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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구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지옥 갔다 와서 목숨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잠깐이라도 기대했던 내가 우스워져.”
“왜 자기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 거냐? 내가 언제 사람 안 죽이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옥에 직접 가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는데, 원래 지옥 가면 사람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그러지 않나?”
“정말 지옥 안 가본 티를 내는군. 지옥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야. 거기 가면 뭐 염라대왕이라도 있는 줄 아나?”
“없어? 그래도 지옥인데 뭐가 있긴 할 거 아니야?”
“뭐가 있긴 했지. 원래 대악마가 있었는데 세 마리는 내 손에 죽었고 한 마리는 내 뒤통수치고 도망쳤으니 이젠 아무도 없어.”
한석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네르헤임 그 씹새가 뒤통수치고 도망쳤지? 내가 이럴 줄 알고 그 새끼 의뢰는 받지 말라고 한 건데, 넌 내 말을 왜 이리 안 듣냐?”
네가 무슨 내 부모냐? 김창은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한석구를 흘겨봤다.
“혹시 만네르헤임에 대해 들은 거 있나? 그 새끼 자기 부하들도 다 버리고 지상으로 올라갔던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진 않을 거 아니야.”
만네르헤임은 강하다. 대악마니까. 신전에서 칼레드리온의 강림을 기를 쓰고 막으려고 했던 이유가 뭔가? 대악마 하나만 지상으로 올라와도 지상이 쑥대밭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 마리의 대악마가 김창한테 너무 맥없이 썰려서 약해 보이는 거지, 그들은 원래 강하다.
당장 원탁의 랭커 못지않게 강한 아라비타스가 대악마와 승부를 내지 못하고 물러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만한 실력을 가진 요정조차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대가 대악마인데, 그런 존재가 지상으로 올라왔음에도 아무런 소동 없이 조용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 만네르헤임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나서 신전에서 성기사들이 찾아왔더라. 그 무슨 수정구에서 만네르헤임의 모습이 비쳤는데 그거 댁들이 불러낸 거 아니냐고, 김창인지 뭔지 하는 놈이 또 대악마 죽여주겠답시고 일 벌인 거 아니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지. 댁들이 의심하는 그 김창이라는 놈은 지금 지옥에 갇혀 있다고 하니까 조용히 돌아가던데.”
“그 뒤로는 아무 움직임이 없고?”
“복자한테 신전 상황 좀 봐달라니까 만네르헤임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것 같던데. 수정구도 처음에만 만네르헤임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뒤로는 안 보여줬대.”
본래 팅게르의 수정구는 세상에 위험이 닥쳤을 때마다 영상을 통해 경고한다. 이건 거꾸로 말해서 아무런 위험이 없다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소리다.
즉, 만네르헤임은 지상에 올라온 후부터 지금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고 수정구도 그를 더는 위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아마 그게 진실일 것이다. 만네르헤임이 지상에서 뭔가를 하려고 했다면 자기 군세를 전부 이끌고 갔을 테니까.
김창이 그런 이야기를 하자 한석구가 어이없다는 듯 하 소리를 냈다.
“그럴 거면 그냥 지옥에 박혀 있지, 뭐 하러 나왔대?”
“지옥에 있었으면 내 손에 죽었을 테니까 도망친 거지 뭘. 지상에 나와서 뭔가를 하자니 원탁이 무서워서 그럴 수도 없었을 테고.”
만네르헤임은 헤인리히스와 다르게 원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지옥에서 김창을 피해 도망쳤다고 해서 전부 끝이 난 게 아니다.
지상에는 원탁이 있고, 랭커들 몇 명이 모이면 만네르헤임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도망쳤는데 괜한 소란을 일으켜 목숨을 낭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네르헤임은 지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숨어있으리라.
“이건 내 생각인데, 왕을 꼬드긴 게 아마 만네르헤임인 것 같아.”
“그게 갑자기 뭔 소리냐?”
“왕이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맞는데 갑자기 배신할 이유가 없거든? 내가 딱히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땅 몇 개 던져주면 자기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데 우릴 왜 내쳐? 애초에 우린 마음만 먹으면 왕국 통째로 먹을 수 있어. 그런데 안 그러고 왕 밑에서 얌전히 일해주고 있는데 왜 내치느냐고?”
“그게 만네르헤임의 수작질 때문이다?”
“왕이 왜 우리를 내칠 결심을 세웠을까? 원탁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겠지? 그럼 그걸 누구한테 들었을까?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탁과 연락하던 존재에게 들었겠지?”
“그게 만네르헤임이군. 지난번에 내가 기절해 있을 때 너와 대화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했을 테지. 원탁 내 랭커들이 영주 자리에 목말라 있다는 정보.”
“그래, 만네르헤임은 그 정보를 토대로 왕을 꼬드겼을 거고, 멍청한 왕은 그 미끼를 덥석 물었어. 그리고 그 결과가 이래. 만네르헤임의 생각대로 네가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면 원탁은 정말 무너졌을지도 모르지.”
만네르헤임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뻔하다.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지옥에 갇힌 김창을 구하기 위해 원탁이 만네르헤임을 공격하면 아무리 대악마라도 그걸 버텨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원탁의 랭커끼리 서로 반목하게 하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여튼 악마라 그런지 나쁜 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다.
“왕 그 친구, 말하는 것만 보면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고작 세 명 데리고 뭘 어쩌려고?”
“나 없으면 승산이 있으리라 여겼나 보지. 실제로 나 돌아오기 전까진 1년이나 전쟁을 질질 끌었으니 의미 없는 짓거리는 아니었잖아.”
한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영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김창이 없어지자 전쟁을 1년이나 끌지 않았나?
“하지만 이젠 내가 돌아왔으니 의미 없는 짓거리가 된 건 맞아. 뭐가 어찌 됐건 왕 그 친구도 손 봐줄 필요가 있겠어.”
한석구가 당연히 그래야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만네르헤임 그 새끼, 네가 돌아온 거 보고서 다시 지옥으로 도망치는 거 아닌가 몰라? 지은 죄가 있으니 당당히 있진 않을 테고.”
“걔 이제 지옥으로 돌아가도 자리 없어.”
“왜 자리가 없어? 대악마들은 만네르헤임 빼고 다 죽었잖아?”
“그랬는데 대악마 하나 더 생겼어. 애초에 내가 지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걔 덕분이야.”
“대악마가 또 생겼다고? 덕분에 네가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거냐, 말아야 하는 거냐? 그래서 그게 누군데?”
“개눈깔이라고, 너도 아는 사람이야.”
정말 아는 사람이네. 그것도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잘 아는 사람.
한석구가 뜨악한 얼굴로 입을 벌린 걸 본 김창이 말했다.
“내가 고무신 죽이면서 지옥 가면 개눈깔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 어쩌면 나중에 편지 쓸지도 모르니까 우체통 잘 봐.”
“개눈깔 걔 죽은 거 아니었어? 갑자기 웬 대악마?”
“죽었으니까 지옥에 갔겠지? 뭔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자면 좀 긴데, 간단히 말해서 지금까지 문이 안 열렸던 건 지옥에 대악마가 없어선데 그건 개눈깔을 대악마로 만들어서 해결했어.”
어이없는 이야기였지만 한석구는 오래 당황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흠 소리를 내며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거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군. 죽었다고 그냥 끝나는 게 아니라 지옥에 떨어지는 거라면 이번에 죽은 랭커 놈들도 다시 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개눈깔도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는데 대악마로 다시 태어났으니까. 그럼 죽은 애들도 대악마 만들어서 원탁 따까리 시키면 되는 거 아니야?”
“영혼까지 부려 먹으려는 게 참 알뜰하군. 하지만 죽는다고 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걔네가 지옥으로 안 가면?”
“내 장담하는데 걔네 중에 천국 갈 놈은 없어. 그리고 지옥은 나쁜 짓 하면 가는 곳 아니야? 그럼 걔넨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겠지.”
“왜? 사람 죽여서?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죽으면 지옥 가야 하는데.”
“원탁 배신했잖아. 사람 죽이는 거야 사소한 일이지만 원탁 배신하는 건 중대한 문제야. 차라리 사람을 죽이지, 감히 원탁을 배신해? 너흰 죗값 치러야 한다.”
대체 사고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면 저딴 소리를 당당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원탁은 절대적인 선이고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한석구의 머릿속엔 크나큰 결점이 있는 게 분명하다.
김창이 머리 이상한 한석구를 애잔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한석구는 혼자서 실실 웃으며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것 참, 나도 모르는 새에 원탁이 지옥까지 진출해버렸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참 옳아. 너 없어지고 원탁 망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옥까지 진출했으니 이것만큼 기쁜 일도 없어.”
한석구는 개눈깔이 원탁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잊은 걸까? 지금 지옥에 있는 건 죄 원탁을 배신한 놈들뿐인데 오히려 그들이 뭉쳐 새로운 적대 세력이 생기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창은 머리 이상한 한석구를 한 번 더 쳐다보다가 말했다.
“지옥 진출을 하든 말든 그건 알아서 하고. 일단은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고. 이제 남은 게 김여래 하나뿐인가? 걘 어디 있어?”
“로네티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가 오성이 영지거든? 김여래 거기 있어.”
“차원문 열어. 후딱 끝내고 치우자고.”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원문을 새로 열었다. 그가 바닥에 쓰러진 정우신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난 얘 데리고 해독제 만들고 있을게. 조심히 다녀와.”
“그래.”
김창은 망설임 없이 차원문을 통과했다.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전장의 후끈한 열기가 훅 불어닥쳤다.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고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한데 모여 전장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의 숫자가 어찌나 많았는지 김창이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더라도 아무런 티가 나지 않았다.
김창은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병사들을 죽였다. 그는 물살을 헤치고 상류로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병사들을 베고 또 베면서 전장의 중심으로 움직였다.
보통 때라면 그곳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야 할 테지만 어째서인지 중심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건 마치 병사들이 전장의 중심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랬을까? 답이야 간단했다.
저 안쪽에선 인간답지 않은 괴물들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을 테니까. 싸우다 죽길 바라는 전사도 눈 먼 칼에 죽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이걸로······.”
김창은 병사 하나의 목을 자르고서 전장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마치 여기가 경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텅 비어있는 공간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있었다.
“끝이다.”
한 사람은 서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쓰러져 있었다. 승자는 손날을 세워 패자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다.
전장에서 승자는 살고 패자는 죽는다. 그러니 승자가 패자의 목숨을 취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지금 패자의 목숨을 빼앗는 게 하오성이었다면 김창도 그 당연한 권리의 행사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김여래가 하오성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까.
달칵. 스스로 칼집에서 튀어나온 요도가 김여래를 향해 날아갔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공격이었건만 김여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그가 손날로 칼날을 쳐내고 물 흐르듯 유연한 동작으로 칼날의 방향을 비틀어 칼을 바닥에 처박히게 했다.
그건 마치 무림 영화 속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는데 김여래의 머리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반들거린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뭡니까, 이건? 이기어검이라도 되는 건가요?”
김여래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김창은 손가락을 까딱여 칼을 회수하고는 하오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다. 붕대라도 갖고 있으면 감아주겠는데 그런 것도 없으니 응급처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여기엔 사제가 하나 있었다. 문제는 그 사제가 적이라는 점이지만 칼 들이밀면 아마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얘한테 힐 써.”
김창이 칼을 겨누고 있음에도 김여래는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칼 들이밀며 협박하는 사람 말 듣긴 싫은데요.”
“들어야 할걸.”
“왜요, 안 들으면 칼로 찌를 테니까? 그건 참 사양할 만한 일이지만 그래도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겠군요.”
“기어코 칼 맞겠다는 거냐?”
“그건 아니고.”
김여래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격투 자세를 잡았다. 그의 두 주먹에서 환한 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나 사제긴 한데 힐 안 찍어서 못 써요. 힐 대신에 극딜 트리 탔거든. 애초에 맞기 전에 죽이면 힐 쓸 일도 없는 거 아닌가?”
내가 네 몸에 칼빵 놔도 그 말이 나오나 보자. 김창이 칼자루를 고쳐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