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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건 어떤 상황에서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용기를 고취하기 위해 자주 하는 말이지만 그게 상황을 타개하는 만능의 열쇠가 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엔 길고 짧은지 굳이 대보지 않아도 아는 일들이 많으니까.
가령 코끼리와 쥐 중 누가 더 큰지 서로 대봐야 아는 걸까? 아니면 뱀과 지렁이 중 누가 더 긴지 꼭 대봐야 알 수 있는 걸까?
그런 건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말하는 건 오만을 넘어선 만용이다.
바로 지금 벌어진 반신과 마족의 싸움처럼.
“커헉······.”
레올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거기선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당장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모습이지만 레올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건 마족의 끈질길 생명력 덕분이 아니라 단순히 김창의 자비 덕분이었다.
“왜 살려주는 겁니까? 마음만 먹었다면 단칼에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김창은 강하다. 그는 승천할 자가 되기 전에도 대악마의 기수를 하나 죽인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반신의 격에 올랐으니 레올을 상대하는 건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정말 레올을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칼 몇 번 휘두를 것도 없이 단칼에 그 머리를 잘라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럴 수 있음에도 일부러 상처만 입히며 무력화시킨 건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난 돈 받은 만큼 일한다고 했을 텐데. 너 죽여달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굳이 왜 죽이나.”
고작 그런 이유로······. 레올은 그게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말임을 안다. 김창이 자신을 살려주는 건 돈 받은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뭘 원하십니까? 아니, 이런 질문을 별 의미가 없겠군요. 원하는 것이야 한 가지뿐일 테니.”
“그래, 내가 원하는 건 한 가지뿐이야. 그리고 넌 그걸 내게 줄 수 있지. 레올,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기회다. 나랑 칼을 맞대고도 살아남은 놈은 별로 없으니 이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야. 살려줄 테니, 네 주인이 있는 곳을 말해.”
레올은 물가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새된 숨을 내뱉었다. 그는 저 무시무시한 반신이 정말로 자신에게 목숨을 건질 기회를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확실히 흔치 않은 기회였다. 김창과 같이 다닌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꼭 그래야만 하는 겁니까?”
영문 모를 질문에 김창이 되물었다.
“뭘?”
“꼭··· 만네르헤임 님을 죽여야만 하는 겁니까? 지옥의 대악마를 반드시 몰살해야 하냐고 묻는 겁니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만네르헤임 님은 당신의 강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더라도 굳이 지상에 손을 뻗으려 들지 않겠지요.”
레올이 게다가 하고 말을 이었다.
“다른 대악마가 모두 죽었으니 만네르헤임 님은 지옥의 왕이 되실 겁니다. 이젠 지상에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겠습니까? 당신이 승천하기 위해 신성을 모으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충분하지 않습니까? 신성이 더 필요하다면 다른 승천할 자를 죽이면 될 일 아닙니까?”
김창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어째서요?”
“의뢰를 받았으니까.”
레올은 김창이 돈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옥까지 찾아와 마하칼라인을 죽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인간이다. 남들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내는 인간.
그런 사람에게 설득을 하려고 해봤자 들어먹을 리가 없다. 레올은 온몸에서 피를 쏟아내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당신이 제 일을 하듯, 나도 내 일을 할 뿐······.”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기어코 싸우겠다고? 김창이 한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제법 마음에 드는 놈이라서 살려주려 했는데 이러면 어쩔 수가 없군.
레올이 마지막 힘을 짜내 김창에게 달려들었고 그 순간 칼날이 번쩍였다. 서걱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간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길고 짧은지 대볼 것도 없던 싸움이었다. 싸움을 지켜보던 서하연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자였군.”
“싹싹한 놈이라 죽이기 싫었는데.”
김창은 작게 혀를 차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거기엔 겁에 질린 악마들이 잔뜩 있었다. 하기야 제 주인이 죽는 걸 봤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다 죽여버리기 전에 썩 꺼져.”
악마들은 그 말에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도망치고 엉망이 된 거리에는 김창과 서하연만이 남았다.
이젠 마족으로 변해버린 서하연이 김창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만네르헤임인가 하는 놈도 죽여야 하는 것 같은데.”
“걔 찾으러 다녀야지. 지옥에서 워낙 유명한 놈이라 조금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걸.”
“어디 숨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숨기만 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걔도 알 거다.”
서하연이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김창은 이제 이 도시를 떠나 만네르헤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그가 몸을 돌려 성문 쪽으로 향할 때였다.
“대단하군. 정말 내 요구대로 모든 대악마를 쓰러트렸어.”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박쥐의 날개를 단 주먹만 한 눈알이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생김새였다.
“만네르헤임이냐?”
“그래. 일단 수고했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김창.”
눈알이 마치 인사를 하듯이 몸을 가볍게 숙이는 걸 본 김창이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기어코 얼굴은 안 보여줄 셈이냐?”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굳이 보여줘야 하나? 그럴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
“이유, 나한테는 있는데. 그게 뭔지 궁금하지 않나?”
만네르헤임이 웃었다. 크게 웃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잔잔하게.
“나도 알 것 같은데. 네가 날 찾아올 이유야 뻔하지, 칼잡이야. 너는 지금 날 죽이려 하고 있잖느냐.”
갑작스럽게 핵심을 찌르는 말에 김창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 그대로 말할 뿐이었다.
“알고 있었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나는 적이 많은 대악마야. 내가 너한테 돈을 주고 다른 대악마를 죽여달라고 했듯이, 다른 누군가도 네게 돈을 주고 날 죽여달라고 했을 게 뻔하잖나.”
똑똑한 친구로군. 김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어디 숨었나, 만네르헤임. 숨는다고 끝날 일이 아닌 걸 잘 알잖아. 그만 얌전히 나와라.”
“그래, 확실히 숨는다고 끝날 일은 아니지······.”
“네 친구인 마하칼라인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너는 대악마라는 놈이 자존심도 없이 도망치겠다는 거냐?”
싸구려 도발이지만 대악마로서는 무시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도발이라는 건 원래 노골적이면 노골적일수록 수치심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지옥의 문을 열고 나왔다가 다시 지옥으로 도망치려 했던 헤인리히스가 바로 그랬다. 그는 싸구려 도발에 넘어와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까.
“그런 도발로 날 꾀려 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건 너무 싸구려 같군. 김창,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널 이길 자신이 없다.”
이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데. 김창은 약간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난 적 중에는 자신보다 약한 놈들이 제법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누구도 아닌 대악마가 저런 말을 하다니? 저 녀석은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만약 자존심도 다 내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려는 거라면 참신하다고 하겠다.
“그거야··· 뭐 당연히 그럴 테지. 내 손에 대악마 셋이 죽었는데 너라고 다를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 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대악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반신을 이길 정도로 강하진 않다. 그래서 난 고민했지. 저 김창이라는 놈은 분명 다른 대악마 셋을 다 죽이고 나면 나까지 죽이려 들 텐데, 그럼 난 뭘 어째야 하나? 나는 지옥에서 오직 그것만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김창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 걸 찾았나? 날 죽일 방법을 찾았느냐고.”
“그래, 찾았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결국엔 답을 얻어냈다.”
찾아냈다고? 김창이 잠깐 당황했다. 무려 반신의 격에 오른 자신을 죽일 방법이 있단 말인가?
설마 요안니스를 습격했던 그 승천할 자와 손을 잡은 건 아니겠지. 김창은 그건 아마 아니리라 생각했다.
승천할 자에게 있어서 대악마는 그냥 막대한 신성을 가지고 있는 먹잇감에 불과하다.
승천할 자와 손을 잡고 자신을 무찌르더라도 결국엔 또 승천할 자와 싸워야 하니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럼 만네르헤임이 찾아낸 방법이라는 건 대체 뭔가?
“김창, 지옥과 지상은 서로 같은 위상 위에 있지만 물리적으로 분리된 별개의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김창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게 뭐.”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세상이 하나의 문을 통해 연결될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단지 마법의 힘 때문에? 아니야. 그건 대악마의 힘 때문이야.”
“뭔 소리야, 그게?”
만네르헤임이 흐흐흐 하고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옥과 지상은 같은 위상 위에 있다. 그러나 서로 겹쳐 있진 않아. 그런데도 지옥의 문을 열었을 때 서로 왕래할 수 있는 것은 대악마가 억지로 두 세상을 직선상의 위치에 겹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물속을 흐르는 부유물처럼 서로 스치지도 않고 지나쳐야 할 두 세상을 억지로 고정해 두고 있다고.”
“뭐?”
“대악마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그거야 간단하지. 우리의 숙원은 지상으로 진출하는 것이고, 그걸 위해선 지옥의 문을 열 필요가 있었으니까. 우리의 목적은 일치했고 한 가지 ‘합의’를 만들어냈다.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두 세상을 직선상의 위치에 고정하자고. 그 합의 덕분에 우리는 악마숭배자들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번번이 지옥으로 쫓겨나긴 했지만 말이야.”
김창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는 얼굴로 만네르헤임을 쳐다봤다. 그걸 본 만네르헤임이 더욱 크게 웃었다.
“이게 지금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다른 대악마 셋이 죽고 남은 대악마가 나 하나뿐인 이 시점에서 그게 대체 뭘 뜻하는지 아직 모르겠어?”
만네르헤임이 웃겨 죽겠다는 듯 큭큭 소리를 연발했다.
“우리가 만들어낸 합의는 오직 대악마의 의지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모든 대악마가 죽거나, 또는 합의에 대한 지지를 거두게 되면 두 세상의 연결은 완전히 끊어진다는 소리다. 그러면 지금 지옥의 상황은 어떠하지? 다른 대악마 셋이 죽고 나 하나만이 남은 상황에서 합의는 어찌 되리라 생각하나?”
김창이 설마 하고 중얼거릴 때였다.
“하나 묻지, 김창. 만약 지상의 내 숭배자들이 날 소환하고, 내가 합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하나?”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고? 그거야 뻔하다. 만네르헤임은 지상으로 올라갈 테고, 지옥과 지상의 연결은 완전히 끊겨 다시는 문이 열리지 않게 된다.
그리고 지옥에 남은 김창은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이곳에 갇히게 된다. 그것도 영원히.
“김창, 너는 지옥에서 살아라. 나는 지상으로 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