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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떼를 습격한 늑대를 본 적이 있는가? 무력한 양을 무자비하게 물어뜯으며 학살을 벌이는 늑대는 그야말로 죽음의 화신이다.
끔찍한 공격 속에서 양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것뿐. 그들은 그저 어서 이 학살이 끝나기만을 기도하며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그와 같은 광경은 지금 지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일생을 늑대로 살아왔던 악마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양의 심정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습격한 늑대는 지금 여기 있는 양을 모두 죽여버리기 전엔 멈추지 않겠다는 듯 무자비한 학살을 이어가고 있다.
“하하핫!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꼴이 참 우습기도 하지! 다들 어딜 가는 거냐? 덤벼라! 덤벼서 날 즐겁게 해봐!”
네 자루의 칼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공격은 악마들이 눈에 보이는 족족 수십 조각으로 갈아버리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칼의 폭풍. 그 누구도 폭풍을 어찌할 수 없기에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공격에 당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 반격을 시도한 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기회를 노려 서하연의 빈틈을 찌르려 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사각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지만 서하연은 그게 없었다. 하늘을 떠다니는 네 자루의 칼이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모든 방향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다들 도망가는 거야! 숫자는 우리가 훨씬 더 많다! 몇 명만 희생하면 저 녀석을 붙잡을 수······.”
“그럼 네가 선두에 서라! 난 개죽음은 사양이다!”
“그래! 그런 소리를 할 거면 네가 선두에 서!”
이쪽은 다수고 저쪽은 겨우 한 명.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숫자에서 압도할 수 있지만 악마들은 서로 협력이 전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두에 서는 악마는 무조건 죽을 게 뻔하니까. 게다가 이게 만네르헤임이 내린 명령이었다면 기꺼이 수행했겠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이유도 없지 않나?
그런 이유에서 악마들은 전혀 뭉치지 못했다. 그리고 뭉치지 못한 조직은 훨씬 더 쉽게 무너졌다.
왜 양 같은 초식동물이 무리를 짓겠는가? 무리가 크면 클수록 맹수가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들은 그걸 모른다. 그들은 일생 늑대였으면 한 번도 양으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항복! 항복입니다! 제발 목숨만은!”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지던 중에 누군가 무기를 내버리고 서하연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마족이었는데 악마들조차 무력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더 버텨봐야 승산이 없으리라 여겼다.
갑작스럽게 투항자가 나오자 악마들은 당황했고 서하연은 씩 웃었다.
“항복하겠다는 건 내게 복종하겠다는 소리냐?”
“물론입니다. 제가 당신의 충직한 종복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내 이름은 서하연이며 또한 외눈의 마왕이다. 내 이름을 외쳐라. 저 멍청한 놈들이 전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마족이 벌떡 일어나 크게 만세를 외쳤다.
“외눈의 마왕 만세! 대악마 서하연 만세!”
그 외침은 수십 번의 칼질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양들에게 도망치는 것 외에 살 방법을 알려줬으니까.
“외눈의 마왕 만세! 저 또한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서하연과 출신이 같은 마족들은 대개 일찌감치 항복했다. 애초에 악마들과 경쟁해봤자 대악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서하연을 이길 자신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외, 외눈의 마왕 만세···. 대악마 서하연 님께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눈치를 보던 악마들도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몇몇 자존심 강한 악마들은 끝까지 남아 싸우길 주장했지만 서하연은 그런 그들의 주장에 무자비한 칼질로 대답했다.
“대악마 서하연 만세! 만세!”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을 경배하라!”
“만세! 만세!”
서하연은 결국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에 가까이 다가섰다. 수많은 악마를 죽이고 그 피를 듬뿍 뒤집어쓴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온이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경하드리옵니다, 주인님.”
“오, 시온. 내 충직한 부하. 이걸로 나는 대악마가 된 거냐?”
“대악마가 되기 위해선 악마 백 마리를 죽이고 그 피를 뒤집어써야 하며 고위 악마 열의 지지를 얻어내야 합니다.”
“악마 백 마리는 진작 죽인 것 같고······. 고위 악마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고? 그것도 열이나? 설마 내가 죽인 놈 중에 고위 악마가 있는 건 아니겠지?”
왠지 좀 강해 보이는 놈들을 많이 죽인 것 같은데? 서하연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과 동시에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고위 악마들은 모두 경험이 많고 노련한 선동가입니다. 항상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직접 나서진 않죠. 바로 저들처럼요.”
시온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모를 거대한 악마 열 마리가 있었다.
그들은 서하연과 시선이 마주치자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새로운 주인을 뵙나이다.”
이것으로 모든 조건은 갖춰졌다. 서하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끝이냐? 난 이걸로 대악마가 된 건가?”
“새로운 대악마의 탄생을 지켜보는 건 저도 처음인지라. 하지만 아마······.”
시온이 확신 없이 말끝을 흐리자 서하연이 얼굴을 찡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격통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크윽······.”
고통스럽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에 서하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서 꺽꺽 소리를 냈다.
시온이 깜짝 놀라 말했다.
“주인님?”
“크윽······.”
죽을 듯 끔찍한 격통이 서하연의 몸을 괴롭히는 가운데 갑자기 그녀의 등 뒤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뭔가 튀어나오려는 듯 근육과 뼈가 뒤틀리는 게 눈에 보였다. 시온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하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등 부분의 옷이 쫙 찢어지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이건······.”
빛조차 뚫지 못할 정도로 새까만 색상을 자랑하는 그것은 날개였다. 크고 날렵한 박쥐의 날개.
악마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마족은 가지지 못한 날개가 지금 서하연의 등 뒤에서 자라 있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일개 마족이었던 서하연이 완전한 악마로서 변이했다는 것.
새로운 대악마의 탄생이었다.
“대악마 서하연 만세······.”
시온이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는데 거친 숨을 내뱉던 서하연이 김창을 쳐다보며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봤느냐? 나는 이제 대악마다!”
어쩌라고. 김창은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참았다. 어쨌건 그녀를 대악마로 만든 건 자신의 필요 때문이지 않나.
이럴 땐 잘했다고 칭찬해줘야 하는 법이지만 그랬다간 또 기고만장해져서 깝죽거릴 게 분명하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김창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한다. 대악마가 됐으니 이제 여기서 전쟁을 하든 왕 놀이를 하든 네 알아서 해. 나도 굳이 건드리지 않으마. 대신 해야 할 일은 다 끝내고 나서 해.”
“나는 대악마다! 지옥 유일의 대악마! 감히 지옥의 왕에게 명령하지 마라!”
“왕도 칼 맞으면 죽어.”
“···농담이었다. 그래, 지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달라는 거였지. 그거라면 금방 끝내주마. 나도 네가 지옥에 있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
서하연은 이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다른 대악마의 영지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왕이 되리라.
그때까지 김창이 지옥에서 머물고 있으면 아무리 왕이라도 그의 눈치를 봐야만 한다. 그런 일은 사양이었으므로 얼른 그를 지상으로 내쫓을 필요가 있었다.
“이봐, 시온. 합의의 효력을 다시 발생시키려면 뭘······.”
“아니, 그건 묻지 않아도 된다. 대악마가 되니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군.”
서하연이 눈을 감더니 혼자서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김창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고 서하연이 곧 다시 눈을 떴다.
“기뻐해라. 이것으로 합의의 효력이 다시 발생했으며 지상과 지옥은 원래의 위치상에 고정됐다.”
겨우 이걸로 끝이라고? 만네르헤임이 지상과 지옥이 어쩌고 했던 설명에 비하면 너무나 간단히 끝이 나서 김창은 약간 맥이 빠졌다.
설마 그 멍청한 대악마는 이쪽에서 새롭게 대악마를 만들어내리라곤 생각조차 못 한 건가?
의뢰를 통해 다른 대악마를 모두 죽이고 가장 똑똑한 방법으로 자신을 엿 먹이는 걸 보고 상당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인 줄 알았는데.
하기야 만네르헤임도 지옥에 서하연의 영혼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고 그녀가 대악마가 되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을 터다.
이건 만네르헤임이 멍청했다기보다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치고 겹친 결과다. 그러니 그를 멍청하다고 욕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래서 일단 지상과 지옥을 연결하긴 했는데, 지상으로 향하는 문은 어떻게 열지? 지금까지 대악마들이 지상에서 문을 열었을 때만 위로 올라온 걸 보면 여기선 문을 못 여는 것 아닌가?”
김창의 질문에 시온이 답했다.
“지상에서 문을 여는 것보다 지옥에서 문을 여는 게 훨씬 더 힘들긴 합니다. 물론 열 수 있긴 한데 시간이 좀 많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넉넉잡아 1년?”
“1년?”
김창이 눈을 부라리자 시온이 큼 소리를 내며 말했다.
“···원래는 그 정도 걸리는데 지금은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요.”
“어째서?”
시온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문 열렸으니까요. 아무래도 지상에서도 줄곧 문 열려고 시도한 모양인데요. 마침 지금 합의의 효력이 다시 발생하면서 문이 열린 것 같습니다.”
하기야 한석구 입장에선 김창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셈이니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덕분에 1년이나 여기서 죽치고 있을 필요는 없어졌군.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지내라. 저 멍청한 애 좀 잘 봐주고.”
“···주인님 말씀하는 겁니까? 그 정도로 멍청해요?”
“한 번 죽더니 지능이 떨어진 건지, 애가 좀 멍청해.”
시온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야, 개눈깔.”
“개눈깔이라 부르지 마라! 나는 이제 지옥의 대악마니라!”
김창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나 간다. 괜히 지상에 올라와서 헛짓거리할 생각하지 말고 지옥이나 잘 다스려.”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제 진짜 간다.”
김창이 뒤쪽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고서는 아무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겨우 며칠 지옥에서 머물렀을 뿐이지만 지상이 참 그리웠다.
돌아가면 한석구가 대체 뭔 일이 있던 거냐고 타박하겠지. 그 잔소리도 며칠 안 들었을 뿐인데 제법 그립군.
김창이 혼자 웃으며 지옥의 문을 통과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낯익은, 그러나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광경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 창이 왔냐······.”
이곳은 분명 아는 곳이다. 원탁의 홀. 온갖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언제나 활기가 넘쳤는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싸늘함만 느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홀 한가운데는 한석구가 있다.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턱에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란 한석구가.
“뭐야, 이게···?”
이건 내가 알던 원탁이 아닌데? 김창이 당황하며 한석구를 쳐다보자 그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이야, 원탁 망했다.”
운석이라도 떨어졌나? 그게 왜 망해? 김창이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