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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악마라는 놈들은 생각보다 똑똑한 듯했다. 김창은 이제 더는 같은 방식으로 대악마를 사냥할 수 없게 됐음에 강한 유감을 느꼈다.
“하기야 세 번 속으면 그건 속은 놈이 나쁜 거긴 하지. 그래서 이제 대악마를 지상으로 불러내서 죽이는 게 안 된다면 뭔 수로 마하칼라인을 죽이지?”
“방법이라면 있지. 아주 간단한 방법.”
“그게 뭔데.”
만네르헤임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쪽에서 오지 않겠다면 네가 직접 마하칼라인을 찾아가서 죽이면 되지 않나?”
김창이 눈썹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말이야 그럴듯한 말이지만 그 방법을 택하기엔 크나큰 문제가 있다.
마하칼라인은 지옥의 대악마다. 그러니까 그를 죽이려면 지옥까지 직접 가야 한다는 소리다.
반신도 된 참이니 어딜 가든 두렵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옥이라니? 거긴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던가? 그것도 생전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지 않나.
거길 지금 나보고 가라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제쳐두고서, 그래도 되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옥에 가려면 일단 죽어야 한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오, 이런. 재밌는 질문을 하는군. 지옥이라고 해서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거긴 그냥 악마와 괴물들이 사는 곳일 뿐이야. 애초에 지옥이라는 이름도 지상의 무지렁이들이 멋대로 붙인 이름일 뿐이지. 우리로선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대로 부르고 있다만.”
“그럼 죽지 않아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거냐?”
“죽은 사람이 죄 지옥으로 온다면 우리로선 기를 쓰고 지상으로 나오려고 할 이유가 없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머리 위로 먹잇감이 떨어지는 셈이 아닌가?”
악마가 사람을 유혹하고 속이는 건 그 영혼을 먹어 치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만네르헤임의 말대로 머리 위로 음식이 떨어지는 셈이니까.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지옥으로 갈 방법은 있고?”
“방법이야 있지. 애초에 대악마들은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나? 이쪽에서 그쪽으로 갈 수 있다면 그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지.”
김창은 의식을 통해 지상과 지옥을 연결하는 문이 열렸던 걸 기억했다. 그러면 결국 의식을 다시 한번 진행하기 해야겠군.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만네르헤임이 말했다.
“대악마를 불러낼 때처럼 거대한 의식을 진행할 필요는 없다. 그땐 대악마가 통과할 만큼 거대한 문을 열어야 했기에 제물도 많이 필요했지만 이번엔 그저 너 하나만 통과할 문만 열면 되니까 말이야.”
의식 한 번 치를 때마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것 같던데 참 잘된 일이다.
“그러면 사람도 많이 부를 필요 없겠군. 몇 명만 있어도 바로 문 열 수 있을 테니까. 김용걸 올 것도 없겠다. 석구, 마탑에 연락해서 사람 몇 명만 보내달라고 해.”
한석구가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지금 가려고?”
“시간 질질 끌 것 있나?”
“내 그럴 줄 알았다.”
한석구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말했다.
“마탑에 연락할 필요는 없어. 이미 지옥으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으니까.”
“그게 열려 있다고? 왜?”
“원래는 네가 안 일어나서 내가 애들 몇 명 데리고 가려고 했거든? 그래서 문 열어뒀던 건데 네가 일어났으니까 그대로 쓰면 되겠네.”
대악마는 강하지만 원탁의 랭커들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네 말 잘 듣는 애들은 지금 영주 일 때문에 바쁘잖아? 김용걸도 마탑주 업무가 있고. 게다가 내가 알기로 악마를 완전히 죽이려면 신성이 있어야 하는 걸로 아는데, 정복자 걔 없으면 못 죽이는 거 아닌가?”
원탁의 랭커들은 한석구의 협력 요청에 비협조적인 경향이 있다. 그나마 정복자와 하오성, 그리고 산자이와 김용걸 정도가 한석구의 말을 잘 들어주는데 그들 모두는 자기 일 때문에 몹시 바쁘다.
“그나마 데려갈 놈이 황금성 하나인데, 걘 기복이 너무 심하지 않나?”
누구한테나 이길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구한테나 질 수도 있는 주술사 황금성. 그 하나 믿고 대악마 죽이러 가기엔 너무 큰 위험이 따른다.
한석구가 하하 웃더니 말했다.
“네 말대로 랭커 놈들 원래는 내 말 잘 안 듣고 그랬었지. 그런데 이젠 달라. 내가 저번에 말했지? 영주 자리 나눠주고 그러면 걔네도 내 눈치 봐야 할 거라고. 걔네 지금 하오성이랑 산자이가 영주 된 거 보고 눈 돌아가서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안달 났어.”
게임에서도 성주가 된다는 건 크나큰 자랑거리요, 또한 막대한 부를 얻을 기회로 여겨졌다.
일개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게임 속 성주가 되는 것에도 모두가 탐을 냈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의 성주가 되는 건 또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는가?
그런 걸 생각하면 랭커랍시고 안하무인으로 굴던 놈들이 영주가 되기 위해 한석구에게 아양을 떠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창은 흥 하고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랭커 중에 사제 놈도 하나 있었지. 랭킹 5위였던가? 걔 데려가면 악마 죽일 수 있긴 하겠네.”
“김여래 말이지?”
특이하게도 원탁의 랭커들은 서로 직업이 겹치지 않아서 1위부터 10위까지 전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랭커 중에서 사제는 오직 한 명뿐이었는데, 원래 어느 게임에서든 힐러는 귀족 대우를 받는 법인데다가 랭커 중 유일한 힐러라는 특수성까지 더해져서 김여래는 한석구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가 한석구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걸 보니 그만큼 영주 자리가 매력적이긴 한 모양이었다.
“나야 영주 자리 관심 없으니까 제쳐두고, 너도 사실상 칼라드 영주니까 빼고, 그럼 랭커 열 명 중에서 영주 자리 못 먹은 게 총 다섯 명인가?”
“용걸이도 곧 영주 될 거야. 그 왜 지난번에 하이나 죽이고 먹었던 섬 있지? 거기 영주 자리가 비었는데 그거 용걸이 주려고.”
그럼 김용걸은 마탑주와 아산트 섬 영주 자리를 겸임하는 셈이다. 과연 원탁의 랭킹 1위다운 직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성이 걔도 일하는 거 보고 영주 자리 하나 줄 거야. 국왕이 우리 원탁 밀어주고 있는 거 알지? 조만간 다른 영주한테 뺏은 땅을 우리한테 나눠줄 것 같거든? 다른 애들도 지금 그거 노리고 내 말에 복종하는 거야.”
영주 자리를 노리고 한석구 말에 복종하던 랭커들이 원하는 걸 얻고 나서 태도가 바뀌면 어쩌냐 할 수도 있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 땅의 귀족도 아닌 원탁의 랭커가 영주가 될 수 있는 건 국왕이 새롭게 될 영주가 될 권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며 국왕이 그 권리를 보장하는 이유는 원탁의 존재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탁이 랭커를 영주로 인정했기 때문에 국왕도 그 권리를 인정한다는 소리인데, 영주 자리만 얻고 원탁과 등을 돌리게 되면 그건 곧 왕국의 적이 되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아무리 잘난 랭커라도 영지 하나만을 가지고 왕국 전체와 전쟁을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영지민들이 영주의 사정 때문에 목숨을 걸어줄 리도 없다.
그러니 랭커들은 영주 자리를 얻더라도 원탁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었다.
김창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손님도 있는데 우리끼리 이야기가 너무 길었군, 만네르헤임.”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지루할 법도 한데, 만네르헤임은 그걸 흥미롭게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가 웃음기가 가볍게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괜찮다. 그래서 더 할 말은 남았나?”
“아니, 이걸로 끝이다. 그럼 곧 보자고. 금방 갈 테니까 말이야.”
“음? 난 굳이 안 봐도 되는데. 그냥 마하칼라인만 죽이고 돌아가. 혹시 지옥 관광이 필요한 거라면 부하를 몇 붙여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리 재밌지는 않을걸.”
“왜, 내 얼굴 보기가 싫은 모양이지?”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하는군. 네가 싫다는 건 아니야. 단지 우리가 서로 얼굴을 봐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뿐이지.”
김창은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만네르헤임이 자신을 만나주든 말든 별 상관은 없다.
애초에 마하칼라인도 만나주겠다고 해서 만나러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만네르헤임을 정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면 찾아가서 만나면 그만이다.
“그러면 부탁한 일은 금방 끝내줄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일처리가 깔끔한 게 네 장점이지. 그럼 나는 이만.”
만네르헤임의 목소리가 끊기고 통신용 눈알에서 빛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그대로 통신이 끊긴 모양이었다.
“바로 지옥으로 간다고 했지? 좀 쉬었다 가라고 해도 들을 네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한 달이나 누워 있다가 막 일어난 참인데 바로 움직여도 되겠어?”
한석구의 물음에 김창이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문제없어. 오히려 쓰러지기 전보다 더 몸이 가벼운 상태니까. 과장 좀 보태서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얘가 점점 괴물이 돼가네. 그럼 이쪽으로 따라와. 지옥의 문으로 안내할 테니까.”
김창은 지옥의 문 같은 걸 상시로 열어둬도 되는 건지 고민했다. 지난번에 헤인리히스 죽일 때도 신전에서 뭐라고 하지 않았나?
물론 김용걸이 원탁이 어쩌고 운운하니까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돌아가긴 했지만.
“여기야.”
“···여기 네 집무실 아니야?”
지옥의 문이 있다는 곳은 한석구의 집무실이었다. 정확히는 그 바닥. 마치 지하실로 향하는 문처럼 바닥에 달린 문고리를 보고서 김창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이런 문을 아무 데나 놔둘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 방에다 열었는데.”
문을 여기 단 게 자기라니까 문제는 없겠지.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를 손으로 잡았다.
“그냥 열면 되나?”
“그래. 나도 몇 번 열어봤는데 별 일은 없더라. 그러면 조심히 갔다 와라.”
무슨 잠깐 동네 마실 나가는 듯 반응하는군. 김창은 작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끝없는 어둠.
정말로 이 문이 지옥으로 통하는 게 맞는 건지 저 안에서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김창은 흠 소리를 내더니 곧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지옥이 지상의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분명 추락하는 중일 텐데, 어째서인지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도 꼴에 지옥이라고 뭔가 특이한 점이 있긴 한 모양이지.
아래로 떨어지든 위로 올라가든, 어쨌건 지옥으로 가기만 하면 아무 상관 없기에 김창은 길고 긴 어둠이 끝나길 가만히 기다렸다.
그 상태로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저 멀리서 주홍색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떨어지는 건지 올라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김창은 주홍색 불빛 속을 통과했다.
김창은 아직 죽어본 적 없고 지옥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여기가 지옥이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긴······.”
검은 하늘, 붉은 대지, 거인의 뼈, 자라나는 구더기, 합장하는 시체, 오염된 샘, 하늘을 나는 뼈 고래, 뇌 열린 나무, 머리 없는 짐승, 구르는 고깃덩어리, 거대한 태아.
그리고 저 멀리 종이 한 장을 든 남자.
“지옥에 온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