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김창은 정면에 선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는 말끔한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머리 위에 양의 뿔이 달렸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간이 지옥에 있을 리는 없으니 저 남자는 겉모습과 달리 인간이 아니라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넌 뭐냐? 나 왔다고 환영하러 나온 거냐?”
김창의 까칠한 목소리에도 남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축! 칼잡이 김창 님의 지옥 방문을 환영합니다!’ 종이를 곱게 접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레올입니다. 만네르헤임 님을 섬기고 있지요. 그분의 저택을 관리하고 있으니 집사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오늘 여기 나온 것은 김창 님을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날 모셔? 김창은 뭔가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그가 살던 지상이 아니고 악마가 득실거리는 지옥이다.
주변의 모습만 봐도 여기가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생전 와본 적도 없는 곳에서 마하칼라인을 찾아가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일 터다.
만네르헤임도 그걸 알기에 레올을 붙여줬으리라. 김창이 쓸데없이 지옥을 떠돌고 있는 건 시간 낭비일 테니까.
“내 이름은 알 테니까 소개는 생략하지. 그럼 잘 부탁한다, 레올.”
레올이 집사답게 우아한 자세로 인사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김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이쪽으로.”
김창과 레올은 지옥 위를 걸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기괴한 광경만 보여서 새삼 여기가 진짜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뭐냐?”
한참 걷던 중에 뜬금없이 날아온 질문에 레올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이런, 제 소개가 부족했던 모양이군요. 그럼 다시 한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레올, 만네르헤임 님을 섬기고 있으며······.”
“내가 건망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까 들었던 소개를 벌써 잊었을 리가 없잖아. 그거 말고.”
“그럼 뭐가 궁금하신지?”
“네 정체가 뭐냐고. 내가 지금까지 봐온 악마들은 죄 괴물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 그럼 악마가 아닌 거냐? 아니면 악마인데 날 배려하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거냐?”
“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레올이 흠 소리를 내며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저는 반은 악마고 반은 인간입니다.”
“그럼 악마와 인간의 혼혈 같은 거냐? 이건 악마의 취향이 특이한 거냐, 인간의 취향이 특이한 거냐?”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악마와 인간의 혼혈이 아닙니다. 근원을 따지자면 전 인간이니까요. 김창 님, 악마의 꾐에 당해 영혼을 바친 자들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으시지요?”
“그래.”
“지옥의 악마들은 그 영혼을 먹어 힘을 키우기도 하지만 그들을 일꾼으로 부리기도 합니다. 지옥의 괴물들은 충성스럽긴 해도 너무 멍청해서 일꾼으로 쓰긴 어렵거든요.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악마의 힘을 받아 새로운 육체를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저처럼요. 이곳에선 저 같은 사람을 마족이라고 부릅니다.”
마족. 입 안에서 단어를 여러 번 발음하던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가 그 마족이라고? 만네르헤임 정도 되는 대악마한테 힘을 받았으니 어지간한 악마보다 강하겠군?”
“하하.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건방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네, 그렇습니다. 저는 만네르헤임의 두 기수 중 하나이니까요.”
대악마에겐 그를 섬기는 지옥의 기수가 있다고 했다. 그런 건 보통 악마가 맡는 법인데 한때 인간이었던 자가 기수가 됐다는 건 레올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였다.
“음, 레올. 생각보다 강함, 메모······.”
“네? 뭘 적으시는 겁니까?”
김창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 가나? 마하칼라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건 맞지?”
“네, 맞습니다.”
“걸어가나?”
“죄송합니다. 제가 날아가는 재주는 없는지라······.”
정말 죄송하다는 듯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레올을 보면서 김창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지옥의 지리를 잘 모르긴 하지만 마하칼라인이 있는 곳까진 제법 거리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말도 없이 그냥 걸어가냐고 물은 거였다. 혹시 지옥엔 말이 없나?”
“아, 그런 뜻이셨군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석구 님이 처음 지옥의 문을 열 때, 일부러 마하칼라인의 영지와 가까운 곳에 열었으니까요. 조금만 걸으면 곧 도착할 겁니다.”
“그러냐.”
김창이 간단히 대답하는데 레올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김창 님, 미리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여 몹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혹여 말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업고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다 큰 어른이 남한테 업혀서 다니는 것만큼 우스운 꼴도 없으리라. 김창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고.”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자, 가시지요.”
둘은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마하칼라인의 영지가 멀지 않았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 듯 저 멀리 커다란 성벽이 보였다.
아마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겠지만 악마들은 날개가 있어서 성벽을 넘어갈 수 있을 텐데 저게 의미가 있는 걸까?
김창이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레올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걸 좀 써주시겠습니까?”
레올이 건넨 것은 후드가 달린 망토였다. 누가 봐도 얼굴을 가리라는 의미가 분명했기에 김창이 물었다.
“혹시 인간인 내가 저 안에 들어가면 귀찮은 일이 생겨서 그러는 건가?”
레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역시 망토를 몸에 둘렀다.
“맞습니다. 인간인 김창 님과 만네르헤임 님의 부하인 제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분명 큰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부디 잠깐만 참아주시길.”
김창이 레올에게 망토를 받아 몸에 두르고는 후드까지 눌러 썼다.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냥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잘 어울리는군요. 그럼 가실까요?”
후드로 얼굴을 가린 둘은 성문으로 향했다. 괴물도 지나다닐 수 있도록 크게 지어진 성문은 손에 창을 든 악마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오는 김창과 레올을 발견하고서 이쪽을 향해 창을 들이밀었다.
“정지! 여긴 마하칼라인 님의 영지다! 너희는 누구냐!”
지옥에서 마족은 몹시 드물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악마의 마음에 들어서 힘을 나누어 받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체형을 한 김창과 레올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돼지 머리를 한 악마가 코를 벌렁거리며 말했다.
“뭔가 인간의 냄새가 나는데? 도망친 영혼인가? 너! 후드를 벗어라! 얼굴을 봐야겠다!”
악마가 사납게 소리치자 레올이 망토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메달이었는데 그걸 보자 악마의 눈에서 빛이 빠져나갔다.
“가시지요. 저 악마는 한동안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악마는 그대로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김창이 그걸 보고서 물었다.
“방금 뭘 한 거냐?”
“이건 복종의 메달입니다. 저보다 약한 대상을 일정 시간 동안 복종시킬 수 있지요.”
레올의 설명을 들은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토록 쉽게 성문이 뚫리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알기로 지옥의 대악마들은 늘 전쟁이라고 하던데. 이러면 성벽이 있어봤자 별 도움이 안 되잖아.”
레올이 성벽 안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악마는 생각보다 강합니다. 제가 더 강할 뿐이지요. 그리고 성벽이라는 건 그냥 대악마가 이곳이 자신의 영지임을 나타내기 위해 세운 것뿐입니다. 일종의 울타리라고 할까요? 그러니 사실 없어도 그만입니다. 애초에 대악마를 죽일 수 있는 건 같은 대악마뿐인데, 대악마가 직접 나선다면 성벽 따위가 뭔 의미겠습니까? 손짓 한 번에 죄 부서질 텐데요.”
뭔가 납득이 가는 이유라서 김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레올을 따라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김창이 지옥을 보고 느낀 것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괴상함이었다. 나무에선 뇌가 열리고 있질 않나, 하늘에선 뼈 고래가 날아다니고 있질 않나, 협곡엔 웬 거대한 태아의 얼굴이 여러 개 붙어 있질 않나.
그걸 보고서 지옥은 과연 지옥이구나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그 감상은 마하칼라인의 영지 안에 들어오고 나서 또 변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대악마의 영지이니 당연히 훨씬 더 기괴한 꼴이리라 생각했던 성안은 생각 이상으로 멀쩡했기 때문이다.
벽돌을 깔아 만든 도로, 길을 따라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건물들, 흐트러짐 없이 이동 중인 시체 군단,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길 위를 걸어 다니는 마족, 목줄을 채운 채로 괴물을 끌고 가는 악마.
뭔가 특이한 모습이 있긴 해도 기대했던 것만큼 기괴한 모습은 아니었다. 길 다니는 악마와 괴물, 시체 군단을 사람과 개, 그리고 경비대 정도로 치환하면 그냥 인간 세상이랑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레올은 눈치 빠른 집사답게 김창의 생각을 바로 읽어냈다.
“아무래도 기대한 것과 영 다른 모습이라 놀란 모양이군요. 하지만 이곳의 질서가 잘 잡혀 있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여긴 다른 누구도 아닌 대악마의 영지이니까요. 이곳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대악마의 영지 역시 똑같습니다. 대악마에게 있어서 영지를 잘 다스리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대악마의 체면과도 상관있는 일이거든요.”
“그게 뭔 뜻이지?”
“악마나 괴물 따위가 영지 안에서 날뛰는 건 그만큼 영주의 힘이 약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반대로 영지의 질서가 잘 잡혀 있는 건 영주의 힘이 강하다는 걸 의미하고요. 일개 악마의 영지에서도 질서를 잡으려고 노력하는데 대악마의 영지가 엉망이라면 그거야말로 체면 상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악마 주제에 별걸 다 신경 쓰는군. 김창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 님, 저는 이제부터 마하칼라인에 대한 정보를 모아올 생각입니다. 혹시나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잠깐 몸을 숨기고 있지 않겠습니까?”
“뭔 정보?”
“마하칼라인은 몹시 부지런한 대악마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 말고도 여러 영지를 거느리고 있는데 주기적으로 시찰을 나가곤 하지요. 따라서 오늘 이곳에 마하칼라인이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김창 님께서 헛걸음하지 않도록 마하칼라인의 일정에 대해 알아 올 겁니다.”
“그런 거라면야. 그럼 나는 대충 이 근처에 숨어 있을 테니 알아서 찾아와라.”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레올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악마보다 강한 마족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몹시 은밀하고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김창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대충 건물 뒤쪽에 몸을 숨기려고 했다. 한 발자국 움직이는데 대로 위로 웬 사람 무리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엄밀히 말해서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처럼 생기긴 했는데 몸이 약간 반투명한 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꾸물대지 말고 빨리 움직여라, 이 게으른 놈들! 다음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스무 명쯤 되는 영혼 무리를 데리고 가는 건 채찍을 든 악마였다. 그가 채찍으로 땅을 내리칠 때마다 영혼들이 몸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저게 지상의 사람이었다면 김창도 저들을 불쌍히 여겨 구해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은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었고 지옥에는 대개 죄를 지은 자들이 떨어졌다.
그러니 굳이 구해줘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숨어 있는 상태가 아닌가?
김창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이나 마저 가려 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다시 영혼 무리를 쳐다봤다.
왠지 눈에 익은 사람이 있었다.
“개눈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