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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구는 어렸을 적부터 무리의 대장을 도맡아 했다. 원래 어디서든 잘 나서는 성격인데다 또래 중에서 덩치가 제일 큰 덕에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무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에 만들어진 서열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이어지는 법이고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이사 가지 않는 한은 고등학생 때까지도 유효한 법이다.
그러한 이유로 한석구는 초등학생 때부터 반장이며 회장 따위의 감투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써왔다.
원래 그런 자리는 능력보다는 인기에 따라 정해지는 법이라 무리의 서열 꼭대기에 선 한석구가 학급의 우두머리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초등학생 때야 목소리 큰 놈을 꼬드겨 반장 시키는 게 선생으로서도 반을 통솔하기 수월하니 제 의사와 상관없이 반장이 됐지만 머리 좀 굵어진 고등학생 때는 달랐다.
몇 년 동안 반장 생활을 쭉 이어온 한석구는 이제 그게 당연히 자신이 올라야 할 자리쯤으로 여겼다. 다른 학생들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하리라 여겼고.
그는 그때부터 남 위에 서는 게 익숙했다. 천지 무서운 줄 설치고 다니며 남 괴롭히길 즐기는 불량 학생들, 소위 말하는 일진이라는 놈들도 한석구를 상대로는 감히 깝죽거리지 못했다.
자신이 어른인 줄 알지만 실은 덩치만 큰 애새끼인 청소년답게 한석구는 그 사실에 음습한 우월감을 느꼈다.
원래 철없는 애새끼들은 일진을 동경하는 법인데 자신은 그 잘난 일진들조차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닌가?
한석구는 복도를 가로막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일진 놈들이 자신만 보면 좌우로 슬금슬금 갈라서는 걸 보고 그 반응을 은근히 즐겼더랬다.
지금 생각하기엔 참 병신 같은 짓거리인데 그땐 그게 그리도 재밌었다. 어쩌면 그때 자신은 일진을 정의구현하는 다크 히어로쯤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참 병신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다른 학생들이 보기엔 일진 위에 있는 일진에 불과할 텐데.
그 당시엔 불행하게도,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몹시 다행스럽게도, 그 음습한 우월감은 영원할 수 없었다. 그 왜 누가 말했지 않나. 소년은 어른이 되는 법이라고.
더 정확히 말해서 학생은 어른이 되는 법이다. 딱히 어른이 될 생각도 없는데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강제로 사회로 떠밀린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어른이 됐다.
그리고 그건 한석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더는 그 우월감을 즐길 수 없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사회는 넓디넓고 거기엔 잘난 놈들이 참 많아서 학생 때나 하던 일진 놀이가 더는 통하지 않는 법이니까.
한석구는 그 사실에 심한 우울함을 느꼈고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게임을 시작했다.
그는 흔히 말하는 헤비 유저였고 여가의 대부분을 게임에 쏟아부었다.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 덕분에 랭커가 되는 건 쉬웠다.
게임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과 함께 길드를 만들었다. 커뮤니티에선 소위 말하는 친목질도 했다. 누군가는 이러다 사이트 망한다고 욕을 했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그게 내 알 바인가.
한석구는 점점 더 게임 속 세상에 빠져들었고 길드원들과 현실에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길드장이라는 게임 속 지위와 일진 출신의 외향적인 성격과 외모 덕분에 한석구는 현실에서도 자연스럽게 무리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덕분에 옛날에 느끼던 우월감을 오랜만에 충족할 수 있었던 한석구는 반쯤 게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상생활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고 업무에도 큰 지장을 끼쳤다. 잠을 자지 않고 새벽까지 게임에 몰두하다 상사에게 한 소리를 들은 한석구는 그날 바로 사직서를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게임 속으로 끌려왔다.
처음엔 당황했으나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할 수 있으리란 걸 알았다.
한석구는 자신과 같이 게임에 끌려온 사람들을 모아서 보호하기 위해 원탁을 설립했다. 그간의 행적 덕분에 자연스럽게 원탁의 수장 자리에 오른 그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원탁을 만들고 키웠던 것은 결국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던 학생 시절에 그랬듯이 일진 놀이를 통한 음습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일이었지만 한석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부정했다.
이게 일진 놀이라고? 물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 삥도 좀 뜯고 말 안 드는 새끼들한테 꼽도 주고 그랬지만, 그래서 그게 뭐?
결국 이게 다 원탁을 위한 일이 아니었나? 꿀은 다 같이 빨았으면서 인제 와서 그 꿀이 더러운 꿀이라고 욕하는 건 역겨운 짓 아닌가······.
한석구는 반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반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제가 해온 일이 정의롭진 않아도 옳은 일이라 여겼다.
이제부턴 왕국의 모두가 그리 생각해야 할 터였다. 만약 싫다면? 제깟 놈들이 싫으면 뭐 어쩌려고?
왜냐하면 이제 나는······.
“···새롭게 왕 될 자가 이 땅에 서니······.”
한석구는 고개를 들어 왕좌를 쳐다봤다.
길쭉한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환한 광채를 뿜어내며 왕좌를 축복했다. 왕관을 쓴 이방인이 지배자의 길 위를 걸었다.
“태양이여, 왕의 탄생을 축복하소서······.”
신전의 성직자가 외우는 축복의 말을 들으며 한석구가 왕위에 올랐다.
* * *
새로운 왕이 탄생하면 응당 축제가 벌어져야 할 일이지만 왕도에선 축제의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새롭게 왕위에 오른 한석구가 금욕적인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고 단지 그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요, 또한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국과 하는 전쟁도 1년이나 이어지면 국력에 큰 타격이 가는 법인데 왕국은 내전을 무려 1년이나 이어왔다.
그 길고 긴 전쟁이 한 칼잡이에 의해 하루 만에 끝났다는 게 몹시 우습긴 하지만, 어쨌건 그 탓에 국토 곳곳이 신음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왕으로서 이러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종전 축제를 벌일 수도 있지만 한석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력적인 왕이었고 또한 욕심이 많았다. 내전으로 엉망이 된 나라를 재정비하고 가능한 빠르게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길 원했다.
덕택에 왕궁의 신하들은 잠잘 시간도 줄여가며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고 원탁의 사람들이며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 전후 복구를 위한 공사에 투입됐다.
물론 국력을 총동원한다고 해서 전쟁의 상처가 며칠 내로 아물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모두가 노력한다면 그 시간을 충분히 줄일 수는 있었다.
“듣자 하니 만네르헤임이 성벽 공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지? 걘 덩치도 크고 힘도 세니까 무거운 돌을 저 위까지 쉽게 옮길 수 있다던데. 현실로 치면 살아있는 크레인쯤 되겠네.”
왕의 집무실, 산더미 같은 서류 뒤에 숨은 한석구가 그런 농담을 했다.
벽에 기댄 채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김창이 말했다.
“사람 일이라는 건 참 알 수가 없군. 몇 년 전에 애들 몇 명 데리고 자경단 놀이하고 다니던 놈이 이제는 일국의 왕이라? 이건 현실로 치면 동네 건달 놈이 대통령까지 한 격 아닌가. 영화로 만들면 아주 대박 나겠어.”
“비꼬는 거냐, 아니면 놀리는 거냐? 어느 쪽이든 상관없긴 하지만.”
“네 말대로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둘 다니까. 그래서, 기분은 어때? 왕 되니까 할 만한가?”
“나야 뭐 기분이 어쩌고 할 거 있나. 원래 원탁에서 대빵 노릇하던 거 이젠 왕국에서 하는 것뿐인데.”
“그래서 할 만하다고?”
“나는 할 만한 것 같은데, 나보다는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복자 그 친구, 대장군 시켜놨더니 자기가 이런 걸 왜 해야 하냐고 아주 죽을상이던데.”
한석구가 왕위에 올랐던 것처럼 원탁의 랭커들 역시 이런저런 관직에 올랐다.
정복자는 대장군이 됐고 하오성과 산자이는 영지 여러 개를 거느린 대영주가 됐다. 그들에겐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공적이 있었다.
“김용걸은 좀 어때? 저번에 해독제 먹고 나서 깨어났다고 하던데.”
“이젠 완전히 멀쩡해. 며칠 내로 복귀할 건데, 걔 돌아오면 궁정 마도사 시키려고. 흑마법사가 이 나라 마법사들 대빵 한다고 하면 반발 좀 있긴 할 텐데, 그거야 뭐 실력으로 찍어누르면 되는 거고.”
김창은 얼마 전에 정우신을 죽였던 걸 떠올렸다.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해독제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자 곧장 처형했었다.
“황금성은?”
“걘 변경백 자리 주고 국경 수비시켰어. 그 새낀 내가 봤을 때 수도 가까이에 두면 정신 못 차리고 도박하러 다닐 놈이야. 그런 애들은 변방 좀 떠돌게 해서 정신머리를 고쳐놔야 해.”
그 도박 중독자한테 국경을 맡겨도 되나? 내가 볼 땐 국경에 적이 쳐들어오면 도박했다가 져서 성문 열어줄 것 같은데.
김창이 흠 소리를 내는 가운데 한석구가 바쁘게 손을 놀리며 말했다.
“그 외에도 공적에 따라서 원탁 애들 몇 명한테 영주 자리 줬어. 내가 전에 말했지? 능력 있는 애들한테는 영주 자리 주겠다고. 일단 이번에 식량 나른다고 고생한 민우부터 영주 자리 줄 거야.”
“걔 요즘에도 전령 역할 하러 다니고 있지 않나?”
“영주라고 전령 역할 하면 안 된다는 법 있나. 능력 있으면 써먹어야지. 뭐 그 문제야 나중에 마탑에서 차원문 특화 마법사 양성해서 해결할 테니까 잠깐만 고생해주면 돼.”
“그러냐.”
김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석구가 말했다.
“그런데 넌 어쩌려고?”
“나?”
“그래, 너. 듣자 하니 만네르헤임에게 싸울 만한 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며? 네 성격에 걔네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왜 안 가는 거야?”
김창이 만네르헤임한테 들은 정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용 바르토시스에 대한 것. 다른 하나는 제국의 승천할 자에 대한 것.
원래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장 뛰쳐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지금은 며칠째 왕궁에 머무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게임 엔딩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면 원래 좀 아깝게 느껴지는 법이지.”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어쨌건 그 건에 대해선 며칠 뒤에 출발할 거다. 나도 며칠이고 놀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래, 이번에도 조심히 다녀와라. 내가 굳이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석구가 씩 웃으며 서류에 사인을 할 때였다. 문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하녀가 간식이라도 내오는 모양인가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의장님! 아니, 전하!”
“민우? 우리끼리 있을 땐 그냥 형이라고 해도 돼, 인마. 그런데 갑자기 뭔 일이냐?”
방 안에 다급히 들어온 건 심민우였다. 김창이 오랜만에 보는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는데 무시 아닌 무시를 하는 걸 보면 상당히 바쁜 모양이었다.
“큰일입니다! 국경 쪽에서······.”
“국경? 황금성 이 씹새, 또 도박했냐?”
“그게 아닙니다! 적습이에요! 국경 성벽에서 적습 발생했습니다!”
적습이라고? 전쟁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전쟁이 일어난단 말인가?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다 말고 한석구를 쳐다봤다.
이 새끼, 누가 자기 식구 건드리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놈인데······.
“감히 어떤 씹새가 내 나와바리를 건드리나?”
이게 깡패지, 왕이 할 소리냐? 아무래도 왕이 돼도 천성은 못 고치는 모양이다. 김창은 벌떡 일어난 한석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