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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창 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레올은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 뒷면에는 곤란함이 가득했다. 아마 상대가 상대인지라 함부로 화를 낼 수 없는 탓이리라.
김창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했다.
“내가 뭘?”
“···제가 분명 얌전히 숨어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얌전히 숨어 있잖아.”
“김창 님, 보통은 길거리에서 악마를 죽이고 영혼을 데려온 걸 얌전히 숨어 있었다고 하진 않습니다.”
“지옥에서 지상의 상식이 통할 줄은 몰랐는걸. 난 지옥에선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
뻔뻔하게 대답하는 김창을 보며 레올이 미미하게 뺨을 씰룩거렸다. 뭔가 할 말은 많은데 억지로 꾹 참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도와주려고 나온 사람인데 더 놀리면 그것도 미안한 일이라 김창은 순순히 사과했다.
“아까 한 말은 장난이었고, 미안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는 사람이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그냥 두긴 좀 그러잖냐.”
김창이 사과하자 레올도 더는 볼멘소리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은 수습할 수 없다. 악마는 진작 죽어버렸는데 다시 되살릴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부턴 지금의 일만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악마는 죽었고 영혼들은 도망쳤으니 이 사실이 마하칼라인에게 전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럼 시찰을 떠났던 마하칼라인도 다시 영지로 돌아오게 되겠죠. 어쩌면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일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창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그걸 노리고 그랬던 거야.”
“···방금 그 말은 이 상황을 가능한 긍정적으로 보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실제로 잘된 일일 리가 없잖습니까?”
“아니, 왜 사람 헷갈리게 말을 이리저리 바꿔?”
레올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애써 참으며 말했다.
“김창 님, 우리는 방금 악마 하나를 죽임으로써 이 도시 전체를 적으로 돌렸습니다. 마하칼라인을 죽이는 것도 어려운 일일 테지만 도시 전체와 싸우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일 겁니다. 잠시 뒤면 악마가 죽었다는 사실이 도시 전체에 알려질 것이고 범인을 찾기 위해 병사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요. 우리는 단둘이서 그 모두와 싸워야 합니다. 각오는 되셨습니까?”
김창은 지금까지 싸우면서 뭔가 대단한 각오를 하고서 칼을 잡아본 적이 없다. 내가 적을 죽여야 하거나, 적이 날 죽이려 하니까 싸웠을 뿐.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그냥 싸울 뿐이다. 거기에 별 대단한 의미는 없다.
하지만 레올은 다르다. 그는 본래 안내역으로서 김창을 도우러 왔을 뿐, 마하칼라인과의 싸움은 오롯이 김창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김창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아무리 그가 지옥의 여덟 기수 중 하나라고 해도 혼자서 도시 전체를 상대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넌 안 싸워도 된다. 어디 숨어 있어도 되고, 아니면 이대로 만네르헤임에게 돌아가도 괜찮아. 이건 내 일이니까 나 혼자서 해결하면 돼.”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대전이 초반 때의 실력이었다면 혼자서 악마들과 싸우는 건 자살 행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무려 반신. 그냥 승천할 자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신좌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 반신이다.
반신이라고 칼 맞으면 안 죽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남들보단 덜 맞을 수는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김창은 혼자서 도시 전체를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저는 김창 님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마하칼라인과의 싸움에선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악마들과 싸우는 거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주시지요.”
김창이 레올을 빤히 쳐다봤다. 마족은 지옥으로 끌려온 영혼이 대악마의 힘을 받아 탄생하는 것이라 했는데, 만네르헤임이 왜 레올을 마족으로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충성스러운 부하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힘을 내줄 테니까. 얜 착한 녀석이라 죽이기 아깝군. 김창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뭐.”
레올이 빙긋 웃었다.
“김창 님, 둘이서 힘내보지요.”
“둘? 두 명 아니야. 셋이야.”
“셋?”
레올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쳐다보는 척을 했다. 그가 말했다.
“싸울 사람은 저희 둘뿐입니다만.”
“여기 하나 더 있잖아.”
김창이 바닥에 누워 있는 서하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 잘 싸워. 내가 죽여봐서 알아.”
“······그런데 아직 기절해 있는 것 같은데요.”
“기절한 척하는 거야. 지금 실눈 뜨고 눈알 굴리는 거 다 보인다, 개눈깔.”
죽은 듯 가만히 있던 서하연이 큼 하고 헛기침하며 몸을 일으켰다.
“바, 방금 깼어요.”
“상황은 대충 알겠지? 너도 한 몫 거들어라.”
순간 서하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영혼 상태라 원래 얼굴이 창백했는데 지금은 반대쪽이 비칠 정도로 훨씬 더 투명해졌다.
“저보고 악마들이랑 싸우라고요? 무리, 무리예요!”
“지상에선 사람 척척 썰고 다니던 놈이 왜 이래? 이런 말 하면 욕일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엔 원탁에서 나 다음으로 사람 잘 죽이는 게 너야.”
“지상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무리라고요! 절 보세요! 그냥 영혼일 뿐인데 뭔 수로 악마와 싸우겠어요?”
생각해보니 영혼이면 물리적인 접촉이 불가능한 건가? 원래 귀신 같은 건 사람이 만지면 손이 몸을 통과하고 그러지 않나.
김창이 레올을 쳐다보자 그가 바로 대답했다.
“지옥에선 영혼도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초에 영혼이라고 물리적인 접촉이 불가능하다면 노역소에서 무슨 수로 일을 하겠습니까?”
“야, 너도 싸울 수 있다잖아.”
서하연이 황당한 얼굴로 답했다.
“노역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악마와 싸울 수 있는 것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데요?”
“자꾸 말대꾸할래? 칼침 한 방 더 놔줘?”
그건 또 싫었는지 서하연이 입을 다물었다. 김창이 칼자루를 잡으며 말했다.
“그러면 갈까. 기다리는 건 영 성미에 안 맞아서.”
“조심하십시오. 물론 제가 김창 님을 걱정할 만한 위치는 아니긴 하지만요.”
“너도 조심해라. 개눈깔, 빨리 따라와.”
서하연이 부루퉁하게 입을 내민 채로 김창의 뒤를 따라왔다. 세 사람은 건물 뒤쪽에서 나와 대로 쪽으로 이동했다.
김창이 악마를 죽인 게 벌써 알려졌는지 시체 병사나 악마들이 다급히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마하칼라인이 돌아오기 전에 범인을 찾으려는 것인지 상당히 열심인 모습이었다. 그러한 노력이 성과가 있었는지 악마들이 도망친 영혼들을 하나둘씩 잡아 오고 있었다.
이제 잠시 뒤면 도망친 영혼도 전부 찾아낼 것이고 범인에 대한 수색망도 좁혀질 것이다. 김창은 칼자루를 매만지며 얌전히 그때를 기다렸다.
“저 녀석입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도망쳤던 영혼의 것이었다. 악마에게 붙잡혀 오던 그가 길가에 선 김창을 알아보고서 고자질을 했다.
“저 녀석이 노역소장을 죽였어요!”
도망에 대한 벌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생각인 걸까? 영혼은 김창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아주 열렬히 외쳐댔다.
“이봐, 너 후드를 벗고 얼굴을 보여라.”
악마가 천천히 다가왔지만 김창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악마가 콧김을 세게 뿜으며 말했다.
“너! 후드를 벗으······.”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목이 날아갔으니까. 공중으로 날아오른 악마의 머리가 웅얼거리듯 마지막 말을 내뱉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 녀석이 범인이다! 저 녀석을 잡아!”
대로에서 악마를 죽였으니 이제 누가 범인인지는 명확해졌다. 김창은 더 숨기려 하지 않고 후드를 벗었다.
“인간이다! 살아있는 인간!”
“살아있는 인간이 어째서 여기에?”
“일단 잡아! 마하칼라인 님이 돌아오기 전에 범인을 잡아야 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악마는 물론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악마, 그리고 수색 중이던 시체 병사와 마족들까지 전부 몰려왔다.
김창은 눈으로 숫자를 세다가 말했다.
“오 분이면 떡을 치겠군.”
“조금 있으면 더 몰려올 테니 빠르게 정리하지요. 제가 돕겠습니다.”
레올도 후드를 벗고 몸 안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만네르헤임의 기수답게 상당한 양이었다.
“레올이다! 만네르헤임의 부하 놈!”
“이건 만네르헤임의 공격이었나! 저 칼잡이는 죽이고 레올은 붙잡아라!”
적들이 시끄러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김창은 한 손에 칼을 들고서 가만히 있다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휙! 칼집에서 튕기듯 쏘아져 나간 칼이 악마의 목을 관통했다. 그 뒤에 있던 악마는 어어 소리를 내다가 여전히 빠르게 질주하는 칼에 미간을 뚫렸다.
하늘을 나는 칼은 그 후로도 직선으로 움직이며 적 셋을 더 죽였다. 일부 악마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가운데 김창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워낙 빠른 속도라 거기에 제대로 반응하는 놈은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면 김창이 다가와 있고 다시 또 눈을 깜빡이면 목이 떨어져 있는 식이었다.
종횡무진으로 날뛰는 김창을 보며 악마들은 그가 보통 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치 마법을 쓰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그를 붙잡으려면 다수가 협공해야 한다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붙잡아!”
악마들은 마력을 이용해 김창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사방에서 일시에 공격하려 들었다. 아무리 김창이 잘나도 모든 방향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전부 반응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생각은 절반은 맞았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로 김창은 제깟 놈들이 협공하든 말든 전부 받아낼 실력이 있었고, 둘째로 김창은 지금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절 잊으면 곤란한데요.”
독사처럼 김창의 목을 노리던 지옥 마법이 일시에 사라졌다. 악마들이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마력을 이용해 양손을 칼처럼 날카롭게 만든 레올의 손이 그들의 목을 잘랐다.
“레올! 이 비겁한 놈!”
“비겁한 건 한 명을 상대로 여럿이 덤벼드는 그쪽이고.”
“건방진 놈!”
김창과 레올은 서로의 등을 맡기고서 악마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처음 김창이 말했던 것처럼 저들을 모두 정리하는 데는 오 분 정도면 충분했다.
“증원이다!”
“기수님이 오신다! 조금만 더 버텨!”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적이 이 도시를 지키는 병력의 전부는 아니었기에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조금 있으면 마하칼라인의 기수도 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싸움은 조금 더 길어질 듯했다.
“죽여라!”
“싸워라! 마하칼라인 님이 우리를 지켜보신다!”
잠시 뒤에 나타난 증원은 아까보다 훨씬 더 많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저 증원조차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한나절은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군. 김창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듯 무감정하게 칼을 휘둘렀다.
“여기 도망친 영혼이 있다! 이 녀석을 붙잡아!”
“놈이 도망친다! 붙잡아!”
한참 싸우던 중에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창이 문득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까지 도망친 서하연이 보였다.
“남들 다 싸우는데 혼자 도망을 쳐?”
괘씸한 놈. 이거 끝나고 나면 진짜 칼침이라도 한 방 놔줘야겠군. 김창이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살려줘요! 난 싸울 줄 모른다고요!”
싸울 줄 모르면 도망을 치지 말던가, 도망을 쳤으면 잡히질 말던가. 김창은 자신이 괜한 골칫덩어리를 구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잠깐 저쪽 다녀온다.”
“그러시지요.”
김창이 일격에 악마 셋을 죽이고 서하연이 있는 쪽으로 달렸다. 거기엔 마족 지휘관이 시체 병사들을 데리고 서하연을 둘러싸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를 잘라주마.”
마족이 머리 위로 칼을 들어 서하연의 다리를 노리려 할 때였다.
‘늦겠는데.’
김창이 아무리 마법처럼 빨리 달린다고 해도 진짜 마법을 쓰는 건 아니다. 아직 거리가 상당히 남았는데 지금보다 더 빨리 달려도 마족의 칼이 서하연의 다리로 떨어지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걸 알기에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김창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웠고 그대로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돌멩이는 칼을 든 마족의 손에 부딪쳤고 손가락뼈를 완전히 으스러트렸다.
“끄아악!”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마족이 비명을 지르며 손에서 칼을 떨어트렸다. 그걸 본 김창이 크게 외쳤다.
“개눈깔!”
“···네?”
멍청하게 대답하는 서하연을 보며 김창이 다시금 외쳤다.
“칼! 들어!”
서하연은 얼떨결에 바닥에 떨어진 칼을 손에 들었다. 그런데 줍기만 하고 뭘 어째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가만히 있자 김창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의의 일격에 당한 마족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영혼을 죽여! 그냥 죽여버리라고!”
시체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충실했다. 그들이 창칼을 들고 서하연을 향해 내질렀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싸움 다 끝나고 구할 걸 그랬나. 김창은 여전히 달리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미 한 번 죽은 놈이니 또 죽는다고 불만은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개눈깔!”
김창이 크게 외치든 말든 서하연을 노리는 창칼은 멈추지 않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창칼이 그대로 서하연의 몸을 찔렀다.
아니, 찔렀어야 했다.
“닥쳐라.”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연달아 울리더니 시체 병사들이 휘두른 창칼이 공중을 날았다. 생각이라는 걸 못 하는 시체 병사들은 그저 덤덤할 뿐이지만 지휘관인 마족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역시 하늘로 날아갔다.
“난 개눈깔이 아니다.”
김창은 서하연의 안대가 초록색으로 불타는 걸 봤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듯 멍청한 모습은 사라지고 없고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움만이 남았다.
“들어라! 외눈의 마왕, 지옥에서 화려하게 부활!”
저 미친년, 기억상실인 게 아니라 그냥 이중인격이었나? 운전대 잡으면 성격 변하는 사람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칼 잡으면 사람 변하는 놈은 또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