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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39화 (13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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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러냐······.”

사실 김창으로서는 본 적도 없는 악마가 대악마가 되는 것보다 아는 사람이 대악마가 되는 쪽이 훨씬 더 좋다.

그는 딱히 지옥의 정세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그저 새로운 대악마가 지상으로 향하는 문만 열어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서하연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대악마가 되겠다고 나섰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분명 기쁜 일이긴 한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했는데 자기 혼자 김칫국 마신다는 게 이런 건가? 누가 시켜주겠다고 말이나 했나······.’

김창은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서하연을 슬쩍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네가 대악마가 되겠다는 거냐? 설마 날 위해 희생하려는 건 아닐 테고.”

“그거야 내가 외눈의 마왕이니까?”

그냥 중2병이 악화됐을 뿐이었군. 김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놈이라면 나중에 배신하지도 않을 테니 차라리 잘 됐다.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자. 우린 만네레헤임의 영지로 가서 대악마가 되는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다시금 합의의 효력을 발동시켜 지상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그리고 너는······.”

“나는 새로운 대악마로서 지옥을 지배한다!”

만약 서하연이 대악마가 되면 지옥은 이제 그녀의 영토가 되는 셈이다. 한석구가 이걸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원탁이 드디어 지옥까지 진출했구나 하고 기뻐할까? 아니면 골칫덩이가 죽어서까지 원탁 얼굴에 먹칠하고 다닌다고 화를 낼까?

어느 쪽이든 일단 지상으로 나가야 알 수 있는 일이다. 김창이 늑대의 배를 세게 걷어차며 말했다.

“새벽에 도착한다고 했지? 시간도 어중간하니 휴식 없이 쭉 가자.”

반신인 김창은 물론이고 새롭게 마족의 몸을 얻은 서하연 역시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몇 시간 째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지만 두 눈에는 아직 생기가 가득했다. 온갖 기괴한 지옥의 생물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리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것도 감히 그들에게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몹시 호전적이라 움직이는 것만 보면 무조건 달려드는 지옥의 괴물들까지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저들이 자신의 먹잇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잡아먹히는 건 이쪽이라는 것도 알았다.

천상의 신좌에 오를 반신과 지옥의 왕이 될 마족,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려오는 두 존재가 여전히 지옥을 달리고 있었다.

“여긴가?”

잠시 쉬지도 않고 열심히 달리던 중에 저 멀리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레올이 말하길, 성벽이라는 건 대악마가 이곳이 자신의 영지임을 알리고 제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라 했던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만네르헤임은 상당히 강력한 대악마였던 게 분명했다. 성벽은 하늘을 찌를 것만 같고 성문은 몹시 두꺼워서 마치 바위 같다.

레올은 대악마를 상대로 성벽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지만 저만큼이나 튼튼하다면 아주 의미가 없진 않을 듯 보였다.

이 정도의 성벽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대악마라면 상당히 강했을 텐데, 그걸 죽이지 못해서 몹시 아쉽다.

김창이 혼자 쩝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서하연이 소리쳤다.

“여기가 맞다! 들어가자!”

지금은 새벽인 만큼 성문은 당연히 닫혀 있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거긴 열려 있었다. 성벽 위를 보니 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수비군 역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갔나? 아니면 군 기강이 해이해져서 다들 놀고 있는 건가?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문을 통과하자 웬 곡소리가 들려왔다.

“초상이라도 났나? 왜 다들 울상이야.”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엔 악마와 마족, 그리고 온갖 괴물들로 득실거렸다. 그들 모두는 황망한 얼굴로 아이고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장례라도 치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창이 당황해서 서하연에게 물었다.

“얘네 왜 이래?”

“나도 모르지? 여기 와본 건 나도 처음이니까. 어쩌면 새벽만 되면 으레 하는 행사일수도.”

악마는 잠이 없나? 새벽만 되면 바깥에 나와서 곡소리 내는 게 행사라고? 그것 참 밥맛 떨어지는 짓거리다.

김창이 서하연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아무한테나 가서 물어봐.”

“내가 왜?”

“왜?”

김창이 눈을 부라리자 서하연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아니, 하긴 할 건데 그러니까 왜 내가 해야 하냐고?”

“난 인간이라서 말 걸면 괜히 시비 걸려. 그런데 너는 마족이니까 그런 일 없을 거 아니야.”

서하연이 입을 비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마족 한 명에게 다가가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물어보고 오니 만네르헤임 때문이라는데.”

“걔가 왜?”

“부하들은 죄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 지상으로 튀었으니 다들 혼란에 빠진 거지. 이걸 현실로 따지자면 회사 사장이 외국으로 야반도주한 셈 아닌가? 이게 부실기업이었으면 회사 직원들도 올 게 왔구나 할 텐데, 멀쩡히 잘 돌아가는 우량기업의 사장이 튀었으니 다들 더 혼란스러운 모양이야.”

비유 잘하는데. 서하연의 말대로 만네르헤임의 영지가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다면 대악마가 도망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제 한 몸 간수하기 힘든데 부하들까지 뭔 수로 챙기나?

하지만 만네르헤임의 영지는 모든 경쟁자가 제거된 지금 말 그대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대악마가 도망쳐?

이러면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바보라도 알 수 있다.

악마들은 천상의 신이 지옥에 직접 개입하기로 한 게 아니냐, 지옥과 천상의 통합으로 우리는 죄 실업자가 되는 거 아니냐 등등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나누고 있었다.

물론 만네르헤임이 왜 도망갔는지 잘 알고 있는 김창으로선 코웃음이 나올 뿐이었지만.

“영주궁으로 가자. 거기 가면 뭐가 있겠지.”

김창과 서하연은 곡소리를 무시하며 영주궁으로 곧장 향했다. 거대한 성벽을 세울 만큼 강력한 세를 거느리고 있던 만네르헤임의 영주궁은 역시나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다.

“여기도 경비병 하나 없네. 하기야 지켜야 할 사람도 없는데 있으면 뭘 하겠냐마는.”

영주궁에는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김창과 서하연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악마가 사는 곳이라 그런지 엄청 크군. 그 덩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영주궁은 아주 컸다. 대악마가 돌아다녀야 하는 곳인 만큼 아주 크게 지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김창과 서하연은 마치 거인의 집에 들어온 난쟁이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저쪽으로 가보자.”

“···잠깐, 길은 알고 가는 거겠지?”

“알겠냐.”

왜 당당한 거지. 서하연이 뒤에서 구시렁대면서도 김창을 따라 걸었다.

“여기가 접견실인 것 같은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화려하게 꾸며진 방 하나가 보였다. 역시나 거대한 문이 달려 있었는데 사람 손으로 밀어선 꿈쩍도 하지 않을 듯 보였다.

이 정도 크기의 문이라면 열쇠는 거의 사람만 하지 않을까. 서하연이 멍청하게 헤 소리를 내고 있는 가운데 김창이 빠르게 칼을 뽑았다.

칭!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고 문 아래에 네모난 통로가 생겨났다.

“깜짝이야!”

“멍하니 있지 마라. 칼 맞는다.”

서하연이 속으로 욕을 삼켰다. 두 사람은 임시로 만든 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른 방이 으레 그러하듯 그 안 역시 텅 비어······.

“웬 놈들이냐?”

······있진 않았다. 누군가 있었다. 김창이 미간을 좁히며 목소리가 날아온 쪽을 쳐다봤다.

거대한 옥좌. 원래라면 만네르헤임이 있어야 할 곳엔 웬 마족 하나가 있었다.

“웬 놈들이냐고 물었다!”

쩌렁쩌렁한 외침에 공간이 흔들렸다. 저 작은 덩치로 이 큰 공간을 울릴 만한 외침을 뱉어내는 걸 보면 저 녀석은 상당한 강자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저 남자는 만네르헤임의 기수일지도 모른다. 마족인 레올 역시 만네르헤임의 기수였으니까.

“그러는 넌 누구냐?”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라! 내가 먼저 물었다!”

빡빡한 녀석이로군. 김창이 어깨를 으쓱인 후에 대답했다.

“여기 먹으러 온 사람들.”

“뭘 먹어?”

“대악마 자리 먹으러 왔다고. 왜, 불만 있나? 불만 있으면 내려와.”

마족이 듣기에 건방지다 못해 무례한 발언이었음이 분명했다. 김창은 당연히 저 마족이 벌컥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흐하하하!”

그러나 호탕한 웃음이 날아오자 김창이 눈썹을 까딱였다.

“재밌는 녀석이로군! 만네르헤임이 갑자기 도망쳐 버리고 이 땅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너희가 그 혼란을 잠재울 만한 실력이 있다는 거냐?”

서하연이 나서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마족이 크게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놈들이 감히 대악마 자리를 노려?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역시 말로는 해결이 안 되나? 김창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건방져? 그럼 내려와. 한 번 붙자.”

“나는 도망자 만네르헤임의 기수 중 하나인 시온! 이젠 이 땅을 지켜야 할 수호자다! 너, 건방진 도전자야! 네가 감히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시온이 옥좌에서 훌쩍 뛰어내려 성큼성큼 걸어왔다. 김창도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보아하니 칼잡이 같군. 칼을 뽑아라. 그 정도는 기다려줄 테니.”

시온의 말에도 김창은 칼을 뽑지 않았다. 그걸 도발로 여긴 시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칼! 뽑으라고!”

“내가 칼 뽑으면 넌 뒈져, 이 새끼야.”

“뭔 헛소리냐! 칼을 뽑지 않겠다면 그대로 죽어라!”

화를 참지 못한 시온이 김창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톱이 쭉 자라나서 마치 칼처럼 변했다.

손톱 끝이 녹색으로 빛나는 게 저기에 베이거나 찔리면 독에 감염될 게 분명해 보였다. 아마 아주 고통스러운 독이겠지.

김창을 그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냥 정면에서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다.

“···어?”

손톱이 부러질 때의 고통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냥 부러지기만 한 게 아니라 아주 뽑혔을 때의 고통이 너무나 끔찍하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 시온 역시 느끼고 있었다. 빠르게 질주하는 손톱을 향해 김창이 날린 주먹.

그것이 강철 같은 강도를 가진 손톱을 완전히 박살 내고 뿌리까지 밀고 들어왔다. 끔찍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치고 들어온 김창의 왼손이 시온의 멱살을 붙잡았다.

몸이 붕 날았다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땅이 부서지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시온이 컥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얼굴에 단단한 주먹이 박혔다. 아니, 이건 주먹이 아니라 망치였다.

겨우 인간의 몸으로는 감히 보여줄 수 없는 괴력이 쉴 새 없이 시온의 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미 땅속에 박혀 있던 시온의 몸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고 주변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엉망이 되었다.

김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단단히 멱살을 붙잡은 손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시온은 이젠 컥 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한참을 얻어맞던 그의 몸이 다시 위쪽으로 떠올랐다. 얼굴이 퉁퉁 붓다 못해 일그러진 시온이 입과 코에서 피를 뱉어냈다. 안쪽에 고인 피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김창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격의 증명이 더 필요한가?”

김창이 멱살을 놔주자 시온이 비틀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비장한 얼굴로 쳐다보자 김창은 어쩌면 이 녀석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 얼굴은 마치 질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달려들던 레올의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마족이라는 건 원래 충성심이 강한 건가? 그래서 만네르헤임이 자기 기수를 둘 다 마족으로 채운 것일지도······.

“혹여 엉덩이가 차가우실까 봐 의자를 데워두고 있었습니다. 자, 얼른 옥좌에 오르시지요.”

아무래도 꼭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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