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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졌던 김창이 깨어난 건 싸움이 있던 날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뭐야.”
쓰러져 병상에 누운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김창 역시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났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간절함도 줄어드는 법이라 그가 쓰러진 첫날에는 구름처럼 모였던 사람들도 한 달이 지난 지금엔 아무도 없었다.
때때로 방 안을 청소하고 꽃병의 물을 갈기 위해 들어오는 하녀를 제외하고는 방 안에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 그 하녀도 다른 용무가 있어 자리를 뜬 참이었기에 김창이 깨어난 걸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뭔 수염이······.”
김창은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을 보고서 자신이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보통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면도 같은 걸 간병인이 대신해주지 않나? 이 정 없는 놈들은 그냥 침대에 던져두기만 하고 환자 관리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는 건가?
김창이 왠지 모를 괘씸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오랫동안 누워있던 사람은 근육이 약해져 재활부터 받아야 한다던가?
물론 자신은 일반인도 아니고 무려 승천할 자이니 그 정도로 약해지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디뎌보는 땅의 감촉에 약간 비틀거리리라 생각했다.
“멀쩡하네.”
그런데 그토록 오래 잠들어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몸 상태가 양호했다. 자신이 의사는 아니지만 굳이 진찰을 받아보지 않아도 제 몸이 어떤지는 알 것 같았다.
완벽하다. 모든 게 완벽하다.
마치 오랜 과로에 지쳐 있던 사람이 숙면으로 모든 걸 털어낸 것처럼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그리고 감각 역시 전보다 훨씬 더 민감해졌다. 맨발로 바닥을 딛고 있는 지금은 약하게 흐르는 진동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발바닥만 그런 게 아니다. 사지 말단에서 느끼는 모든 촉각은 물론이요, 다른 감각 역시 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저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이유를 알 법했다.
‘반신이 됐기 때문이겠지.’
원래 게임에서 새로 칭호를 얻거나 전직을 하게 되면 시스템에서 알려주는 법이다. 그러나 이곳은 게임 비슷한 무언가일 뿐, 진짜 게임은 아니라서 뭔가 새로운 변화가 있더라도 누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김창은 자신이 반신이 됐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건 누가 알려줘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요, 그저 자신만이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김창, 그저 칼밥 먹고 살던 칼잡이 나부랭이.
그는 온갖 강적들을 죽이고 또 죽여 결국엔 반신의 격에 올랐다.
“이러다가 진짜 신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정말 신이 될 마음이 있느냐고 하면, 글쎄. 이건 게임으로 치면 게임 열심히 한다고 GM 시켜주겠다는 건데 그런 거 할 바에 그냥 하던 게임이나 하는 낫지 않나.
김창은 덥수룩하게 자른 머리를 긁적거리며 문을 향해 걸었다. 마침 문 너머에서도 인기척이 났다.
“어?”
문 너머에 있던 사람은 이쪽에서 문이 열릴 줄 몰랐던 모양이다. 물병을 들고 들어온 하녀는 그저 누가 자기보다 먼저 방 안에 들어왔겠거니 하고 생각하다가 김창과 눈이 마주쳤다.
“꺄아악!”
놀란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뭔 괴물 보듯 도망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김창은 바닥에 떨어진 물병을 보고서 쩝 소리를 냈다. 물병에서 물이 쏟아져 바닥이 축축했다.
“뭔 일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저기! 저기!”
“저긴 창이가 있는 방인데? 혹시 걔 죽었니?”
“그 사람! 그 사람!”
복도 끝의 모퉁이엔 하녀와 한석구가 있는 모양이었다. 김창은 느긋하게 그쪽을 향해 걸었고 곧 모퉁이를 돌아 나온 한석구와 마주쳤다.
“너······.”
한석구가 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환히 웃었다.
“일어났구나!”
김창도 마주 웃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군.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설마 막 몇 년이 지나고 그런 건 아니지?”
“몇 년은 무슨. 고작 한 달이었어. 그래도 네가 없으니 한 달이 참 길더라.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나고 말이야.”
사람을 무슨 사고뭉치 말하듯 하네. 김창이 입술을 비뚜름히 기울이며 웃었다.
“한 달? 길게도 잤군. 이제 몇 달은 잠을 안 자도 되겠어.”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김창?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갑다.”
“진짜 반가운 거 맞냐? 나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치고 환자 다루는 태도가 영 별로던데.”
“뭔 소리야?”
김창이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염도 안 잘라주고 이게 뭐야?”
“아, 그거? 네 몸에 손대려고 하니까 막 불꽃 탁탁 튀길래 아무도 손 못 댔다. 난 솔직히 네가 전기 쓰는 쥐새끼로 변한 줄 알았다고.”
반신이 된 탓인가? 일시적으로 반신의 격에 올랐던 때에 벼락의 화신으로 변한 적이 있으니 아마 그 영향이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김창이 대충 얼버무렸다.
“정전기야. 그래서, 나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은 없었고?”
“아까 말했잖아. 사건이 없어서 조용했다고. 그나마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라면 우리 원탁이 호엔 주변을 꽉 잡았다는 거? 정복자, 하오성, 산자이, 이 세 명이 영주 노릇하고 있는데 그 주변에서 찍 소리라도 낼 수가 있나? 우리가 그 일대를 야금야금 집어삼켜서 이젠 거의 군벌 수준이야.”
“그 정도라고? 국왕은 별말 없고?”
“별말 없어. 오히려 우리 밀어주고 있는데? 원래 역사에서도 왕이 자기 왕권 강화하려고 기존 세력 대신 다른 세력 끌어오는 거 알지? 지금 상황이 딱 그래. 우리가 왕 말 안 듣는 새끼들 죄 손봐주고 다니니까 우릴 싫어할 리가 있나. 국왕이 우리 쪽 영주 세 명한테 작위도 내리고 그래서 걔넨 이제 진짜 귀족이야. 나도 공석에선 존댓말 해야 할걸.”
신 안 믿는 성기사와 중국산 요정, 그리고 도둑놈이 귀족? 세상 말세로군.
김창이 쯧쯧 혀를 차다가 문득 물었다.
“티샬레는?”
“아, 걔는 이번에 딜루키둠 가문의 가주가 됐어. 너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 싸움 끝나고 기절해 있었으니까.”
“그 녀석이 가주? 그럼 아라비타스는 죽었나?”
“죽진 않고 살아는 있어. 그런데 나이도 있고 부상도 당했으니 그대로 물러난 거지. 우리한텐 아라비타스보단 티샬레가 가주인 게 더 낫지? 걘 우리한테 빚도 있겠다, 뭐 부탁만 하면 아주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참이던데.”
“그럼 요안니스는? 내가 걔 안 죽이고 살려줬는데.”
“아, 그 요정 친구? 걘······.”
말끝을 흐리는 게 뭔가 심상치 않았다. 김창이 쳐다보자 한석구가 쩝 소리를 내며 말했다.
“걔 죽었어. 싸움 끝나고 감옥에 가뒀는데 밤중에 누가 와서 죽였다더라.”
“···죽었다고?”
신성을 잃었다고 해도 요안니스는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다. 그는 천 년 전에 신성을 잃고 도망쳐 기어코 다시 반신의 격에 오른 존재가 아닌가.
살아만 있다면 다음 시대의 신까지 노려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감옥에서 죽었다고?
“그게 뭔?”
“황당한 거 알아. 나도 그 이야기 듣고 황당해서 헛웃음만 나왔으니까. 그런데 진짜 죽었대. 나도 가서 확인해봤는데 정말 죽었더라고. 그것도 날카로운 것에 심장을 찔려서.”
“누가 죽였는지는 알아냈고?”
“모르지. 단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와 요안니스를 죽이고 도망쳤다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야.”
그럴 테지. 요안니스가 갇힌 곳은 그냥 감옥이 아니라 딜루키둠의 감옥일 테니까.
“이상한 일이군. 걘 이미 신성도 다 잃었는데 죽여서 뭔 이득 볼 게 있다고?”
“글쎄. 하지만 감옥 벽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긴 했어.”
“어떤?”
한석구가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승천의 때가 왔노라.”
“아, 그거로군.”
“뭐야? 뭘 알아낸 거야?”
김창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가 먹으려고 남겨뒀던 걸 빼앗겨서 화난 놈의 심술일 뿐이야. 누군진 몰라도 곧 만나게 될 테니 신경 쓸 거 없어.”
“뭔 소리야······.”
“그것보다 나 씻고 올 테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몸이 영 찝찝해서.”
김창은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원탁 내부에 마련된 대욕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면도도 한 뒤에 이발사에게 머리도 맡겼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히 깔끔해진 차림으로 다시 나온 김창은 홀에서 한석구와 만났다.
“그래서 이젠 뭘 할 거야? 늘 하던 대로 돈 받고 사람 죽이기?”
“사람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뭘 할진 몰라도 일단 쉬어야지.”
“쉰다고? 네가? 뭐 안 죽이고?”
“내가 왜 뭔가를 죽여야 하는······.”
김창이 말하고 있을 때 반대쪽에서 심민우가 달려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김창을 보고서 어 하고 놀랐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쪽으로 왔다.
“딱히 놀라길 바란 건 아닌데, 별로 안 놀라니 기분이 좀 그러네.”
“왠지 김 선생님은 죽었더라도 죽음의 신 멱살 잡았다가 다시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내가 그 양반 멱살을 왜 잡아. 김창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한석구가 말했다.
“민우야, 뭔 일 있어?”
“아, 연락이 와서요. 원래는 의장님 바꿔드리려고 했는데 김 선생님 깨셨으니 안 그래도 되겠네요.”
이 시대에 전화가 있나? 연락은 뭔 연락? 김창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심민우가 웬 눈알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냐?”
“거기다 대고 말하면 돼요. 연결돼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랑?”
“지옥이요.”
이게 뭔? 요즘은 지옥이랑 전화도 하고 그러는 시대인가? 김창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달아 이어지자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아아, 연결됐나? 오, 김창.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오늘 일어난 모양이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돼서 아주 기뻐.”
심민우의 말대로 눈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창은 당황하면서도 눈알을 향해 말했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너 누구냐?”
“이런, 그동안 우리가 아무 연락이 없었거니와 벌써 내 목소리를 잊었나? 이거 섭섭하군. 내가 그쪽 고용주인데.”
“고용주? 설마 너······.”
눈알은 웃지 않지만 목소리엔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래, 나다. 대악마 만네르헤임.”
만네르헤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지만 잊진 않았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긴? 우린 거래를 했잖나. 내가 돈을 주면 네가 다른 대악마를 죽인다는 거래.”
그거 이중 거래라 나중에 너도 죽여야 하는데. 김창이 그 말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넌 지금까지 거래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칼레드리온과 헤인리히스를 죽였으니 말이야. 이제 남은 건 마하칼라인 하나뿐이지. 그런데 내 듣자 하니 네가 잠든 채로 깨어나지 않다고 하지 뭔가? 우린 분명 대악마 셋을 죽이리고 했고 너는 둘을 죽였다. 그럼 남은 하나를 누군가 책임져야 하지.”
“그래서 원탁이랑 대화하고 있던 거냐? 남은 하나를 처리하려고?”
“저 한석구라는 마법사의 말대로라면 너는 원탁 소속이라지? 그럼 잔금 역시 원탁이 치러야지.”
누구 맘대로 원탁 소속이야? 김창이 째려보자 한석구가 딴청을 부렸다.
“뭔 이야기는 알겠다. 이젠 내가 일어났으니 원탁이 어쩌고 할 필요가 없어졌겠군?”
“물론 나로선 네가 일을 끝마쳐주면 고맙지. 그래서 마하칼라인은 언제 죽이러 갈 참인가?”
“그거야 뭐 언제든 가능하지. 석구야, 마탑 애들 모아봐. 의식 한 번 더 하자.”
“아, 그거······.”
한석구가 말끝을 흐리자 김창이 눈썹을 까딱였다.
“왜, 혹시 마탑에 뭐 문제 있나?”
“이제 그 방법은 안 통해.”
대답한 건 만네르헤임이었다. 김창이 그쪽으로 눈썹을 까닥이며 말했다.
“왜?”
만네르헤임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간 대악마가 죄 칼에 찔려 죽었는데, 어떤 멍청한 놈이 문 열렸다고 거기로 또 나가겠나? 김창, 대악마는 바보가 아니야.”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