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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아니면 지옥 갔다 돌아온 나 놀라게 하려고 몰래카메라라도 하는 건가?”
한석구가 술을 마치 물처럼 들이키며 끅끅 소리를 냈다.
“네가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몰래카메라 하는 것도 아니야. 진짜 원탁 망했어.”
김창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한석구가 저 정도로 침울해 하는 걸 보면 정말 원탁이 망하긴 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원탁이라는 게 망할 수가 있는 거였나? 자신이 잠깐 지옥 갔다 올 사이에 망할 조직이었다면 진작 망했어야 하지 않나?
“아니, 잠깐만······.”
김창의 머릿속에서 뭔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이 지옥에서 보냈던 잠깐의 시간이 여기선 잠깐이 아니었다면?
만약 지상의 시간이 지옥의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간다면 자신이 없는 새에 원탁이 망했어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한석구, 내가 없어지고 며칠이 지났지?”
“며칠?”
“그래, 며칠 지났냐고. 설마 몇 달은 지난 거냐?”
한석구가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서 대답했다.
“1년 정도 지났는데.”
김창이 신음을 흘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자신이 무려 1년이나 자리를 비웠다면 그 새 뭔 일이 터졌어도 이상하진 않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1년 만에 원탁이 망했다는 건 이상하지만.
“아무래도 합의의 효력이 사라지고 지옥과 지상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시간대도 뒤틀린 모양이군. 지금이야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을 테지만······.”
만약 지상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시온의 말대로 거기서 1년을 보냈어야 할 텐데, 그랬다면 그동안 한석구는 집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무리 그래도 원탁이 1년 만에 망할 수가 있나?”
한석구는 이젠 숨 쉬듯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끅 하고 작게 트림을 하고서 대답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 알고 있지?”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김창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원래 잘난 놈은 남들 시기를 받는 법이고 사람들은 잘난 놈 보면 흉보기 바빠. 못난 놈들은 자기가 잘난 사람이 될 생각은 못 하고 잘난 사람을 자기 위치까지 끌어내리려 하지. 세상 이치가 그래.”
“그래서.”
“그런 점에서 보면 원탁은 모난 돌이야. 남들 보기에 아주 거슬릴 만큼 툭 튀어나온 돌이지. 내 장담하는데 이 세상에 원탁에 호감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걸? 반대면 몰라도. 그런데 왜 원탁이 지금까지 정 안 맞은 줄 알아? 왜 자기 마음대로 설치고 다니는데 아무도 못 건드리는지 아느냐고.”
김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우리가 무서우니까.”
“그래, 맞아. 모난 부분 쳐내려고 정 들이미는 순간 바위가 갑자기 골렘이 돼서 덤벼들 텐데 뭔 깡으로 그런 짓을 하겠어? 아무리 실력 있는 석공이라도 정이랑 망치 들고 골렘이랑 싸울 수는 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도 우릴 못 건드리는 거야. 건드리면 일 커지니까.”
한석구가 흐흐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만약 골렘이 또 있으면? 저쪽에서도 골렘을 들이밀면 우린 어째야 할까?”
“설마 승천할 자가 원탁을 공격한 거냐?”
승천할 자 요안니스는 요정 대가문 중 하나인 딜루키둠을 공격한 적이 있다. 원탁이 딜루키둠 가문보다는 더 강하겠지만 그래도 상대가 승천할 자라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승천할 자라면 하이나 같은 놈을 말하는 거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우리 적은 우리 자신이야.”
“우리 자신이라면······.”
한석구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탁의 랭커 중 일부가 우리 배신하고 독립했다. 지금 우리 전쟁 중이야.”
김창이 두 눈을 부릅떴다. 랭커 중 일부가 배신했다고? 이건 지금까지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랭커들이 원탁을 배신할 이유가 있나? 걔넨 여기 붙어 있으면 놀고 먹으면서 돈 벌 수 있는데 굳이 왜?”
“왕 그 새끼 때문이야.”
“왕? 그때 만났던 국왕 걔?”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가? 원래 역사적으로 왕이 자기 왕권 강화하려고 새로운 세력 끌어와서 기존 세력 밀어내는 일 자주 있다고. 지금 우리가 당한 것도 그래. 우리가 왕 말 안 듣는 귀족들 싹 손 봐주고 다녔잖아? 덕분에 귀족들이 왕한테 함부로 못 대들게 됐지. 그런데 원래 사냥 끝나면 개를 삶아 먹는 법이라고, 왕이 이젠 우리까지 쳐내려 하더라고.”
“하지만 왕이 뭔 수로? 그 양반 내가 보니 딱밤 한 대 때리면 머리 터져 죽겠던데. 그런 사람이 뭔 수로 원탁을 쳐내?”
“내가 지난번에 그런 이야기도 했었지? 랭커들이 영주 자리 때문에 나한테 잘 보이려 안달 났다고. 그런데 사실 그 영주 자리라는 것도 왕이 내려주는 거거든?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나한테 잘 보여야 할 게 아니라 왕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거지. 왕도 그 사실을 알고 랭커들도 그 사실을 알아. 그러면 나한테 붙어 있을 이유가 있나?”
그러니까 랭커들이 배신한 이유는 영주 자리 때문이라는 소리다. 결국 영지라는 건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것이니까.
왕은 그 사실을 알고서 원탁의 랭커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였을 것이고 원탁은 순식간에 세력이 절반 수준으로 쭈그러들고 말았으리라.
“왕은 두 세력을 싸움 붙여서 공멸시키길 원할 거야. 그러면 이제 왕국 안에서 자기한테 대들 사람은 하나도 없어질 테니까.”
“그래서 1년째 전쟁 중이라는 거냐?”
“그래. 지금 나 몹시 우울해. 이거 이겨도 상처뿐이고 지면 죽음인데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어야 하나······.”
확실히 이런 상황이라면 원탁이 망했다고 징징대도 이상할 건 없다. 김창이 물었다.
“요정 왕국 쪽엔 도움 요청해봤나? 티샬레가 있잖아.”
“거기 도움 요청하면 그때부턴 원탁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 돼. 그럼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죄 죽을 텐데 그럴 수가 있나.”
“하기야 그런가. 그러면 우리 쪽에는 누가 남았지? 설마 우리가 열세거나 그런 건 아니지? 설마 정복자 같은 놈도 배신했다거나 하진 않았을 거 아냐.”
한석구가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나, 정복자, 하오성, 산자이, 김용걸까지 다섯.”
일반적으로 원탁의 랭커라고 부르는 건 상위 열 명이다. 그러니 이쪽에 다섯 명이 남았다면 적어도 수적으로 열세는 아니라는 뜻이다.
“황금성은? 걔도 배신했어?”
“걘 내가 영지 줬더니 그거 가지고 도박하다 잡혀갔어. 지금 왕궁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걸.”
“참 한결같은 새끼야.”
그럼 이쪽은 다섯이고 저쪽은 셋이니 수적으로 압도할 수 있을 텐데 한석구는 왜 이토록 침울한 것일까.
원탁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인간이니 동향 사람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몹시 우울한 것일지도 모른다.
김창이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그런데 왜 전쟁을 아직 질질 끌고 있는 거냐. 다른 건 몰라도 원탁엔 김용걸이 있잖아. 전장에서 걔만큼 강한 놈도 없을 텐데.”
“용걸이 저격 맞고 누워 있어. 랭킹 9위였던 활잡이 새끼 알지? 걔가 저격하고 튀었는데 화살에 뭔 독을 발랐는지 애가 병상에서 일어나질 못해. 신전에 도움 요청했더니 흑마법사는 도와줄 수 없다나? 내가 화딱지 나서 가서 한 번 난동부리려다 참았어.”
랭커 중 유일의 사제인 김여래는 원탁을 배신했다. 정복자는 강력한 성기사지만 자가 치유 외엔 불가능하고.
그러니 김용걸이 전장에 복귀하는 건 요원한 일인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원탁의 전력은 크게 줄었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 전쟁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게 선빵 맞은 거라 초반에 피해가 컸어. 거기에 배신자 놈들 뒤에는 왕국이 있으니 우리로선 크게 불리하지. 전쟁에선 군량이 중요한데, 저쪽은 왕국에서 무제한으로 지원을 받지만 우리는 그게 안 돼. 왕국 어디에서도 우리한테 식량을 안 팔려 하니까 일단은 차원문 열고 요정 왕국 가서 되는대로 사들이고 있긴 한데, 그것도 돈 떨어지면 불가능한 일이지.”
사실상 원탁은 왕국 전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원탁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국가와의 전면전은 이길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랭커들의 배신으로 전력까지 크게 줄었으니 1년이나 버틴 게 용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창은 후 하고 한숨을 내뱉더니 칼자루를 매만졌다.
“차원문 열어.”
“어디 가게?”
“전쟁 끝내야지. 길게 끌 거야?”
한석구가 멍하니 있다가 술병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너도 돌아왔는데 이젠 끝장을 봐야지. 솔직히 왕 그 새끼도 너 실종된 거 알고 이번 일 벌인 걸걸? 하여튼 씹새, 일을 벌였으니 이젠 벌 받을 때 되긴 했다.”
“정복자한테 가자.”
“바로 차원문 열게.”
김창과 한석구는 차원문을 통해서 정복자의 영지인 호엔으로 향했다. 차원문을 나와 호엔에 한 발자국 내디디는 순간 들려온 건 병사들의 다급한 고함이었다.
“의무병! 의무병! 이쪽으로!”
“여기 들 것 가지고 와!”
“또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성벽 보수해야 해! 손 남는 놈들은 이쪽으로 붙어!”
이미 한 번의 공격이 끝나고 난 후인지 성안은 몹시 어수선했다. 김창과 한석구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지나쳐 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누구냐. 지금 바쁘니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나다.”
영주궁의 집무실 안에서 피곤에 절은 얼굴로 지도를 쳐다보고 있던 정복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
“왜, 오랜만에 보니까 눈물 나게 반갑냐.”
원래라면 역겨운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쳤을 정복자지만 이번에 그는 크게 웃고만 있었다.
“그래, 존나게 반갑다. 돌아온 거냐? 이 씹새, 너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참 빨리도 돌아온다.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설명하자면 기니까 일단 할 일부터 하고 이야기하자고.”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으로 오라고 말할 때였다. 들어올 때 닫았던 문이 다시 열렸다.
“어?”
그 멍청한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김창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정복자와 마찬가지로 피곤에 몹시 절은 산자이가 있었다.
“뭐야, 너도 있었냐? 네 영지는 어쩌고?”
“내 영지는 일단 여유가 있어서 여기부터 지원 온 건데······. 아니, 그것보다 돌아온 거야?”
김창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배신자 놈들 때려잡으러 왔다.”
“와, 그거 듣던 중 진짜 반가운 소리네! 나 진짜 기뻐!”
산자이가 와와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창이 말했다.
“그런데 의외네.”
“뭐가?”
“난 당연히 너도 배신했을 줄 알았는데 배신 안 했잖아.”
그 말에 산자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내가 배신을 왜 해?”
“네 성격상 왕이 살살 꾀었으면 바로 넘어갔을 것 같은데 안 그랬네.”
“바보도 아니고 배신을 왜 하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배신하는 게 훨씬 더 손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어째서?”
산자이가 흐흥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듣자 하니 너 지옥에 갇혔다며? 왕도 그거 알고 일 벌인 것 같던데, 그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거야. 네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고작 지옥에 갇혔을 뿐인데 배신을 왜 해?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게 뻔한데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배신을 한담?”
“내가 돌아올 걸 알았다고?”
“난 솔직히 네가 지옥이 아니라 천상으로 갔다고 해도 별로 걱정 안 했을걸. 그 왜 어떤 스님이 그랬잖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랬나? 넌 신이고 대악마고 일단 만나면 죄 죽였을 텐데 당연히 돌아올 테지? 그걸 뻔히 아는데 왜 배신을 해? 나중에 칼 맞으려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게 그런 뜻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김창이 작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똑똑하네. 잘했다.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 전쟁도 금방 끝날 거다.”
“네가 돌아온 건 기쁘긴 한데 지금 우리가 많이 열세거든? 네가 돌아왔으니 우리가 이기긴 할 테지만 금방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하지 마.”
김창은 이제 한석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차원문 다시 열어. 갈 데 있어.”
“뭘 어쩌려고?”
“스타 해봤나? 물량 딸려서 전면전 안 될 것 같을 땐 뭘 해야 하는지 알아?”
갑자기 그 고전 게임은 왜? 한석구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뭘 해야 하는데.”
“뭘 하긴.”
김창이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했다.
“본진 테러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