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31화 (130/200)

131

일찍이 개눈깔이라는 칼잡이가 있었다. 그녀는 원래 원탁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지만 김창에게 지고서 눈 하나를 잃었더랬다.

그녀는 그걸 아주 수치스럽게 여겨 복수를 위해 승천할 자를 사칭하는 웬 잡놈들의 부하로 들어갔는데, 그러고도 김창에게 또 졌으니 몹시 애석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창은 그녀의 굴욕이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끝났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옥에 와서 또 만날 줄은 몰랐다.

원래 한때 잘나가던 사람이 완전히 몰락해서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습을 지인에게 들키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

지금 개눈깔의 상황 역시 그랬다. 지상에 있을 땐 외눈의 마왕이 어쩌고 하면서 사람 죽이고 다니던 놈이 이젠 지옥에서 일꾼으로 부려 먹히고 있으니 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일인가?

심지어 그걸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들킨다면? 게다가 그 사람이 자신을 몰락시켰던 사람이기까지 하면?

개눈깔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대로 혀 깨물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미 죽은 몸이라 다시 죽을 수 없다는 건 제외하고서.

“쟤가 왜 저기 있어?”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설마 개눈깔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

김창은 저도 모르게 영혼 무리의 뒤를 따랐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타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영혼 무리는 악마를 따라서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었는데 김창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여기선 뭔가 사고를 치더라도 다른 사람 눈에 띌 일이 없으니까.

“잠깐, 거기 가는 악마 놈.”

김창은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하자 그 목소리에 반응해 악마가 고개를 돌렸다.

“응? 넌 뭐냐?”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체형을 보아하니 마족인 것 같은데······. 혹시 이 영혼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그래서 그래?”

악마는 눈치가 빨랐다. 그냥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김창의 목적을 눈치챘으니까.

물론 김창이 마족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라는 건 몰랐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그 어떤 미친놈이 살아서 지옥으로 오겠는가?

“똑똑하네. 거기 있는 애들 중 한 명한테 용건 있으니까 이쪽으로 넘겨.”

“하! 아무리 마하칼라인 님의 총애를 받는 마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영혼을 데려갈 수는 없다! 영혼을 관리하는 것은 영혼 노역소의 소장인 나의 고유한 권리다! 마하칼라인 님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라도 가져오지 않는 한은······.”

“명령서? 그거라면 있지.”

명령서가 있다는 말에 악마가 잠깐 당황했다. 그가 당황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김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명령서가 있다면 보여······.”

“여기 있잖아.”

김창이 망토 속을 뒤적거리며 명령서를 꺼내는 듯한 행동을 하자 악마가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악마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오자 김창은 망토 속을 뒤적거리던 손을 꺼내 내질렀다.

“크억!”

반신의 격에 오른 육체는 따로 무술을 배우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흉기가 된다. 배에 주먹이 꽂힌 악마는 얼굴이 괴상하게 뒤틀리더니 속에 있던 것을 전부 게워냈다.

우에엑 소리가 나며 입에서 초록색 액체를 줄줄 뱉어내는 악마를 보며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소장이라고 해서 조금은 버틸 줄 알았는데 겨우 한 방이냐. 이래서야 죽여도 신성은 주지도 않겠군.”

김창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칼을 뽑았다. 남들이 봤다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자주 나오는 것처럼 칼자루를 깔짝거렸을 뿐인데 어느새 적이 베여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목이 잘린 악마는 여전히 입에서 뭔가를 뱉어내고 있었다. 길거리가 더러워진 걸 본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아무것도 안 주는군.”

김창은 자신이 너무 강했을 뿐, 저 악마가 약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저 정도 악마를 죽였으면 아주 약간이라도 신성을 줬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그건 자신이 반신의 격에 올랐기 때문일까? 그 왜 게임에서도 자기보다 약한 적을 죽이면 경험치를 안 주지 않나.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납득 못 할 일도 아니다.

“다, 당신은······.”

김창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마에게 노역소로 끌려가던 영혼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누,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저희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던 영혼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저희는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요? 뭔가 은신처 같은 곳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김창의 심드렁한 대꾸에 영혼이 크게 당황했다.

“네? 저희 구하러 오신 거 아닌가요?”

“내가 너희를 왜 구해? 여긴 지상에서 죄를 지었거나 악마한테 영혼을 바친 놈들만 떨어지는 곳 아닌가? 그럼 죄 나쁜 놈들이라는 소리인데 내가 너희를 왜 구하냐고.”

영혼들이 당황했다. 그러면 우리를 구할 마음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악마를 죽였단 말인가? 대체 왜?

“난 너희 구하려고 악마 죽인 게 아니니까 여기서부터는 알아서 행동해. 도망을 치든, 아니면 얌전히 자수하든 알아서 하라고.”

김창은 정말 영혼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영혼들은 당황했지만 곧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어디론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개눈깔.”

도망치는 영혼 중에는 개눈깔도 있었다. 김창의 본래 목적은 그녀였기 때문에 도망치려는 걸 바로 붙잡았다.

“네? 저는 왜······.”

영혼의 모습은 죽었을 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는 건지 개눈깔은 여전히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있었다. 사실 저게 아니었다면 김창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웬 존댓말이야. 안 어울리니까 반말해. 그 왜 중2병에 심취한 사춘기 소녀 같던 말투는 영 부끄러워서 못하겠냐?”

“아니, 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저를 아시나요?”

이거 왜 이래? 김창은 미간을 좁히며 개눈깔의 얼굴을 쳐다봤다. 분명 개눈깔의 얼굴이 맞았다.

한쪽만 남은 눈에 가득하던 독기가 빠진 얼굴이긴 한데 그래도 개눈깔이 맞긴 했다.

얘가 왜 이러지? 죽고 나서 개과천선이라도 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나를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되긴 하나?

“후드를 쓰고 있어서 그런가?”

목소리만 듣고선 헷갈릴 수도 있겠다. 김창이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자, 얼굴 보면 알겠지? 나야, 김창.”

“김창이요? 이름이 뭔······.”

정신 나갔나? 김창이 얼굴을 구겼다.

“나 몰라? 개눈깔, 나 진짜 모르냐고.”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왜 자꾸 저보고 개눈깔이라고 하세요? 저는 서하연인데······.”

김창은 당황했다. 이거 혹시 기억상실 뭐 그런 건가? 아니, 그런 거라면 보통 자기 이름도 다 잊는 법인데 본명은 기억하고 별명은 까먹는 건 대체 뭔가?

선택적 기억상실인가? 애초에 지옥 갔는데 기억상실이 되는 건 또 뭔?

김창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서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저희가 지상에서 아는 사이였나요? 굳이 지옥까지 절 찾으러 온 걸 보면 혹시 연인 사이?”

“미친년······.”

“아, 아니에요? 하지만 연인 사이도 아닌데 굳이 지옥까지 절 찾으러 올 이유가 없잖아요······.”

“너 찾으러 온 거 아니야. 다른 일 때문에 왔는데 네가 보여서 그냥 만나러 온 거고.”

서하연이 얼굴을 숙였다.

“아, 그래요······. 그럼 우린 무슨 사이였는데요?”

김창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널 죽였다.”

“···네?”

“너 지옥 보낸 게 나라고. 아, 너 개눈깔 만든 것도 나고.”

“······.”

서하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선 채로 기절한 탓이었다.

“아니, 사실을 얘기한 건데 왜 기절하는 거야?”

김창은 다시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기절한 서하연을 등에 업었다. 이걸 버리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은 영혼 상태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체중이 많이 나가지 않는 건지 서하연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김창은 그녀를 등에 업고서 다시 처음 장소에 숨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레올이 돌아왔다.

“정보를 모아왔습니다. 마하칼라인은 오늘 부재중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일 돌아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면······.”

말하던 레올이 김창을 빤히 쳐다봤다.

“왜?”

“···뒤에 그건 뭡니까?”

“내가 옛날에 죽였던 사람.”

미친놈인가? 사람 죽이고 시체 수집하는 놈은 봤어도 영혼 수집하는 놈은 대체 뭔?

레올은 출발하기 전 만네르헤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 미리 말하지만, 그건 악마보다 더한 놈이다. 괜히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이제야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처럼 생긴 악마지.

* * *

방 안은 몹시 어두웠다. 어둠은 빛의 부재라고 하지만 이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어서 생긴 게 아니었다.

마치 이 방 전체를 새까만 물감으로 칠한 것만 같았다. 아마 여기에 태양을 가져다 두더라도 방 안이 밝아지는 일은 없으리라.

오히려 그 태양조차 검은색으로 물들어 빛을 잃을 게 분명했다. 여긴 그런 곳이기에 누구도 무언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분명히 무언가 존재하고 있었다.

“마하칼라인, 내 오랜 적수.”

나직한 목소리는 만네르헤임의 것이었다. 그는 이 방의 주인으로서 불쑥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고 있었다.

“우리가 단둘이서 마주 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이 방에서 만났던 게 오백 년 전의 일이던가?”

“만네르헤임.”

여유가 넘치는 만네르헤임과 달리 마하칼라인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네가 저 이방인을 불렀나? 가는 곳마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 저 무뢰한을?”

만네르헤임이 침묵했다. 마하칼라인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숨기려 하지 마라. 다 알고 왔으니까. 칼레드리온와 헤인리히스가 저 칼잡이 손에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네가 사주했다는 것까지도.”

만네르헤임이 입을 열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있을 터다.

“숨기려 하지 말라니. 애초에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조금만 머리가 있다면 알 수 있는 일이니까.”

“무슨 생각이냐? 저 이방인의 손을 빌려 경쟁자를 모두 제거하고 진정한 지옥의 주인이 되려는 거냐?”

“다 알고 왔다면서 뭘 묻는 건지.”

마하칼라인은 그걸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멍청한 놈! 그런 식으로 얻어낸 지옥의 왕좌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리고 저 칼잡이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몰라서 이러나? 늑대를 몰아내자고 호랑이를 불러온 격이다! 저놈이 나를 죽이고 나면 얌전히 지상으로 돌아갈 것 같나? 그럴 리가!”

마하칼라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날 죽이고 나면 분명 널 죽이려 들 거다! 저놈은 승천할 자고, 승천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신성이 필요할 테니까!”

“음, 그럴 테지.”

“만네르헤임, 잘 생각해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와 손을 잡고 저 칼잡이를 죽이는 거다. 그래야만 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네 잘못을 바로 잡을 마지막 기회······.”

마하칼라인의 목소리는 이제 애원하듯 변해 있었다. 그에 비해 만네르헤임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김창이 널 죽이고 나면 날 찾아오리라는 건 알고 있다. 신성을 모으기 위해 대악마를 죄 죽이고 다니던 놈이 나라고 살려줄 리는 없을 테니까. 애초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면······.”

“하지만 네 제안은 거절하지, 마하칼라인. 너는 여기서 죽어라.”

“만네르헤임!”

마하칼라인의 외침 뒤에 만네르헤임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마하칼라인, 설마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저 칼잡이를 불러들였으리라 생각하나? 그럴 리가. 나에겐 생각이 있어.”

만네르헤임이 웃으며 말했다.

“이 말은 전에도 한 것 같은데, 뭐 상관없나. 마하칼라인, 대악마는 바보가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