥 죽는 게 아니다. 더럽게 고통스럽게 죽는 거다.
이쯤 되니 내가 지금까지 죽였던 놈들에게 새삼 미안해지네. 김창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죽었냐?”
그의 시야 끝에는 요안니스가 있었다. 완전히 뻗어서 바닥에 드러누운 자신과 다르게 그는 두 발로 선 채였다.
물론 그의 몸은 땅에 꽂은 칼에 의지하고 있긴 했다. 그래도 완전히 뻗은 이쪽과 달리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괴물 새끼. 아직 살아 있냐. 하기야 천 년이나 버텼던 놈이니 그 생존력 하나는 알아줘야겠네.”
김창이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관절이라는 관절이 전부 삐걱거리고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원래라면 숨이 붙어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태였다. 아무리 승천할 자라고 해도 그만한 격돌 속에서 목숨을 건진다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요안니스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남았다.
“괴물이라는 말은 섭섭하구나. 그러는 너 역시 아직 숨이 붙어 있지 않으냐? 심지어 그 밉살스러운 주둥이까지 나불대고 있지.”
요안니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천 년의 시간 동안 숨죽여 지내며 여러 승천할 자들을 봐왔다. 시간의 그림자 속에 숨어 언젠가 저 목에 칼을 꽂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나는 이번 시대에는 분명 내가 신이 되리라 생각했도다. 어째서인 줄 아느냐?”
“몰라, 씹새야.”
“이 시대의 승천할 자는 하나 같이 죄 약해빠졌으니까. 칼잡이야, 천 년 전에는 승천할 자가 몇이나 됐는지 아느냐? 그땐 열다섯이었다. 무려 지금의 두 배가 넘는 숫자였지. 그 시절엔 항상 전쟁과 투쟁의 연속이었으나 나는 살아남았다. 싸우고 또 싸워 항상 승리만을 쟁취했으며 기어코 내 손으로 네 명의 승천할 자를 죽였노라.”
열기가 묻어나던 요안니스의 목소리에서 슬며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승리했으나 마지막까지 그러진 못했다. 한 번, 고작 한 번이었으나 그 한 번이 내 모든 걸 빼앗았다. 나는 추한 비겁자가 되어 시간 속에 숨어야만 했지.”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김창은 쿨럭쿨럭 기침했다. 칼을 땅에 꽂고서 버티지만 몸이 금방이라도 아래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천 년의 시간 뒤에 숨어 지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걸 지켜봤다. 옛 시대의 잔해가 시간의 사토 속에 묻히고 이번 시대의 신좌를 두고 다툴 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 나는 마지막으로 탄생할 승천할 자가 분명 용이리라 생각했노라. 날 때부터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신성을 얻을 수 없어 승천할 수 없는 비운의 생물 말이다.”
김창은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기억을 더듬었다. 용이라면 제 부하를 시켜 신성을 얻으려고 하던 놈이 하나 있지 않았나? 그리고 내가 난쟁이를 죽여서 신성을 홀랑 집어삼켰고.
“용 바르토시스. 일찌감치 승천을 체념한 다른 용들과 달리 신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지 않았던 용. 그는 자신의 소원을 거의 이루기 직전까지 갔지. 갑자기 나타난 신성의 찬탈자만 아니었다면.”
내 이야기로군. 그 용 이름이 바르토시스였나? 김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친구냐? 그러면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인사 좀 전해줘라.”
“건방진 놈이로고······. 어쨌건 나는 이번 시대에 나를 상대할 적수가 있다면 분명 바르토시스이리라 생각했노라. 그러나 네 존재 때문에 그는 이번에도 승천할 자가 되지 못했지. 그리고 그의 승천을 가로챈 네가 이 자리에 섰으니 결국 내 생각도 아주 틀리진 않았다고 해야겠구나······.”
요안니스가 쿨럭 기침하더니 걸쭉한 핏물을 토해냈다. 그는 원래 흰 얼굴을 가진 요정이었으나 지금은 희다 못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창이 그랬듯이 그 역시 승부의 충격으로부터 무사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확신했다. 바르토시스가 신성을 얻더라도 결국 날 이길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지. 다른 승천할 자들 역시 강하긴 하나 내가 살던 시대의 적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내 오만이었구나. 이것은 내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 승리의 과실이 입 안에 들어왔는데도 기어코 뱉어 버리고 마는 못된 습성.”
그 말대로였다. 요안니스는 훨씬 더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정면 대결을 했고 결국엔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승리하지 못했다. 이번 시대에도.
“나는··· 무얼 하고자 했던가······. 신이 되길 바랐나? 아니면 나는······.”
바닥에 쓰러졌던 김창이 다시 선 것과 반대로 두 발로 섰던 요안니스는 힘이 다한 것처럼 아래로 쓰러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상황은 역전됐다. 쓰러졌던 자가 일어서고 일어섰던 자가 쓰러졌다.
승부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창은 이겼고 요안니스는 졌다. 스스로도 느낀 것이지만 그건 한 끗 차이의 승부였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았으며 누가 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승리한 게 자신이 아니라 요안니스라고 하더라도 김창은 그 결과에 겸허히 승복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그랬다. 그들이 그저 덤덤히 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건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 죽여라······. 천 년의 시간은 너무 길었다. 이제 나는 옛 시대의 승천할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의 토사 속에 묻혀야 하노라······.”
바닥에 쓰러진 요안니스의 목소리가 웅얼대는 듯 불분명했다. 그건 그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탓이었다.
김창은 땅에 꽂았던 칼을 뽑아 요안니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가 이어지다가 멈췄다.
요안니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허무하구나. 이토록 허무한 줄 알았으면 그냥 천 년 전에 죽는 것을······.”
요안니스가 눈을 감았다. 그는 바람의 흐름을 통해 김창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칼 든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그대로 휙.
“눈 떠.”
고통은 없다.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으며 호흡 역시 멈추지 않았다. 승천할 자인지라 칼 찔렸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요안니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고 김창을 쳐다봤다. 칼은 땅에 박혀 있었다.
“너 뭘······.”
“갑자기 마음 변해서 너 살려주거나 그러려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원래 그런 거 아주 싫어하거든? 그런데 굳이 너 안 죽인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지?”
말하면서 요안니스는 자신의 몸에서 점차 신성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대로 김창의 몸에선 신성이 불어나고 있다는 것도.
“죄지었으면 벌 받는 게 세상 이치 아니냐? 솔직히 내 마음 같아선 그냥 네 목 치고 끝내는 게 제일 깔끔한데, 그거야 내 생각일 뿐이니까 남들한테도 그러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살아서 벌 받아. 만약 너 죽인다고 해도 그건 내 몫이 아니야.”
요안니스는 아아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지은 죄가 있단 말이지. 하기야 내가 같은 요정을 좀 많이 죽이긴 했지······.
“그리고 혹시 아냐? 이번에도 살아남아서 다음 시대엔 정말 신이 될 수 있을지······.”
그 말을 듣고서 요안니스가 크게 웃었다. 뼈마디가 쑤시고 웃을 때마다 근육이 찢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웃었다.
“네게 모든 신성을 빼앗겨 아무것도 아닌 요정이 된 몸으로?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글쎄······.”
김창은 자신의 내면에 막대한 양의 신성이 깃드는 걸 느꼈다. 마치 작은 태양이 몸속에 생긴 것처럼 끝없이 빛을 뿜어내는 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사지 말단까지 그 감각이 공유됐다. 너무 많은 감각을 일시에 느끼면 사람의 머리가 고장이 난다던가?
김창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알 수 없었다. 이미 뇌는 그 생각조차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네가 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
그 말을 끝으로 김창의 몸이 다시 아래로 쓰러졌다.
반신이 되어 처음 마주한 세상은 온통 흙색이었다.
* * *
“그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세요. 덕분에 가문의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됐으니.”
요안니스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회색의 벽뿐이었으나 그의 시선은 그 너머에 있는 밤하늘의 별을 향해 있었다.
“갠 그냥 돈 받고 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 뭐 어쨌건 말은 전해둘게. 그런데 이제부턴 좀 바쁘겠어? 듣자 하니 네가 새롭게 가주가 됐다고 하던데.”
“네, 아라비타스 님의 부상이 심하여 딜루키둠의 기수였던 제가 가주 자리를 잇게 됐습니다. 의장님, 원탁의 도움에는 다시 한번 감사드리지요. 저희 딜루키둠은 원탁의 혈맹이며 그 어떠한 때에도 원탁의 부름에 응하겠노라고 맹세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하면 우리가 너무 부담스러운데. 뭐 말만 들어도 든든하긴 하네. 그러면 나는 일단 원탁으로 돌아갈게. 이래저래 밀린 일이 많아서.”
“그러시지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남자 하나가 사라졌다. 요안니스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생각했다.
이름이 한석구라고 했던가? 원탁의 의장인가 하던데 제법 대단한 마법사긴 해도 딱 그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같이 있던 여자 요정은 티샬레였나? 딜루키둠 가문의 기수였다고 했었지······.
“뭘 쳐다보는 거지? 내가 그 증오스러운 눈을 뭉개버리길 바라는 건가?”
싸늘한 목소리는 티샬레의 것이었다. 요안니스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로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생각해봤다.
김창과 싸우고, 또한 졌다. 그리고 신성을 빼앗겨 죗값을 치르기 위해······.
“아, 여긴 딜루키둠의 감옥이로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지? 그런 걸로 내 동정심을 바라는 거라면 헛수고다. 나는 우리 딜루키둠이 경험했던 모든 고통을 네게 되돌려줄 생각이니까. 기억해라, 나는 딜루키둠의 티샬레다. 또한 복수의 집행자이기도 하지.”
요안니스는 티샬레를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 그런대로 기백이 있긴 하군······.
“내일을 기대해라. 끝없는 고통이 이어질 테니.”
티샬레가 싸늘한 말을 남기고서 감옥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감옥을 밝히고 있던 횃불도 빛을 잃었다.
차디찬 공간 속에 혼자 남게 된 요안니스는 몸을 움직이려다 비명을 삼켰다. 사지가 완전히 부러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한때 반신의 경지에 올랐던 존재가 붙잡힌 짐승과 같은 꼴이라니. 너무나도 비참한 상황이었지만 요안니스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김창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또 살아남아 다음 시대의 신을 노려보라고······.’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미 한 번 비굴하게 살아남았던 몸이도다. 한 번 그랬다면 두 번도······.’
자신은 정말 신이 되길 바라는 걸까? 그래서 이번에도 기어코 살아남아 세 번째 도전에 나설 것인가?
모르겠다. 이대로 잠길 것인가, 아니면 다시 떠오르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칠 것인가.
요안니스는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시야가 어두워지며 정신 역시 저 아래로 침전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끝없는 어둠 속을 배회하던 정신은 생각지 못한 불청객에 의해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다.
“반신 요안니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감옥 속. 어둠에 숨은 자가 요안니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는······?”
“꼴이 우습군. 이 시대에 가장 신에 가까이 다가갔던 자가 지금은 날개 부러진 새 신세라.”
묵직한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요안니스는 이제 신성을 잃어 어둠 속을 볼 수 없었지만 검은 장막 너머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 나를 비웃으러 온 게냐? 그런 거라면 헛수고로다. 나는 이미 모욕에 익숙하니.”
“안타깝군. 너는 원래 내 사냥감이었는데. 가장 맛있는 건 아껴먹으려고 남겨두고 있었는데 웬 잡놈에게 빼앗길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잡놈에게 네가 지리라곤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고.”
“가장 맛있는 걸 아껴두고 있어? 하하하, 날 웃겨 죽일 셈이냐? 너는 그저 내가 두려워 지금껏 숨어 있던 게 아니냐? 이번 시대의 승천할 자 중에는 내 상대가 될 자가 없다!”
“신성을 잃더니 눈까지 멀어버린 거냐? 날 봐라,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깨달아.”
요안니스는 억지로 눈을 떠 불청객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성난 듯 일렁거리는 거대한 신성과 마주했다.
“너 설마······.”
“왜, 이번 시대에 반신의 격에 오른 게 너 하나뿐일 줄 알았나? 과연 요정다운 오만이로군. 그런 오만에는 벌이 필요하겠지.”
요안니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반신의 존재를 느꼈다.
“더 추해지기 전에 죽어라, 옛 시대의 망령.”
죽음은 소리도 없이 찾아왔다. 불청객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