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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만네르헤임을 쳐다봤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이라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탓이다.
그대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자 만네르헤임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는 게 보였다. 그가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이자 절그럭 소리가 났다.
사지를 결박하고 있던 사슬이 바짝 당겨져서 부르르 떨리더니 만네르헤임이 기합과 함께 몸을 움직이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사슬이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붙잡혀 있는 줄 알았던 거인이 자력으로 사슬을 부수고 탈출하는 모습을 본 김창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녀석, 납치됐다고 하더니 역시 거짓말이었나? 헛소리로 날 당황시키고 그 틈을 노려 습격이라도 하려고 했던 걸까?
지금까지 자신을 여러 번 골탕 먹였던 만네르헤임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김창이 재빨리 칼을 겨누자 만네르헤임이 다급히 외쳤다.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그거야 뻔하지. 만네르헤임 이 자식, 이번에도 날 속였군. 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미안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만네르헤임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며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걸 보여줬다. 그는 김창이 칼을 휘두르기 전에 얼른 말했다.
“방금 사슬을 부수고 탈출하는 걸 보고서 내가 또 널 속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니야. 내가 사슬을 부술 수 있었던 건 네가 왕을 죽임으로써 날 속박하고 있던 마법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몰라.”
“난 네가 오기 전에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데 도망치지 않았지. 오히려 네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아까부터 퀴즈 놀이하냐? 할 말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만네르헤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우리의 악연을 끝내길 바란다. 김창, 난 너무나도 지쳤다. 내 꿈이 뭔지 아나? 지옥의 왕이 되는 것? 아니야. 난 그냥 다 내버리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길 바랄 뿐이야······.”
대악마가 뭔 다 늙은 사람 같은 소리를? 김창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만네르헤임이 말을 이었다.
“내가 왜 널 고용해서 다른 대악마를 죽여달라고 했는지 아나?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길 바라서야. 그리고 널 지옥에 가두고 도망친 이유? 그것도 살아남기 위해서지. 왕을 꼬드긴 이유? 그 멍청한 놈이 날뛰어야 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테니까. 김창, 난 그냥 살길 바란다. 다른 건 없어. 그냥 살길 바란다고.”
그 절절한 고백을 들으면서 김창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말 되게 많네.
“그래서 유언은 그게 단가? 이제 죽여도 돼?”
“···미친놈. 내 말을 듣긴 한 거냐?”
“그러니까 살려달라는 소리 아니야. 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세상에 죽는 걸 원하는 놈도 있나? 다들 죽기 싫어하는데 살다 보면 죽을 수도 있고 그런 거야. 그냥 겸허히 받아들여.”
김창이 허공에 칼을 가볍게 휘두르자 벼락이 번쩍였다. 만네르헤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외쳤다.
“김창! 만약 날 죽여도 신성을 얻을 수 없다면 어쩔 테냐!”
뭐? 천천히 만네르헤임을 향해 다가가던 김창의 발걸음이 멈췄다. 방금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뭔 개소리야?”
“날 죽여도 신성을 얻을 수 없으면 어쩔 테냐고!”
“대악마를 죽였는데 신성을 왜 안 줘? 살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만네르헤임이 말했다.
“헛소리가 아니다. 날 봐라. 내가 대악마로 보이나? 난 이제 그냥 일개 악마에 불과해. 어째서 그러냐면 왕이 내 힘을 대부분 가져갔기 때문이지. 너도 알 거다. 왕을 죽이고 신성을 얻었으니······.”
순간 김창의 얼굴이 굳었다. 왕을 죽였는데 신성을 주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그런 거였나?
“그럼 널 죽여도 신성을 얻을 수 없다고?”
“일개 악마를 죽여서 신성을 얻을 수 있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김창이 만네르헤임을 유심히 쳐다봤다. 확실히 생각한 것보다 약해 보이긴 한다.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기대한 것 이하인데다 겉모습 역시 쇠약한 상태라 대악마라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왕을 죽이고 신성을 얻기까지 했으니 만네르헤임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럼 이제 더는 신성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 신성을 두 배로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김창은 이 세상에 온 이후로 가장 큰 상실감을 느끼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신성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억울하다 못해 이젠 화가 나려 하는데······.”
그게 왜 자기 신성인가? 내 목숨이지. 만네르헤임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살기 위해 열심히 비위를 맞췄다.
“김창, 네가 원하는 것은 신성이지? 그걸 내가 줄 수는 없어도 신성을 얻을 만한 싸움에 대한 정보를 줄 수는 있다.”
“신성을 얻을 만한 싸움? 이제 죽일 만한 놈들은 다 죽이지 않았나? 남은 건 끽해야 승천할 자 정도 아닌가.”
승천할 자로서의 격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신성을 얻기 힘들어진다. 게임에서 자신과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적은 죽여봤자 경험치를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옛날이야 적당한 악마를 죽이는 정도로도 신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악마나 그 윗급의 존재가 아닌 이상은 신성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 이제는 승천할 자를 죽여야 할 텐데 다들 어디 숨었는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자신이 이 정도로 날뛰고 있으면 한 번쯤 찾아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저쪽에서도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언젠가는 싸워야 할 적인데 만네르헤임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터였다.
김창이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두 가지 정보가 있다. 어느 걸 먼저 들을 테냐?”
신성을 얻을 만한 싸움이 무려 둘이나 있다고. 김창은 아까의 상실감을 떨쳐버리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말해.”
“···하나는 용이다. 반신적 존재지만 신성을 얻을 수 없어 신이 될 수 없는 비운의 생물이지.”
용? 승천할 자가 아니란 말인가? 김창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사실 신성만 얻을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용은 일개 승천할 자가 아니라 반신적 존재라고 하니 요안니스와 비슷한 수준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누군데.”
“용 바르토시스.”
“아, 그 친구야? 언젠가 한 번 만날 것 같았는데 드디어 만나게 됐군.”
“음? 바르토시스에 대해서 알고 있나?”
“걔도 나 알아. 왜냐하면 바르토시스가 제 하수인을 시켜 가져오던 신성을 내가 강탈했거든.”
“어, 그거······ 굉장한 인연이로군. 바르토시스가 널 만나면 아주 기뻐하겠어.”
“당연히 기뻐하겠지. 그땐 아주 작은 신성이었는데 그걸 내가 몇 배로 키워서 가져가잖아. 물론 날 죽여야 가져갈 수 있을 테지만.”
바르토시스와는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지만 그와의 인연은 길고 길었다. 이젠 그 인연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 셈이었다.
김창이 말했다.
“그래서 걘 어디 있는데.”
“고르산 협곡. 그곳이 그의 거처다. 김창, 네가 강한 건 알지만 조심해야 할 거다. 용은 대개 자신의 거처를 요새처럼 꾸미는 경향이 있다. 그곳엔 용아병을 비롯한 수많은 군세가 있을 것이며 그들 모두는 난쟁이 장인들이 만든 뛰어난 장비로 무장하고 있을 거다.”
“걔네를 죽이면 신성을 줄까?”
“···용아병이나 난쟁이 전사를 죽였다고 신성을 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건 좀 아쉽군.”
만네르헤임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바르토시스는 교활한 용이라 네가 싸움에서 상처 입고 약해지길 기다린 뒤에 모습을 드러낼 거다. 그러니 용의 부하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대악마에게 걱정을 받다니 참 신기한 기분이군. 김창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두 번째 정보는?”
“그건 승천할 자에 관한 것이다. 내가 이곳에 갇히고 나서 들은 건데, 왕은 나 말고도 여러 연줄을 만들어뒀더군.”
왕도 살기 위해 참 열심히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대악마와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서 승천할 자와의 연결 고리까지 만들어두다니, 그건 보통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승천할 자랑 손 잡고 뭘 하려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거지. 내 힘을 이용해 군대를 만들었던 것처럼. 왕은 만약 원탁의 잔당이 살아남는다면 승천할 자에게 의뢰해 재앙의 화근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물론 그에게 부탁했다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을 테지만······.”
승천할 자에게 뭔가를 의뢰하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터다. 김창이야 신성만 얻을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에 지불해야 할 금액이 적지만 원래라면 승천할 자 하나를 움직이기 위해선 천금을 내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 의뢰는 원탁을 제거해달라는 일이었으니 왕은 아마 사비를 털다 못해 국고의 금화까지 꺼내 써야 했으리라.
“그래서 그 친구는 또 어디 있는데?”
“제국.”
“제국? 그 황제가 다스리는 거기?”
당연한 소리지만 대륙에는 여러 국가가 있고 그 중심에는 제국이 있다. 다만 원탁의 활동 범위가 왕국에 국한된 터라 김창도 외국으로 나가본 적은 없다.
잘하면 이번에는 외국으로 출장을 나가야겠는데.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제국은 좀 머니까 나중에 하고. 일단은 바르토시스부터 죽여야겠군.”
“아직 내 설명 다 안 끝났는데······.”
“당장 한 번에 두 명을 상대할 것도 아닌데 지금 들어서 뭘 해? 아니면 뭐, 나한테 정보 뱉어내고 도망이라도 칠 생각이었나?”
“아니, 그러면 이만한 고급 정보를 두 개나 토했는데 집에도 못 간다고?”
“집에 돌아가도 너 자리 없어. 거기 개눈깔이 이미 먹었거든? 그리고 넌 이제 대악마도 아니잖아.”
“네가 지옥의 문을 열고 돌아온 걸 보고서 새로운 대악마가 탄생했으리라 생각은 했는데······.”
김창이 엄지와 검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너 이제 갈 데도 없지? 불쌍한 친구 하나 구제하는 셈 치고 내가 먹고 잘 곳 구해주지.”
한때 대악마였던 존재를 무슨 노숙자 취급하듯······. 만네르헤임이 허 소리를 내며 말했다.
“거기가 어디지?”
“원탁이라고, 식사 잘 나와. 가서 일 좀 해.”
“무슨 일?”
“너 힘 잘 쓰게 생겼는데 가서 돌 나르고 그래. 전쟁 때문에 여기저기 보수해야 할 데 많은데.”
한때 대악마였던 존재를 이젠 공사장 잡부 취급하는군. 만네르헤임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김창, 제발 승천해다오.”
“갑자기 뭔 소리야?”
“내 분명 장담하는데, 네가 승천해서 사라지는 게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소원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