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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우, 이 새끼 원탁으로 데려가.”
김창은 싸우기 전 바닥에 쓰러져 있던 황금성을 회수했다. 대충 황금성을 성문 근처에 내던지자 심민우가 재빨리 아래로 내려와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제 거치적거릴 것도 없어졌겠다, 싸움을 더 미룰 이유가 없어진 김창이 말했다.
“둘 다 점잔뺄 거 없다. 전력을 다해서 덤벼.”
김창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바르토시스와 아슬란이 발끈했다. 그러나 둘은 김창의 오만한 태도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서로 거리를 벌리더니 좌우에서 김창을 노려보고 섰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용과 황금 채찍을 휘두르는 승천할 자.
그 둘 중 어느 쪽을 먼저 쓰러트려야 할까. 김창은 좌우로 눈을 한 번씩 굴리다가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벼락이 내리치는 것과 동시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요도가 칼집에서 빠져나와 공중을 비행했다.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군!”
아슬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보고서 황금 채찍을 휘둘렀다. 두 자루의 채찍은 뱀처럼 요사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더니 휙 소리와 함께 날아다니는 칼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 했다. 칼은 재빠르게 움직여 채찍들 사이를 지나치더니 그대로 아슬란을 향했다.
거칠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칼을 본 아슬란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이까짓 것에 당할 줄 알고!”
분명 저 멀리서 허공을 때리고 있던 채찍이 살아있는 뱀처럼 대가리를 홱 돌리더니 칼을 향해 움직였다.
아주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거리가 있는지라 당장 칼자루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아슬란이 믿고 있는 부분은 채찍 하나가 아니었다.
우드득!
아슬란의 옷 뒤가 찢어지고 뼈가 뒤틀리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황금의 손이 나타났다. 그게 날아오는 칼을 거칠게 쳐내자 뒤에서 쫓아오던 채찍이 칼자루를 세게 붙잡았다.
더는 멋대로 날뛰게 두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칼을 붙잡은 채찍을 보고서 아슬란이 크게 외쳤다.
“거인의 손을 가진 자를 상대하라! 설마 여가 고작 채찍 따위를 믿고서 여기 왔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김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싸우는 중에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으니까.
“읏!”
아슬란은 갑작스레 나타난 김창의 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뒤로 뺐다. 날카로운 칼날이 방금 전 그의 턱이 있던 곳을 스쳐 지나갔고 벼락이 가진 뜨거운 열이 공기를 달궜다.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킨 아슬란이 반사적으로 남은 채찍 하나를 휘두를 때였다.
서걱!
낡은 동아줄을 끊어내듯 가벼운 움직임으로 채찍을 자른 김창이 다시 한번 칼을 내질렀다.
섬광이 반짝이고서 아슬란의 황금색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잘렸다. 그의 등 뒤에서 자라난 거인의 손은 주인이 반응하지 못하는 공격까지 재빨리 반응했지만 그럼에도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다.
공격이 워낙 빠르고 강력한 탓에 한 박자 늦게 움직인 거인의 손은 공격을 완벽히 쳐내는 게 아니라 경로를 약간 수정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고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잘려 나갔으니 조금만 운이 나빴다면 그대로 이마가 찢어져 죽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아슬란이 섬뜩함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뜨거운 공기가 불어닥쳤다.
“잘하고 있다, 아슬란! 그대로 놈을 붙잡아!”
김창의 등 너머를 보니 거기엔 입을 쩍 벌리고 이글거리는 불꽃을 내뿜는 바르토시스가 있었다.
저 미친 도마뱀 새끼, 나까지 구워버릴 셈인가? 아슬란이 당황하며 김창의 공격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꽈르릉!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바르토시스의 머리 바로 위로 떨어졌다. 아무리 두꺼운 가죽을 가진 용이라고 해도 그 공격으로부터 멀쩡할 수는 없었다.
입을 벌리고 불을 뿜어내던 바르토시스가 몸을 움찔거렸고 그 탓에 공격의 경로가 틀어졌다.
뜨거운 불꽃은 애꿎은 대지를 불태웠고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가 전장을 감쌌다. 바르토시스는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것에 짜증을 부리며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그걸 본 아슬란이 벌컥 화를 냈다.
“이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여까지 죽여버릴 셈이냐!”
“살았으면 된 것 아닌가? 쓸데없는 소리는 그쯤하고 그 녀석이나 붙잡아라.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버릴 테니.”
“바르토시스, 이 멍청한 도마··· 컥!”
아슬란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갑작스럽게 날아온 발차기에 맞고 뒤로 멀리 날아갔고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이게 발차기에 맞은 게 맞나?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나더라도 나 역시 승천할 자인데 이 정도 충격은······.
“일어나지 마라. 뒈진다.”
아슬란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김창의 경고가 날아왔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몸을 움찔거리는데 김창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바르토시스의 발밑에서 다시 나타났다. 신나게 불을 뿜어대고 있던 용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날 때였다.
“크아악!”
반짝이는 빛이 용의 단단한 비늘을 갈아버렸다. 박살 난 비늘이 어지럽게 튀며 오색으로 반짝이는 가운데 두꺼운 살갗은 물론이고 그 아래의 근육까지 완전히 갈라져 뜨거운 피를 산지사방으로 흩뿌렸다.
김창은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용부터 끝장내기로 결심한 것인지 자비 없는 연격을 날렸다.
범인은 감히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재빠른 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박살 난 비늘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바르토시스가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벌려 성난 고함을 토해냈다.
“얼어붙어라!”
그것은 용언이자 그 자체로 마법인 외침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이 그저 외치기만 하면 그것이 마법으로 변했다.
아까까진 불꽃의 열기로 후끈했는데 이젠 차가운 냉기가 휘몰아쳤다. 김창은 자신의 다리를 붙잡은 얼음을 보고서 흠 소리를 냈다.
“아슬란! 뭘 하고 있나! 이 녀석을 죽여!”
바르토시스의 외침에 멍하니 있던 아슬란이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김창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인의 손을 보고서 나직이 말했다.
“말했지, 일어나면 뒈진다고.”
벼락이 쳤다. 반신의 분노를 대변하듯 전에 없을 만큼 강렬한 벼락이.
“커억!”
거인의 손이 반으로 잘려 아래로 떨어졌다. 그게 몸의 일부라도 되는 것인지 아슬란은 큰 타격을 받고서 입에서 피를 왈칵 뱉어냈다.
김창이 그부터 끝장내려 몸을 움직일 때였다. 다리를 붙잡고 있던 얼음이 점점 자라나 이제는 허벅지까지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힘으로 부수고 탈출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적이 아슬란 하나뿐이었다면 이 정도 공격이야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부서져라!”
용언에 따라 얼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러면서 김창의 다리에 날카로운 조각이 수십 개나 박혔다.
아무리 반신이라 할지라도 이만한 공격을 받고도 아무 타격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의가 찢어지고 곳곳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는 가운데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닥쳤다.
홱! 바르토시스가 휘두른 발에 맞고서 김창의 몸이 날아갔다. 공중을 날아 바닥에 처박힌 김창이 쿨럭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킬 때, 저 위에서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쏟아져라!”
반짝임은 하나가 아니었다. 누군가 하늘에 폭죽을 터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전부가 김창 한 명을 노리고 쏟아졌다.
이게 축제의 한 장면이었다면 굉장히 낭만적이었을 텐데, 실제론 목숨 걸고 싸우는 중이라 그 아름다움을 즐길 시간은 없었다.
김창이 다급히 칼을 드는 순간에 빛이 지상을 폭격했다. 새하얀 빛이 눈을 멀게 했으며 시끄러운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역시 두 명은 좀 무리였나.”
빛 속에 삼켜졌던 세상이 차츰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김창이 칼을 휘둘러 먼지구름을 걷어냈다.
옷이 찢어지고 몸 곳곳에 상처를 입은 그가 퉤 하고 피 섞인 피를 뱉어낼 때였다.
쿵!
황금의 주먹이 그의 몸을 후려쳤다. 김창은 그것에 맞고 날아가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거인의 손이라면 아까 부쉈을 텐데? 설마 또 만들 수 있는 건가?
“처음부터 전력을 내라고 했지? 확실히 그건 유효한 충고였다. 저 도마뱀 놈과의 대결을 의식해 힘을 아끼고 있었지만 그랬다간 여가 죽을지도 모르겠군!”
김창의 시야 안에서 황금색 빛이 반짝였다. 처음엔 또 거인의 손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그건 기사였다. 신성으로 만들어진 황금의 기사.
“그러니 이제부턴 전력으로 가겠다. 각오해라, 김창!”
벼락의 화신과 황금의 기사가 서로 얽혀 싸우기 시작했다. 둘 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칼날과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더욱 격렬하게 빛이 반짝였다.
“얼어붙어라!”
김창은 한창 아슬란을 몰아붙이다가 쯧 하고 혀를 차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곳이 차갑게 얼어붙은 게 보였다.
‘한 명씩 상대하는 거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두 명이라 확실히 성가시군.’
둘이라고 해서 이기지 못할 것은 없으나 이쪽도 제법 출혈을 감수해야 하리라. 김창은 전력을 내기 시작한 아슬란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했다.
“칼!”
김창이 외치자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칼이 날아와 아슬란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날아온 불꽃의 화살이 칼을 요격해 떨어트렸다.
칼은 다시 날아올라 주인의 곁으로 가려 했지만 바르토시스의 마법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칼은 마치 무거운 추에 짓눌린 것처럼 바닥에 바싹 달라붙었고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다시 공중으로 떠오를 수 없었다.
저 성가신 놈, 가지가지 하는군. 김창이 바르토시스 쪽으로 짜증스레 고개를 돌릴 때였다.
“어딜 보는 거냐!”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김창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뼈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반신의 고개를 돌아가게 만들 만큼 강력한 타격인 건 맞았다.
김창이 일단 아슬란부터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쪽으로 칼을 휘두를 때였다. 분명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거인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거인의 손은 김창이 들고 있던 칼을 쳐냈다. 칼은 하늘을 빙글빙글 돌다가 곧바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 전에 아슬란의 주먹이 먼저 김창의 얼굴을 후려쳤다.
“바르토시스!”
“번쩍여라!”
꽈르릉!
하늘이 어두워지고 벼락이 쳤지만 이번 벼락은 김창이 부린 게 아니었다. 용은 창공의 지배자답게 벼락을 부릴 수 있었고 자신의 능력을 가감 없이 과시했다.
“해치웠나···?”
“그런 말을 하면 꼭 살아나던데······.”
황금의 기사 아슬란이 침을 꿀꺽 삼키며 먼지구름 속을 쳐다봤다. 그 안에선 한 인영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쓰러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과연 김창은 그대로 죽지 않았다. 벼락을 정면에서 맞았음에도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서 있었다.
그러나 연달아 타격을 허용했으니, 심지어 이번엔 강력한 공격까지 맞았으니 전과 같은 기세를 보여주진 못하리라.
아슬란과 바르토시스는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음을 느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저 녀석은 칼잡이. 칼도 없는 칼잡이가 뭘 할 수 있다고······.”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아슬란과 바르토시스는 이번에야말로 김창을 끝장내겠다고 생각하며 전의를 불태울 때였다.
파지직.
“칼 없는 칼잡이가 뭘 할 수 있냐고.”
먼지구름이 걷히고 보인 것은 아직 쓰러지지 않은 김창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서 아슬란과 바르토시스가 당황했다.
그가 쓰러지지 않아서?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그럼 그들은 뭘 보고 놀랐는가.
칼이다. 분명 김창은 두 자루의 칼을 모두 잃었는데 어째서인지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건 칼이 아니라 벼락이었다. 벼락 그 자체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난 칼잡이가 아니다.”
김창의 기세는 강성했다. 마치 바르토시스가 떨어트린 벼락을 흡수하기라도 한 것처럼.
“반신이지.”
벼락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