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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40화 (1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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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저리 비켜.”

김창이 얼른 나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시온이 공손히 자리를 비켰다. 그의 뒤를 따라서 서하연이 옥좌 쪽으로 걸어가자 시온이 어허 소리를 냈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아무리 대악마가 되실 분의 수족이라 하여도 옥좌까지 나아가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대악마가 되는 건 내가 아니라 걔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보내.”

시온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방금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옥좌에 오르시지요.”

만네르헤임이 시온을 부하로 삼은 건 아첨을 잘 떨어서인가?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옥좌까지 나아갔다.

서하연과 함께 옥좌를 마주 보고 선 그는 흐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서 대악마가 되는 방법은 뭐지? 단순히 옥좌 위에 오른다고 되는 것 같진 않은데.”

옥좌를 차지하는 게 대악마가 되는 조건이라면 시온은 진작 대악마가 돼야 했으리라.

김창이 가만히 옥좌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았다. 거기엔 살금살금 도망치려던 시온이 있었다.

“이리 와.”

“아, 저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옥좌에는 대악마 외에는 가까이 갈 수 없는지라······.”

“그럼 아까 옥좌 위에 올라가 있던 건 뭔데? 한 대 맞고 올래, 두 대 맞고 올래?”

“안 맞고 가겠습니다.”

시온이 터덜터덜 김창 가까이로 걸어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내가 듣자 하니 만네르헤임이 야밤에 도주하는 바람에 영지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고 하던데, 맞나?”

“네, 맞습니다. 하여튼 만네르헤임 씹새, 도망칠 거면 언질이라도 주든가 해야지 자기 혼자 홀랑 튀어버리는 걸 보면 아주 개새끼입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기 주인이었는데 이토록 신랄하게 욕을 내뱉는 걸 보면 확실히 시온은 레올만큼 충직한 부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원래 이런 놈은 정권이 바뀌면 바로 숙청 대상인데 서하연은 아마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건 딱히 그녀가 정이 넘쳐서 그런 건 아니고.

‘개눈깔 이 멍청한 년은 귀가 얇아서 자기 칭찬에 약하지. 시온 같은 놈이 떠받들어주면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 못 하고 헤벌쭉 웃고 있을걸.’

서하연이 지상의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옥의 왕이 되는 것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옥을 말아먹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대악마라는 작자들이 지상에 올라와서 하는 짓거리를 생각하면 새로운 대악마는 약간 멍청한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김창이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온이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옥은 지금 혼란스럽다 못해 위험한 상황입니다. 웬 정신 나간 놈이 대악마를 만나는 족족 죽여버리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유지 중이던 지옥의 균형이 전부 깨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만네르헤임 씹새까지 도망쳤으니 원······. 제 생각인데 아마 그 새낀 자기도 죽을까 봐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그 정신 나간 놈이 나다, 이 새끼야. 김창은 그 말을 하려다가 괜히 불난 집에 기름만 붓는 꼴이 될까 입을 다물었다.

대신 서하연이 입을 열었다.

“만약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지?”

“그거야 전쟁이지요. 물론 지옥은 늘 내전 중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땐 대악마라는 지휘관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대악마가 단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끝 없는 전쟁이 이어질 겁니다. 적도 아군도 없이 그저 죽고 죽이기만 하는 전쟁.”

“그건 막아야겠군. 시온이라고 했던가? 너도 그런 전쟁에 휘말리긴 싫을 테지?”

“암요, 당연한 말 아닙니까? 제가 뭐 때문에 그런 일에 휘말려야 합니까? 전 오래 살길 원합니다.”

서하연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 특별히 자비를 내려 널 살려주도록 하지.”

“네? 아니, 그게 뭔 개소리······.”

시온이 이 여자 왜 이러냐는 시선으로 김창을 쳐다봤다. 한숨과 함께 김창이 말했다.

“내가 아까 말했지, 걔가 대악마가 될 거라고. 우리 목적은 하나다. 그 녀석을 대악마로 만들고 지옥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

“그게 진심입니까?”

“왜, 저 녀석이 대악마가 되는 걸 인정하지 못하겠다 이거냐?”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다른 악마들이······.”

“아하, 또 자격의 증명이 필요하다는 거냐. 그거라면 문제없지. 악마들 모아.”

시온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아까 자격의 증명 운운했다가 김창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기억이 있었다.

“자격의 증명은 저 마족이 직접 해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내가 쟤를 왜 도와. 그리고 내 장담하는데, 지금 여기 있는 애들 떼로 덤벼도 저 녀석 상대 안 돼.”

저 여자가 그 정도로 강하다고. 시온이 서하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뭘 봐.”

서하연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시온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악마들을 소집하겠습니다. 광장으로 나가시지요.”

“도망치면 죽인다.”

“···저는 오래 살길 원한다니까요.”

시온이 접견실을 뛰듯이 나가자 김창과 서하연도 그 뒤를 따랐다. 길고 긴 복도를 걸으며 김창이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보기만 할 거다.”

“하! 너 따위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나약하지 않다!”

“또 깝치지.”

두 사람이 투닥거리며 복도를 나와 영주궁 입구에 섰다. 언덕 위에 지어진 영주궁은 저 아래의 대로를 훤히 볼 수 있었는데 길 끝에는 광장이 연결돼 있었다.

거기엔 악마며 마족, 그리고 시체 병사와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지옥답게 물 대신 피가 솟구치고 있는 분수대 위에서 시온이 소리쳤다.

“모두 정숙! 정숙해라!”

“시온! 우리를 불러서 뭘 하려는 셈이냐!”

“만네르헤임 님이 없다고 해서 네가 대장 노릇을 하려는 거냐! 레올이면 몰라도 너는 인정할 수 없다!”

“닥쳐라! 거기서 레올 이야기가 왜 나와? 닥치고 내 이야기나 들어!”

아무래도 시온은 다른 악마들한테도 별로 인망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수 출신인데 저 정도로 무시를 당할 줄이야.

“만네르헤임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고 지옥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나는 한때 만네르헤임의 기수였던 자로서 이 혼란을 수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까 네가 대장 노릇을 하려는 거 아니냐! 내려와!”

“아니니까 닥쳐! 큼,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래, 나는 이번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그게 무엇인 줄 아나!”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시끄럽던 광장이 조용해졌다. 거기 모인 존재들 전부가 시온이 말한 방법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시온, 네 주제에 재밌는 생각을 했구나! 그래, 머리 잃은 무리라고 해서 언제까지 머리가 없는 채로 살 수는 없지!”

“내려와라, 시온! 설마 겁쟁이처럼 거기서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진 않겠지?”

“시작은 언제냐! 이 멍청한 놈들을 죄다 쓸어버리고 내가 새로운 대악마가 되겠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멍청아!”

조용해졌던 광장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새롭게 대악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흥분해버리고 만 것이다.

시온은 그들을 조용히 시키는 대신에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아쉽지만 나는 기권이다! 나는 이미 한 번 져서 참가 자격을 잃었거든. 그러니 나 대신에 출전할 선수를 소개하지!”

뜬금없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시온에게 모였다.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소개하지. 새롭게 우리의 왕이 되실 분이다.”

시온이 몸을 돌려 두 손을 공손히 뻗었다. 손가락 끝에는 영주궁에서 내려와 광장 끝에 선 서하연이 있었다.

그저 칼 한 자루 들었을 뿐인 외눈의 마족. 여기 있는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당황한 자들이 많았다.

저 녀석은 누구지? 대체 누군데 시온이 기권까지 하면서 저 여자를 밀어주고 있단 말인가?

“시온, 장난하지 마라! 난 너와 싸우기 위해 여기 왔다! 당장 내려와!”

어떤 악마가 벌컥 화를 냈지만 시온은 무시했다. 그는 몸을 돌려 서하연에게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주군이시여, 대업을 이루소서.”

정말로 서하연에게 완전히 충성하는 듯한 모습에 많은 악마가 충격에 빠졌다. 시온은 일개 마족 따위가 아니라 만네르헤임의 기수다. 만네르헤임과 레올이 모두 죽은 지금 가장 대권에 가까운 존재인데 그런 그가 경쟁에서 스스로 물러나다니?

“다들 뭘 그리 놀라지? 지옥에선 오직 힘의 논리만이 옳다. 나는 나보다 더 강한 자에게 내 모든 걸 걸었을 뿐인데 그게 놀랄 만한 일인가? 하나 충고하는데, 너희도 무익한 경쟁에 나설 바에는 나처럼 일찌감치 기권하는 게 나을 거다.”

시온은 그 말을 하고서 분수대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정말 싸움에 끼지 않겠다는 듯 터덜터덜 걸어서 광장을 벗어나자 악마들의 당황은 분노로 바뀌었다.

“시온, 감히 우릴 우습게 알아!”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너도 죽여주마!”

“일단 저 여자부터 죽여!”

그리고 분노는 곧 서하연에게 집중됐다. 악마들은 서하연이 얼마나 강한지 몰랐지만 일단 죽여두고 시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설령 서하연이 시온이 장담한 만큼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쪽이 숫자에서 압도하니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저기······.”

광장을 벗어나 김창 쪽으로 다가온 시온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걸었다. 아까의 당당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의기소침한 모습이 제법 웃겼다.

김창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정말 저 여자가 우승하는 거 맞죠? 전 저기에 제 인생을 걸었습니다. 이거 안전한 거 맞습니까? 혹시라도 저 여자가 질 것 같으면 같이 싸워주거나 그런 건······.”

“세상에 무조건 따는 도박이 어디 있겠냐. 인생을 걸었다고? 도박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군.”

아니, 네가 걸라며? 시온이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김창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길 확률이 99%라고 하면 1% 확률로 질 수도 있지. 지금 네가 한 베팅은 그런 거야. 거의 확실하게 이기지만 1% 확률이 안 터질 거라는 보장은 없어. 그러니까 기도해. 주식 안 해봤나? 매일 차트 본다고 내릴 게 오르거나 오를 게 내리진 않으니까 그냥 묻어두고 기도나 해.”

주식이 뭔데? 차트는 또 뭐고? 시온은 김창의 말을 듣고서 어이가 없어졌다. 기도나 하라고? 지금 나는 그쪽 말만 믿고 인생을 걸었는데 그냥 기도나 해?

시온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먹을 쥐면 김창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상처가 욱신거렸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어디 냉수라도 떠올 데 없나. 분수대에서 피 떠와서 기도하는 건 좀 그런가.

시온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해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악!”

“커억!”

“물러나, 이 새끼 괴물이야!”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잔혹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팔이 잘린 악마, 머리가 떨어진 마족, 반으로 갈라진 괴물, 하반신을 잃은 채로 바닥을 기고 있는 시체 병사.

분명 일시에 서하연에게 달려들었던 자들이다. 그들 모두가 치명상을 잃고서 신음을 흘리고 있다.

“뭐냐, 아까의 그 기세는 다 어디 간 거냐. 덤벼. 덤벼서 네 자격을 증명해.”

서하연의 머리 주변으로는 어디서 주워온 건지 모를 칼 네 자루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 칼들은 서하연의 의지에 따라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주인을 방어하기도 하며 효과적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시온은 서하연의 안대에서 초록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걸 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강대한 마력이었다.

그녀가 그 마력을 폭발시키는 것과 동시에 칼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축하한다, 시온.”

시온은 김창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지금 서하연의 무력에 압도당했다.

“인생을 걸었다고 했지. 아무래도 인생 2회분 정도는 딴 것 같은데.”

시온이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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