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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칼을 내려두고 딴청을 부리는 서하연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게 미쳤나? 아까까진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강한 것처럼 까불더니 이젠 싸울 줄 모르는 척을 해?
애초부터 서하연의 모습만 보여줬다면 김창도 굳이 싸움을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칼을 들면 개눈깔로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아는데 서하연의 뒤에 숨어 도망치게 둘 수는 없다.
김창은 서하연을 빤히 쳐다봤고 무거운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이제 서하연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할 때, 나직한 목소리에 의해 침묵이 깨졌다.
“칼.”
“···칼?”
“칼 들어.”
김창의 목소리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나직하게 말하고 있지만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서하연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김창의 명령에 따라 칼을 주웠다. 손에 칼을 쥐는 것과 동시에 개눈깔로서의 인격이 돌아왔고 그녀는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내가 왜 저 녀석의 말을 들었지? 그것도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서하연은 김창이 이미 반신의 격에 올랐다는 걸 모르고 그 목소리는 신성이 없는 자를 복종하게 만든다는 걸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왜 싸워야 하지? 이건 내 싸움이 아니다! 그리고 저 녀석은 강해! 그것도 아주! 내가 왜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냐! 심지어 이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서하연의 말은 옳다. 그녀 입장에선 마하칼라인과 굳이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확실히 그건 정론이다.
김창은 서하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놈한테 두 번 죽는 것보단 처음 보는 놈한테 한 번 죽는 게 더 나을걸.”
“······.”
서하연이 조용히 김창의 왼쪽에 섰다.
두 명의 칼잡이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는 걸 본 마하칼라인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름이 김창이라고 했던가? 거기 같이 있는 여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강해 보이는군.”
“나는 외눈의 마왕이다!”
“···외눈의 마왕? 뭔가 좀 모자라 보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마하칼라인은 정말 서하연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김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린 초면이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나는 너 몰라.”
“당연히 모르겠지. 아까도 말했듯이 우린 초면이니까.”
“초면인데 나에 대해 잘 안다는 걸 보면 내 뒷조사를 많이 하고 다닌 모양이지. 하는 짓이 대악마답지 않게 참 옹졸해.”
“···네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다. 그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하기야 필요한 일이었겠지. 나한테서 목숨을 지키려면 말이야. 그러면 하나 묻겠는데, 지금까지 내 뒷조사를 했으니 날 이길 방법도 알아냈나?”
“나는······.”
마하칼라인이 버릇처럼 한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외모기에 그것 역시 그린 듯 아름다웠다.
저거 진짜 천상에서 추락한 천사인가?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 악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며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왜 사람들을 현혹해 정기를 빨아먹는 몽마 역시 악마지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악마는 본래 인간을 속여 영혼을 가져가니 당연히 외모가 매력적인 쪽이 사람을 속여 먹기 더 쉬울 터다.
“······나는 너와 싸울 마음이 없다.”
“당연히 없겠지. 나 같아도 스스로 불구덩이로 몸을 던지는 선택은 안 할 거야.”
김창은 반신이다. 대악마 따위가 어찌해볼 상대가 아니다.
“김창, 나는 네가 승천자가 되기 위해 신성을 모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신성을 얻기 위해선 강적들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도 알지.”
“알고 있으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얌전히 죽어주면 고맙겠는데.”
“내 하나 충고하지. 그만둬라. 승천자가 되려는 걸 그만둬. 이건 내가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뜬금없는 소리에 김창이 미간을 좁혔다. 승천자가 되는 걸 그만두라고? 자신이 정말 승천자가 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제쳐두고서, 천상의 신좌를 차지하여 만인의 우러름을 받을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 자식 이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는 거 아닌가? 김창이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자 마하칼라인이 입을 열었다.
“날 봐라. 나는 대악마라 불리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다른 대악마와는 다르다.”
“굳이 설명 안 해도 일단 생김새부터가 다른데. 너도 뭐 마족 출신이냐?”
“나는 마족이 아니다. 악마도 아니지. 나는······.”
나는 뭐? 지금 스무 고개라도 하자는 건가? 김창이 불만스럽게 칼자루를 매만지고 있을 때, 마하칼라인이 오랜 비밀을 고백하듯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한때 승천할 자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 네가 죽였던 요안니스보다도 더 오래전에 존재했던 승천할 자.”
이건 아무리 김창이라도 당황할 만한 소리다. 생긴 거 보고 보통 악마는 아니리라 생각했는데 이게 뭔?
차라리 천상에서 떨어진 천사라고 하면 그럴듯하겠는데 뜬금없이 승천할 자가 어쩌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김창은 물론이고 레올까지 놀라서 마하칼라인을 쳐다보고 있으니 대악마가 말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시절의 나는 승천할 자 중에서 가장 미숙했다. 승천을 위한 싸움은 본래 일정 숫자 이상의 승천할 자가 모여야 시작이 되는데, 나는 가장 늦게 승천할 자가 되었지. 다른 승천할 자들이 보기에 나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고 당연히 제일 먼저 죽음을 맞았다.”
그럼 죽은 이후에 지옥으로 떨어져 대악마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걸까? 힘만 있으면 악마가 아니더라도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영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보통 지옥에 떨어지는 건 죄를 짓거나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경우인데, 그럼 마하칼라인은 어느 쪽이었던 걸까?
설마 승천할 자가 악마 따위에게 영혼을 바치진 않았겠지······. 마하칼라인이 말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지상에 머물렀다. 그건 내가 생전에 지옥의 대악마와 했던 거래 때문이었지. 나는 내가 다른 승천할 자와의 싸움에서 죽는 걸 대비하기 위해 영혼을 여러 조각으로 쪼갰다. 언젠가 기회를 노려 부활하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생각한 대로 일이 잘 흘러가진 않았다. 나는 부활할 수 없었고 쪼개진 영혼의 조각만이 지상을 떠돌아다녔다.”
정말로 대악마와 거래했을 줄은 몰랐는데. 그땐 만네르헤임이나 칼레드리온, 헤인리히스 외에도 다른 악마가 있었던 걸까?
어쩌면 마하칼라인이라는 이름도 지옥에 떨어진 승천할 자가 대악마를 죽이고 빼앗은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을 쪼개? 요안니스도 그거 비슷한 짓을 하더니만.”
싸움에 질 걸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두는 승천할 자들의 공통된 버릇인가? 그런 짓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낫지 않나?
김창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서.”
“부활할 수 없게 된 나는 그저 승천할 자들의 싸움을 보기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 승천할 자가 승리를 거머쥐고 승천 의식을 치르는 걸 조용히 지켜봤지. 마치 천상으로 향하는 길이 뻗어 나오는 것처럼 하늘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지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오던 때······.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황홀경을 느꼈고 나도 모르게 새로운 승천자의 뒤를 따랐다.”
“그러니까 승천자가 천상으로 올라가는 걸 너도 뒤따라갔다는 소리냐?”
“···그래. 나는 비록 경쟁에서 졌지만 다른 승천할 자들과는 다르게 천상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물론 부정한 자가 천상에 오른 것을 들켜 곧 지옥으로 쫓겨났고, 그곳에서 나와 거래했던 대악마를 죽이고 새롭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하칼라인이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김창, 내가 천상에 올랐을 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아나?”
“글쎄, 억울함? 저 자리가 내 것이어야 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
마하칼라인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허무였다. 또한 공허였지. 영혼이 떨릴 정도로 압도적인 공허.”
“뭐?”
마하칼라인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천상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천사들? 꿀과 젖이 흐르는 땅? 달콤한 과실? 황금 궁전? 아니, 아니야, 그 어떤 것도 아니야. 저 위에는······.”
마하칼라인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은 지옥을 넘어 지상의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저게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하칼라인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되는 대로 지껄이는 건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마하칼라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는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현자가 으레 그러하듯 허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신이 되려 하지 마라. 승천하려 들지 마. 신성을 모으지도 말고 승천할 자와 싸우지도 마. 대악마를 죽이려 하지도 말고. 신과 같은 권세를 누리길 원한다면 지금 여기서 멈춰라. 그저 반신의 격에 오른 것에 만족해.”
그러니까 천상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이 천상이라고 하면 으레 생각하는 거대한 황금 궁전과 아름다운 천사가 없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저 위에는 대체 뭐가 있는가? 그저 공허뿐? 그게 사실이라면······.
김창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마하칼라인은 그 침묵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다. 충격적이겠지. 너는 신이 되기 위해 싸워왔는데 갑자기 신이 되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허탈할지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천상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러한 감정을 느꼈······.”
“어렸을 때 구름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면 구름 속에 착지할 수 있을까? 그러면 그 안에서 뛰어놀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말에 마하칼라인이 미간을 좁혔다. 비행기가 뭔지는 일단 제쳐두고서,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그런데 크고 나서 알게 됐어. 구름은 그냥 수증기의 집합체일 뿐이고 저 위에서 뛰어놀 수 없다는 걸 말이야.”
“지금 무슨 말을······.”
“사람 사는 세상은 원래 다 똑같아. 여기라고 해서 하늘에 수증기가 아니라 진짜 양털을 갖다 붙여두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럼 당연히 저 위에 건물을 지을 수도 없을 거고 사람들이 살 수도 없겠지. 천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그거야 조금만 생각하면 당연한 일 아닌가?”
마하칼라인이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지만 김창은 겁을 먹지 않았다.
“기어코··· 기어코 날 죽이겠다는 거구나! 아무 의미도 없는 승천 때문에!”
“새끼야, 요안니스는 승천자가 되려고 천 년을 숨어 지냈어. 말조심해.”
“닥쳐라! 반신이라고 해도 결국 그 근본은 인간일 뿐이었던 건가! 아주 탐욕스럽고 당장의 이익만 탐내며 멀리 보질 못하는군!”
“난 승천자가 되겠다고 한마디도 한 적 없어. 내가 널 죽이는 이유는 단 하나야.”
마하칼라인이 지옥 마력을 끌어올리는 가운데 김창 역시 반신의 힘을 해방했다.
순간 눈이 시릴 정도로 창백한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것은 요안니스와의 싸움에서 일시적으로 반신의 격에 올랐을 때 몸에 익힌 기술.
이제 완전한 반신이 되어 자유자재로 벼락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김창이 마하칼라인을 향해 칼을 겨누며 말했다.
“난 돈 받은 만큼 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