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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황금성을 쳐다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 세뇌된 게 아니었나?”
“세뇌당했었는데 저 친구 얼굴 보니까 정신 바짝 들더라고.”
“그래서 저 녀석과 안 싸우겠다?”
황금성이 쯧즛 혀를 차며 말했다.
“왕 아저씨, 우리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안 싸우는 게 아니라 못 싸우는 거요. 내가 아무리 역배에 미쳐버린 놈이라도 이건 좀 아니잖아. 역배도 이길 확률이 1%는 있어야 거는 거지, 내가 딸 확률이 0%인 게 분명한데 거기다 왜 걸어? 그건 그냥 돈 버리는 거 아닌가.”
왕은 황금성이 원탁 소속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가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축에 속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김창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하니 황금성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역시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길 확률이 0%라고? 저 칼잡이는 황금성 정도의 실력자가 승률이 0%라고 단언할 만큼 위험한 상대란 말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건······.
“만네르헤임을 납치해서 이리저리 부려 먹고 있다던데 그 녀석이 나한테 덤비면 안 된다고 말해주진 않았나 보지?”
김창이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이죽거렸다.
“하기야 그럴 이유가 없지. 너 엿 먹이려면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는 게 제일일 테니까. 이봐, 왕 양반. 충고하는데 지금이라도 멈춰. 그럼 목숨은 건지고 어디 외딴 섬에 유배 가는 정도로 그칠 테니까. 내가 한석구한테 이야기 잘해줄게.”
김창은 정말 순순한 선의를 가지고 한 말이었지만 왕에게 그건 조롱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 입술을 세게 깨물더니 곧 성난 목소리를 토해냈다.
“전군! 저 극악무도한 반역도들을 죽여라!”
그 한마디에 줄곧 가만히 있던 검은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아주 딱딱하고 무기질적이었는데 아마 세뇌의 영향일 터였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냐! 너희 모두 저놈들을 공격해!”
왕의 명령은 가만히 있던 일반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다가 결국에는 김창과 황금성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하기 싫지만 왕명이니 어쩔 수 없이 싸우는 모습이었다.
“야, 황금성.”
“오, 김창. 아까는 미안했다. 들어서 알겠지만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진짜 세뇌됐던 거 맞아?”
“그럼 설마 세뇌된 연기라도 했을까.”
황금성이 능글맞게 웃더니 말했다.
“그래서, 저 녀석들 싹 정리하면 돼?”
“그러면 되는데 저 검은색 갑옷 입은 애들은 건드리지 마. 걔넨 내가 상대할 테니까 넌 다른 애들 맡아.”
“왜 그래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황금성이 주먹을 쥐면서 전투 자세를 잡을 때였다. 김창이 말했다.
“그리고 마력 중첩은 금지다.”
“뭐? 아니, 갑자기 왜?”
김창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병사들 상대로도 마력 중첩하다가 실패해서 개처럼 두들겨 맞을 게 뻔하니까.”
“물론 실패할 확률이 있긴 한데, 그래도 확률 반반······.”
“학교 다닐 때 공부 안 한 티 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황금성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는 이제부터 마력 중첩 없이 순순한 격투기만으로 싸워야 할 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이기엔 충분했다.
“그러면 갈까.”
꽈르릉!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커다란 우레의 소리였다. 김창이 벼락 맺힌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맹수가 울부짖듯 위협적인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일반 병사들은 황금성과 싸우고 있음에도 그 소리엔 놀라 잔뜩 겁을 먹거나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하기야 칼을 휘둘러 벼락을 부리는 일은 대마법사도 보여주지 못할 재주였으니 범인(凡人)이 보기엔 몹시도 두려운 광경이었으리라.
그러나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묵묵히 김창을 향해 무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그들은 함께 싸우고 있던 병사의 목이 날아가거나 허리가 끊어지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왕의 명령을 우직하게 수행했다.
심지어 허리가 잘린 병사는 바닥을 기어 김창의 발을 붙잡으려 했고 목이 날아간 병사는 보이는 것도 없으면서 허공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기까지 했다.
“역시 대악마의 힘이 강력하긴 하군. 병사가 아니라 뭔 좀비를 만들어놨어.”
만약 김창이 여전히 지옥에 갇혀 있었다면 왕은 이 사악한 군대를 이용하여 원탁을 몰아냈을 것이다.
어쩌면 왕국을 넘어 대륙 전역을 침공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승천할 자의 존재를 생각하면 의미 없는 헛짓거리였을 테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이 군대는 강력하지만 승천할 자를 이길 수 없다. 일찍이 김창의 손에 죽었던 하이나 혼자서도 이 군대를 박살 낼 수 있을 테고 반신의 격에 오른 요안니스라면 왕의 군대를 부수는 걸 넘어 왕국을 멸망시켰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요안니스와 같은 격에 오른 김창 역시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 대악마 본인이 나와서 싸워도 자신을 이길 가능성이 없는데 그 힘을 나누어 받은 군대 따위가 뭐라고.
“왕 양반, 아까도 말했는데 여기까지 해. 아까 내 호의를 거절했으니 이젠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는 못해도 적어도 광장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며 처형당하는 꼴은 막아줄 수 있어. 갈 때 가더라도 멋있게 가야지.”
김창은 수백 명에 달하는 군대를 상대로 혼자 싸우면서도 몹시 여유로웠다. 왕은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서 저것이 아직 전력을 다한 모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걸 알고 나니 지독한 절망감이 몰아쳤다. 끝이라고? 여기서 내가?
“이 멍청한 놈들! 상대는 겨우 하나다! 그 하나를 못 이겨서 이런······.”
왕이 두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크게 소리쳤다.
“너희에게 나누어 줬던 힘이 아깝구나! 너흰 그 힘을 다룰 자격이 없다! 모두 비켜라! 이제부턴 내가 왕의 싸움을 보여줄 테니!”
직접 나서려고? 하지만 무기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을 양반이 대체 뭔 수로······.
김창이 가만히 왕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뭔가 마법이라도 날리려는 걸까? 멀뚱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 병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들이 고개를 약간 들고서 입을 쩍 벌리니 그 안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튀어나왔다. 저걸 보고서 영혼을 떠올린다면 그건 너무 섬뜩한 상상일까?
아니다. 저건 분명히 영혼이다. 악마의 힘을 잔뜩 머금은 죄 많은 자의 영혼.
“크으윽!”
왕은 자신을 향해 날아온 영혼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뒤틀리면서 점차 이형의 모습을 변해갔다.
본래 대악마의 힘이었던 것을 흡수한 탓일까? 그의 모습은 점점 악마의 것과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덩치가 커지고 등 뒤에선 날개가 솟았다.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커다란 근육과 함께 손톱과 발톱이 마치 창칼처럼 길어져 날카롭게 빛났다.
두 눈에선 새빨간 안광이 빛났고 이마에선 새롭게 눈 하나가 솟아났다. 이제 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악마 하나만이 그 자리에 남았을 뿐이다.
“끄으윽······.”
김창은 악마로 변한 왕을 보고서 호오 소리를 냈다. 이건 확실히 강해보이는데 죽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왕이 어서 덤벼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 악마의 상태가 이상했다.
“끄으윽? 끄어억!”
악마로 변했던 왕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속이, 속이······.”
왕은 분명 악마로서의 변이를 끝냈다. 그런데도 그의 몸은 여전히 뒤틀리며 새로운 부위가 생겨나는 중이었다.
이미 팔이 두 개가 있는데 어깨며 등에서 팔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확실히 기괴했다. 다리의 근육이 크게 부풀고 또 부풀어 아예 하나로 합쳐지는 걸 보니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날개는 나무의 가지가 뻗어나가듯 끝자락에서 새로운 날개가 솟고 거기서 또 날개가 솟았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프랙탈? 뭐가 어찌 됐든 보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속이, 이상해!”
우에에엑! 악마가 입을 벌려 걸쭉한 액체를 울컥울컥 뱉어냈다. 뭘 뱉어내는 건진 몰라도 악취가 상당했다.
“죽여줘! 날 죽···여···줘!”
얼씨구. 자기 혼자 변신하더니 이젠 별······. 김창은 한숨을 내쉬더니 악마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그러니까 길바닥에서 아무거나 주워 먹고 그러지 말았어야지. 배탈 나, 이 새끼야.”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찬 뒤에 칼을 들었다. 저 멀리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창백한 빛이 아래로 질주하며 이젠 악마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대한 살덩어리 괴물을 반으로 잘랐다.
그 거대한 몸에서 걸쭉한 액체가 잔뜩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김창은 반으로 갈라진 살덩어리 속에서 반쯤 녹아내린 왕을 발견했다.
“지옥 가겠네.”
김창은 혼자 웃다가 곧 그쳤다. 내면에서 새로운 신성이 느껴졌다. 자기 혼자 설치다가 제발 걸려 넘어진 놈을 죽였을 뿐인데 웬 신성이?
어쨌거나 이것도 악마니까 신성을 주긴 하는 건가? 김창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혼자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어찌 됐든 신성을 주면 좋은 거지. 그는 칼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고 황금성을 향해 말했다.
“야, 너 혼자서 여기 정리하고 있어.”
“뭐? 너 어디 가는데?”
“네가 알 건 없고.”
김창은 대충 대답하고서 왕궁을 향해 걸었다. 그에겐 지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대로를 따라 걷다 보니 금세 왕궁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테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도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왕도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부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창으로선 다행이었다. 괜한 칼부림으로 쓸데없이 사람을 죽일 일은 없어졌으니까.
그는 왕궁 안의 지리는 모르지만 직감만을 믿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시간도 많은데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
그런 식으로 한참 걷다 보니 지하로 향하는 거대한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긴가.”
저 안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마력만 봐도 여기가 정답인 게 분명했다. 김창은 문을 열고 끝없는 어둠이 이어진 저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실이 대개 그러하듯 안쪽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는데 때때로 비릿한 냄새도 느껴졌다. 그건 병장기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쇳내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그건 피냄새였다. 그것도 아주 짙은. 이런 지하 공간에선 비인도적인 실험이 자주 일어나는 법이니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김창은 복도를 걷고 또 걸어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대악마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문과 마주했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에 저 안쪽에 있던 것이 반응했다. 일렁이는 횃불을 따라 그림자가 춤을 췄다.
그림자는 원래 사물보다 더 크게 보이는 법이지만 그걸 감안 해도 저 그림자는 몹시 컸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저기 있는 것은 대악마니까.
“오랜만이다, 만네르헤임.”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잡혀 있는 것은 거인이었다. 옛날의 영광은 모두 잃어버리고 영락하고 쇠락한 거인.
“오, 김창인가. 약속한 대로 날 구하러 왔군.”
“널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죽이러 온 거다.”
“그래? 뭐가 어찌 됐든 널 만나서 반갑다.”
“나도 몹시 반가워. 드디어 널 죽일 수 있게 됐으니까.”
“기어코 날 죽이려고?”
“그래. 혹시 이번에도 내 뒤통수를 치고 도망칠 방법은 찾았나? 찾았으면 빨리하는 게 좋을걸.”
만네르헤임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방법? 방법이라면 있지.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 방법 말곤 없어.”
“그게 뭔데.”
만네르헤임이 김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김창.”
“왜.”
“그냥 한 번만 살려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