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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됐으면 이제 말 좀 조심해라. 동네 건달도 아니고 나와바리가 뭐냐, 나와바리가.”
김창이 한석구의 말씨를 지적하자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어때? 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어전에서 나와바리가 어쩌고 지껄여도 그게 이방인들의 사투리쯤 되는 줄 알걸?”
김창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한석구는 이제 이 나라의 왕이었고 그가 어떤 말씨를 쓰던 그건 자신이 지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한석구의 말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나와바리가 뭔지도 모를 것 아닌가? 어쩌면 그게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고.
“저기··· 두 분 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아까 제가 한 말 들으셨잖아요.”
심민우의 말에 두 사람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네가 한 말? 그거야 들었지. 우리가 너보다 나이가 많긴 해도 귀가 멀진 않았어.”
“정말 들은 거 맞아요? 들었는데 그리 여유로울 수가 있나 궁금할 따름인데요.”
“여유롭지 않을 이유가 있나? 누가 감히 내 나와바리를 건든 것에 대해 화가 날 수는 있어도 그것 때문에 조바심 느낄 이유는 전혀 없는데.”
“어째서요?”
한석구가 김창의 얼굴을 쳐다보며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한 태도로 답했다.
“그거야 국경을 지키고 있는 게 황금성이니까? 네가 걔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 친구가 기복이 좀 있긴 해도 고점은 김창 제외하고 우리 중에서 제일이야. 물론 저점 역시 우리 중에서 제일이긴 한데 어쨌건 걘 주사위 안 굴려도 어지간한 적들은 주먹만으로 머리통 다 터트릴 수 있을걸. 그런 애가 국경 지키고 있는데 대체 뭘 두려워해야 하는 거냐?”
김창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심민우가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의장님이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요, 지금 우리 상황은 제대로 이해하신 거지요? 국경에서 공격이 있었다니까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국경 너머의 공격은 당연히 타국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타국이 공격을 해온다는 건 곧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리고.
왕국은 얼마 전에 전쟁이 끝났고 지금은 한창 전후 복구 중이다. 당연히 힘이 잔뜩 약해져 있는 상태이니 이때를 노려 전쟁을 걸어오더라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석구는 그걸 알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김창이 지옥에 갇혔을 때면 몰라도 지금 왕국에는 반신이 있는데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우리랑 국경 맞댄 곳이라고 하면 한 곳 말곤 없지 않나? 여긴 반도 지형이라 삼면은 바다고 위쪽만 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까.”
“네, 맞아요. 지금 우리를 공격해온 건 제국이에요. 대륙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그 거대한 나라요.”
심민우의 말에 한석구가 흠 소리를 냈다.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공격하는지는야 알만하군. 눈엣가시 같던 왕국이 내전으로 세가 약해졌겠다, 심지어 그 중심엔 그 잘난 원탁 놈들이 있는데 그치들도 내전에 휘말려 세력이 반으로 쪼그라들었으니 해볼 만한 싸움이라 여겼을 게 뻔해.”
심민우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에서 일어난 공격이야 수비대가 잘 막아낼 테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면 왕국은 버티지 못해요.”
“그래, 왕국은 못 버티겠지.”
“그러니 얼른 대책을······.”
“하지만 원탁은 버틸 수 있어.”
“네?”
한석구가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원탁이 없던 시절의 왕국이라면 제국이 공격해왔을 때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겠지. 그런데 지금은 원탁이 있으니까 버틸 수 있어. 내 장담하는데 나나 용걸이가 가서 마법 몇 번 뿌려주면 걔넨 오줌 지리면서 도망칠걸.”
심민우는 한석구와 김용걸이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지 잘 알고 있다. 한석구의 말대로 두 사람이 전장에서 마법을 쓰기만 해도 적들 중 절반은 죽을 것이고 절반은 전의를 잃을 게 분명했다.
확실히 원탁의 전력은 막강하다. 전에는 일국을 상대하기엔 수적으로 밀렸지만 이젠 왕국까지 먹은 마당이 아닌가?
그들이 강력한 마법을 마구 날릴 수 있도록 화살막이 역할을 해줄 병사들은 잔뜩 있다. 그들 수백 명을 내버리더라도 저쪽의 수천 명을 죽여버릴 수 있다면 그건 확실히 큰 승리다.
“뭐 그거야 그럴 테지만······.”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 우리가 아주 센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국 상대로 방심할 수는 없지. 게다가 우린 얼마 전까지 내전 하던 상황이었으니 더는 국력을 소모해선 곤란해. 그러니 이번 일은 해결사한테 맡기자고.”
“해결사요?”
한석구가 손가락으로 김창을 가리켰다. 그걸 본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가라고?”
“그래, 지금 우리 중에서 제일 한가한 게 너잖아. 지난번에 보니 너 막 벼락도 부리고 그러던데 가서 실력 좀 보여주고 그래.”
김창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각기 이런저런 직책을 맡아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한량 기질이 있던 하오성은 물론이고 심각한 도박 중독인 황금성까지 묵묵히 일하고 있을 정도이니 확실히 한가한 건 김창 혼자뿐이었다.
그걸 알고 있긴 하지만 가서 별 이득 볼 것도 없는데 그 멀리까지 가자니 영 기껍지 않았다.
오랫동안 회사 다닌 고참 사원이 내 짬에 그런 것까지 해야 하나 하고 느끼는 것처럼 김창 역시 심한 귀찮음을 느꼈다.
“달리 갈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나.”
하지만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김창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한석구가 환히 웃었다.
“고마워! 그럼 마침 민우도 있으니까 지금 당장 출발해줄래?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이런 일을 굳이 뒤로 미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김창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심민우가 주문을 외워 차원문을 생성했다. 두 사람이 차원문을 통과하는데 뒤에서 한석구가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도착했습니다!”
심민우의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성벽 위였다. 곳곳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어떤 곳은 성벽이 부서져 돌조각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심민우가 원탁에 소식을 전하러 온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상대의 공격이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성벽 위를 걷는데 심민우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 수가······. 그새 이런 일이?”
시체 처음 보나? 왜 저리 놀라지?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심민우가 말했다.
“큰일이에요!”
“그래, 공격을 받았으니 큰일이긴 하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분명 제가 여길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단 몇십 분 사이에 이만한 피해가 나온 건 말이 안 돼요!”
김창은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만큼 적의 공격이 거셌나 보지. 상대는 제국 아닌가? 투석기 같은 걸 잔뜩 들고와서 물량으로 밀어버리면 아무리 성벽이 튼튼해도 죄 부서질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건 투석기 같은 걸로 공격한 게 아니라······.”
심민우의 말에 김창도 성벽의 상처를 자세히 쳐다봤다. 확실히 투석에 의해 부서졌다고 보기엔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뭔가가 할퀴고 지나간 듯한 상처. 칼 같은 걸로 벤 걸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이 길쭉한 상흔은 대체 무엇으로 남겼단 말인가?
김창은 한참 성벽의 상처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말했다.
“이쪽 구역의 병사들은 전멸한 건가?”
“그,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럼 다른 구역은? 왜 이리 조용하지? 제국의 군대는 어디에 있고?”
적습이 있었다면 당연히 적들의 모습이 성 아래에 보여야 한다. 그런데 어디를 둘러봐도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철수했단 말인가? 아니면 성안으로 진입한 건가? 하지만 안쪽에도 보이지 않는데.
“제국군이요? 그런 건 없어요.”
“뭐? 적습이 있었다며? 게다가 여기엔 전투의 흔적까지 있는데 제국군이 없다는 건 대체 뭔 소리냐?”
심민우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말씀을 안 드렸는데, 적은 한 명이었어요. 적습은 단 한 명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소립니다.”
“그게 뭔 헛소리······.”
김창이 말을 하다 말고 휙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쾅 소리에 반응해 시선이 움직인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김창과 심민우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렸다. 그들이 향한 곳은 성문 위쪽이었고 재빨리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마주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박살 난 성벽.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닥에 쓰러진 황금성.
“이게 뭔 상황이냐?”
김창이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심민우가 몸을 떨며 답했다.
“저 사람이에요···. 왕국을 공격한 건 전 한 명이에요······.”
심민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검은색 망토로 몸을 가린 사람이 있었다. 망토는 값비싼 원단으로 만들어졌는지 매끄럽게 빛났고 또한 황금색 자수로 꾸며져 고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망토 사이로 빠져나온 손을 보니 손가락은 희고 길어서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귀족의 것 같았다.
그러나 저 손으로 수백 명의 병사를 죽이고 황금성까지 쓰러트렸으니 결코 무시할 게 못 되었다.
김창이 정체 모를 습격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저쪽에서도 시선을 눈치챈 듯했다.
의문의 습격자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찬란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려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다.
체격으로 보건대 남자인 건 확실하지만 얼굴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각도를 달리해도 여성스러운 모습이 보였다가 다시 남성적인 모습이 보이니 눈을 떼기 어려운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김창은 저 습격자가 귀한 혈통을 타고났으리라 여겼다. 왠지 그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뭘 야려.”
원래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을 보면 심술이 나는 법이라 김창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저쪽에서 하하 웃으며 답했다.
“겁이 없는 놈이로군. 하기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여(余)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그토록 만용을 부릴 수 있는 것이겠지.”
“귀가 잘 안 들리시나? 난 뭘 야리냐고 물었는데.”
“흠, 굳이 대답을 들어야겠다면 해줘야겠지. 뭘 보냐고? 왕국이다.”
오만한 대답을 들으며 김창이 코웃음을 쳤다.
“왕국을 노리는 모양인데, 그만 꿈 깨는 게 어떠냐.”
“왜? 새롭게 왕국의 주인이 된 게 그 잘난 이방인이기 때문에? 여가 그깟 이방인 따위에게 겁을 먹고 도망쳐야 한다는 거냐? 흠, 여의 생각엔 그럴 이유가 없는데. 봐라, 여는 이미 이방인 하나를 이기지 않았나?”
남자가 씩 웃으며 쓰러진 황금성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것도 아주 쉽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창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심민우가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스럽게도 김창은 아무런 상처 없이 착지했다.
그가 저벅저벅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오, 여를 보는 눈이 무섭군. 여가 이 녀석의 머리통을 걷어차서 그런 거냐? 너무 그러진 마라. 그래도 죽이진 않았잖느냐?”
“되게 깝죽거리는군. 너 뭐 하는 놈이냐?”
“여를 모르나? 하기야 머리 검은 이방인 놈이니······. 그럼 특별히 말해주지.”
남자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는 승천할 자다. 네가 그러하듯.”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김창의 몸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고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남자 역시 그걸 느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또한 황금 제국의 주인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