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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이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니까 네가 제국의 황제라고? 옥좌 위에서 만인의 우러름을 받아야 할 존재가 지금 단신으로 왕국을 점령하러 왔다는 거냐?”
남자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그걸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김창은 문득 만네르헤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때 대악마였으나 지금은 원탁의 일꾼으로 전락해버린 그것은 제국에 승천할 자가 있다고 말했었다.
김창이 그에 대한 정보를 다 듣지도 않고 떠나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바로 이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당황스러운 건 김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 승천할 자들은 자신만의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법이니 제국의 승천할 자 역시 응당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껏해야 귀족 정도가 아닐까 했었는데 설마 황제일 줄이야?
‘그럼 제국이 그토록 광대한 영토를 거느릴 수 있었던 건 전부 황제 덕분인가······.’
원탁의 랭커 하나만 있어도 전장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데 그보다 더 강한 승천할 자는 어떠할 것인가.
“내가 널 죽이면 황제 살해자가 되는 건가? 그거 별명으로 삼기에 아주 멋지긴 한데, 그래도 되려나 모르겠네.”
김창은 왕을 죽일 때도 잠깐이지만 고민을 했다. 몹시 당연한 소리지만 왕이나 황제쯤 되면 그 목숨이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 죽은 것만 해도 상당한 혼란이 발생했는데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황제가 죽으면 그 뒤는 어찌 될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저놈을 어째야 하나? 죽이는 건 쉽지만 죽이고 난 뒤의 일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김창이 반신다운 오만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왜 고민하고 있느냐? 여가 죽으면 제국에 큰 혼란이 닥칠까 봐 그러는 것이냐?”
“내가 정치에 대해서 잘은 몰라도 혼자 전쟁하겠답시고 떠난 황제가 목 잘린 채로 돌아오면 제국에 뭔 일이 생길지는 알겠는데.”
“제국은 거대하다. 거기엔 사람이 있지. 아주 많고 많은 사람이. 제국은 황제가 아니다. 제국은 그저 제국이야. 황제가 죽었다고 해서 갑작스레 무너져 내릴 만큼 연약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니 널 죽여도 된다고?”
“네가 그럴 수 있다면. 그리고 황제의 죽음에 대해선 걱정할 것 없다. 여는 황제가 아니니까.”
이게 뭔 소리야? 방금 자기가 황금 제국의 주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황제가 아닌데 제국의 주인일 수가 있나?
남자가 김창의 의문을 눈치챈 듯 바로 대답했다.
“너는 여를 모르는 듯하니 소개하지. 여의 이름은 아슬란. 위대한 황금 제국의 섭정왕이노라.”
섭정이라는 건 말 그대로 황제를 대신해 정무를 보고 있다는 것이고 왕은 그의 직책을 뜻했다. 아마 그는 황족일 것이고 어린 황제를 위해 섭정을 하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아슬란은 제국의 주인을 자처할 만한 위치에 있지만 실제로는 황제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고서 김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것참 다행이군. 어쨌든 널 죽여도 황제는 남는다는 소리니까.”
“하하, 참 재밌는 놈이로구나. 그래서, 여도 네 소개를 들을 수 있을까?”
이미 다 알고 온 거 아니었나? 김창이 귀찮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창, 그저 칼잡이.”
“흠, 네가 그 유명한 원탁의 승천할 자로군. 그간의 승천할 자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성격을 가졌다지? 네가 죽인 하이나는 여의 친구였는데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 안타까웠어.”
“그러면 내가 곧 친구 곁으로 보내줄 테니까 목 내밀어.”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는걸. 여는 지금껏 승천을 미뤄왔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어서 말이야. 김창, 승천의 때가 왔다.”
다들 왜 이리 승천하길 바라는 걸까? 신이 된다는 게 그토록 매력적인 일인가? 내 생각엔 신이 되는 것보다 제국의 섭정으로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 훨씬 더 재미있지 않나.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서 승천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냐? 날 불러내려고?”
“그러하다. 승천할 자는 고난을 통해 더욱 강해지는 법이지. 그리고 너는 여가 넘어야 할 고난으로서 적당하다.”
사람을 무슨 장애물 달리기의 허들 취급하는데 참 건방지군. 김창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미안한데 그러다 다리 찢어져, 새끼야.”
“···뭔 소리냐?”
“넘지도 못할 장애물에 도전하다가 다리 찢어진다고. 장애물 달리기 시합에서 열심히 달리다가 허들 못 넘어서 자빠지는 것만큼 추한 일이 없거든? 그러니 괜한 객기 부리지 마. 내가 넘어져 봐서 알아.”
“넘어져 봤나? 그것참 애도할 만한 일이군······. 남들 다 보는 데서 그랬으니 그 꼴이 얼마나 추했을까?”
왜 이리 까불지. 김창이 두 눈을 부릅뜨자 아슬란이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황금의 채찍이 두 자루 생겨났다.
따로 무기를 들고 있지 않기에 마법사가 아닐까 생각하긴 했는데 저런 걸 쓸 줄이야.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상황이라 김창도 더 말하지 않고 칼자루를 매만졌다.
“여가 그 기억을 잊게 해주지. 죽음으로 말이야······. 승천의 제물이 되어라, 김창.”
짝!
아슬란이 채찍을 휘두르자 바닥이 갈라지며 먼지구름이 일었다. 공격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단지 위협이 목적이었던 것 같은데 김창이 보기엔 참 건방진 짓거리였다.
원래 좆밥이 나대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게 없는데 저 친구는 뭘 믿고 저토록 나대나? 분명 승천할 자라는 지위와 제국의 섭정왕이라는 직책 덕분에 남들에게 항상 떠받들어지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저토록 건방을 떨지.
“건방진 놈에겐 매가 약이라고 했다. 내가 약 줄 테니까, 써도 뱉지 말고 다 삼켜라.”
김창이 천천히 칼을 뽑았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아슬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승천할 자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고 하이나를 죽인 김창이 만만치 않은 적이라는 것 역시 알았다.
승천할 자끼리의 싸움은 단순히 목숨만을 걸고 하는 게 아니다. 신이 되기 위한 자격, 어쩌면 목숨보다 더 소중할지 모르는 신성을 걸고 하는 싸움이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모든 걸 얻을 것이요, 지는 자는 모든 걸 잃으리라.
나는 잃을 것인가? 아니면 얻을 것인가? 아슬란은 채찍을 잡은 손이 저려오는 걸 느끼며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약은 약사에게 받으라고 했는데. 그럼 네가 실력 있는 약사인지 어디 한 번 볼까? 칼을 뽑아라! 이제 승부의 막이 오를······.”
우렁차게 외치던 아슬란의 목소리가 갑작스러운 소음에 묻혔다. 아슬란은 물론이고 칼을 뽑으려고 하던 김창도 고개를 돌려 소음이 난 곳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일그러진 공간이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건 거대한 차원문이었고 그 크기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했다.
차원문의 대가인 심민우도 저만한 차원문을 만든 적이 없는데 대체 누가? 어지간한 마법 실력을 가진 게 아니고서야 저런 재주를 부릴 수 없다는 걸 김창은 알고 있었다.
저게 자연 현상일 리는 없으니 누군가 차원문을 열었을 것이다. 누가 그랬을까?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이거 어쩌면······. 김창이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끼며 차원문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쿠구궁······. 차원문은 크기가 거대한 만큼 완전히 열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전부 열린 상태였다.
차원문이 열렸다면 당연히 저 안에서 무언가 나타날 것이다. 김창과 아슬란은 싸우려던 것도 잊고 차원문에 집중했다.
두 명의 승천할 자의 시선을 받으며 무언가가 차원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섭정왕, 네겐 미안하지만······.”
덩치가 크면 목소리도 큰 법일까? 분명 속삭이듯 말하고 있는데 바로 근처에서 말하는 듯 시끄럽게 들린다.
김창은 자신의 머리 위로 진 그림자를 보고서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육중한 몸에 날렵한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존재. 황금과 보물의 수호자이며 온갖 마법에 통달했고 입에서 뜨거운 불을 뿜어내는 반신적 생물.
그것의 정체는 용이다. 그리고 이 용의 이름은 바르토시스고.
“···그건 내 먹잇감이다.”
육식 동물이 으레 그러하듯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나타난 바르토시스가 황금색 눈을 빛내며 김창을 쳐다봤다.
“안녕하신가, 김창. 우리의 인연은 참 길었으나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하는 건 처음이로군?”
죽여야 할 놈들이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나 제 발로 걸어오다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김창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용답게 아주 크군. 써는 맛이 있겠어. 그래서 안녕하냐고? 물론 안녕하지. 아무래도 우린 곧 안녕이라는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런가?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사이에 있었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가령··· 네가 훔친 내 신성이라던가.”
“아, 그거라면 내가 입양해서 잘 키우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젠 네 얼굴도 기억이 안 난대.”
“말장난을 즐기는 성향인 줄은 몰랐군. 그저 살육만을 즐기는 과묵한 칼잡이인 줄 알았더니만.”
“널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 과묵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너도 덤빌 거냐? 미안하지만 선객이 있는데.”
바르토시스가 아슬란을 흘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슬란, 네 죽음이라면 잠시 뒤로 미뤄도 될 것 같다. 내가 내리는 자비이니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아슬란이 빙긋 웃었다.
“···용의 심장이 그토록 진미라고 하던데, 아주 기대가 되는군.”
“건방진 놈. 아무리 승천할 자라고 하더라도 인간 따위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데. 뭣하면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놀아줄 수도 있는데. 여가 볼 때 김창 저 친구는 시간이 많아 보이거든. 그러니 몇 분 정도야 기다려 줄 수 있을 거야.”
나 시간 없어, 이 새끼야. 김창이 시답잖은 말다툼이나 하고 있는 바르토시스와 아슬란을 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누가 너희 둘 보고 싸우래? 헛짓거리 그만하고 둘 다 덤벼.”
바르토시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김창. 신성을 얻었다고 해서 네가 신이라도 된 줄 아느냐? 너는 그저 내 신성을 훔친 도둑놈에 불과하다! 그런데 네가 감히 우리 둘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슬란도 곁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김창. 네가 승천할 자로서 수많은 고난을 넘어왔다는 건 여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 둘을 상대할 수는 없지? 여 하나만 해도 몹시 강한데 저 덜떨어진 도마뱀까지 붙는다면 네 승산은 없······.”
“말 되게 많네.”
꽈르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처럼 갑작스레 벼락이 내리쳤고 김창의 칼날이 창백하게 빛났다.
칼을 뽑는 순간 벼락의 화신으로 변한 김창을 보고서 아슬란과 바르토시스는 그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만 나불대고 빨리 덤벼.”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김창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쩔 수 없군. 이번만 힘을 빌려주지, 아슬란.”
“내 발목이나 잡지 마라, 바르토시스.”
무슨 만담 하나? 김창이 쯧즛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