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63화 (162/200)

163

“내가 그딴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김창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한석구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알고 있지. 농담한 거였어. 하지만 내 추측이 맞는다면 이건 좀 놀라운데. 너 설마 황제를 도와줄 생각이냐? 후견인을 잃은 어리고 병약한 황제를?”

“그러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다니까 좀 놀라울 뿐이야. 넌 그런 짓을 할 놈이 아니니까.”

“내가 뭘?”

한석구가 히죽 웃으며 답했다.

“넌 원래 돈 받으면 뭐든 하는 놈이지만 반대로 돈 안 주면 아무것도 안 하는 놈이지. 그런데 네가 돈 받은 것도 없는데 황제를 도와야 한다고 나오면 당연히 놀랍지 않겠어?”

그 말에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니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됐는데 돈 받은 게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슬란을 죽이기 전에 돈이라도 좀 뜯어낼걸. 황제를 도와주는 값으로 금화를 받겠다는 약속을 했으면 아슬란도 걱정 없이 죽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원래 무상의 행복은 없다고, 돈 안 받고 남 도와주는 놈보다 받을 거 다 받고 남 도와주는 놈이 더 믿을 만한 법이다.

“네 말 듣고 보니 돈을 안 받은 게 너무 억울하네. 아슬란 이 씹새, 어디서 뭘 하다 죽었는진 몰라도 돈은 주고 가야지.”

“···네가 죽였잖아.”

“누가 죽였는지가 중요한가? 죽었다는 게 중요하지.”

한석구가 더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정말 제국 가서 황제 도우려고? 그런데 뭔 수로? 내 알기로 네가 제일 잘하는 건 누구 죽이는 일인데, 그럼 가서 황제한테 대들 만한 놈들 싹 죽이게?”

누굴 사람 죽이는 것 말곤 할 줄 모르는 개백정으로 아나.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한석구는 그리 겁내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이토록 깝죽거렸다면 진작에 칼이 나갔겠지만 자신을 상대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한석구는 잘 알고 있었다.

고작 그런 말로 감정이 상해 칼부림을 하기엔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알고 지냈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나. 지금 황제한테 필요한 건 성인이 될 때까지 제위를 지킬 수 있도록 뒤를 봐줄 든든한 뒷배야. 그리고 그거야 만들어주면 그만이지.”

“하기야 황제가 성인이 되면 친정을 시작할 테니 그땐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되겠지. 하지만 황제의 뒷배가 되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런 놈이 있었다면 애초에 아슬란이 추하게 목숨 구걸은 안 했을 것 같은데.”

“그거야 제국에 가서 잘 찾아봐야지. 그리고 만약 그 방법이 안 먹히면 다른 방법도 있어.”

“뭔데.”

김창이 대답하는 대신에 칼자루를 매만졌다. 칼집이 허벅지와 부딪혀 절그럭 소리를 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섬뜩한지 한석구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제국에는 언제 갈 건데? 빚 받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쳐들어갈 건 아니잖아.”

“그러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지. 방금 싸우고 돌아왔는데 잠깐이라도 쉬어야지. 오늘은 쉬고 나중에 가.”

“나 별로 다치지도 않았고 이제 이 정도 싸움으로는 지치지도 않아.”

“너 괴물 된 거 나도 아는데, 그래도 쉬어. 애초에 지금 가려고 해도 너 제국까지 못 가.”

“왜 못 가는데?”

한석구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제국이 무슨 동네 뒷산이냐? 네가 가겠다고 마음대로 가게? 그리고 황제는 또 어찌 만나려고? 아슬란이 황궁에 네 이야기를 미리 해두었으면 또 몰라, 그런 것도 아닌데 황제가 뭘 믿고 널 만나줘?”

“그냥 민우 불러서 차원문 열고 황궁으로 바로 들어가면 안 되나? 혹시나 거기 사람들과 약간의 마찰은 있을 수 있겠지만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안한데 대화는 칼 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차원문 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자기가 가본 적 없는 곳은 갈 수 없다고. 내 알기로 민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제국에 가본 적 없을걸. 그러니 제국에 가려면 국경에 차원문을 열고 직접 걸어가야 하는데 거기서 또 제도까지 가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아니, 이 세상에 떨어지고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제국에 가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다들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구만.”

너도 안 가봤잖아. 김창은 한석구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그럼 아슬란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단신으로 국경에 쳐들어가야 하나? 그랬다가 괜히 전쟁이라도 날까 봐 두려운데.”

“내 장담하는데 너 혼자서 그 전쟁 끝낼 수 있을걸. 왕국에서 1년이나 이어졌던 내전을 혼자서 끝냈던 게 너 아닌가.”

김창은 그런 걸로 으쓱댈 생각이 없었으므로 가만히 있었다. 한석구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무식한 방법 말고 합법적으로 제국에 들어갈 방법이 있으니까 너무 보채지 마라. 이 방법 쓰면 황제도 만날 수 있을걸.”

“그게 뭔데.”

“제국에 사절을 보내는 거야. 원래 국왕이 바뀌고 그러면 제국에 사절 보내서 알리고 그러는 거 알지? 본래라면 진작 했어야 할 일인데 우리가 굳이 제국한테 머리 숙여야 할 이유도 없고 하니까 지금까지 안 보내고 있었거든? 그런데 마침 네가 제국 가야 할 일이 생겼으니 그냥 한 번 보내보지 뭐.”

확실히 그런 방법이라면 칼부림하지 않고도 황제를 만날 수 있을 터다. 김창이 호오 소리를 내는데 한석구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제국이 우리를 공격했던 일도 끝맺음을 지어야겠지. 옛날 같으면 제국이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못 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할 말은 해야 하니 말이야.”

“제국에 사과를 요구하는 거면 그쪽이 들어줄 것 같진 않은데. 오히려 아슬란을 죽인 걸 빌미로 이쪽의 책임을 물으려 하면 어쩔 거냐.”

김창은 제국이 그런 요구를 하면 한석구가 당연히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있을 법한 일 아닌가.

항상 내 나와바리가 어쩌고 우리 애들이 어쩌고 하던 놈이니 제국이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면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날뛰어도 크게 이상할 건 없다.

“그럼 그냥 무시하는 거지 뭘.”

그러나 생각한 것과 다르게 한석구의 반응은 심심했다. 김창이 의외라는 듯 흠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냥 무시하고 끝낸다고? 너라면 당연히 혼쭐을 내줘야 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제국이 헛소리하면 걔네 때려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런데 때리고 나면? 가서 제국 먹으면 되나? 아까도 내가 말한 것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 제국 먹으면 배 터져. 역사적으로도 무리하게 세력 확장한 나라는 죄 망했어. 우리 입장에서는 아직 왕국도 겨우 다스리고 있는데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지.”

“그런 것치고 지난번에 지옥으로 세력 확장했다고 기뻐했던 것 같은데.”

“거기야 뭐 지상이 아니니까 먹더라도 크게 부담이 없지. 생각해보니 거기도 나중에 한 번 시찰 가야 할 것 같은데.”

개눈깔이 화낼 것 같은데. 김창이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서 말했다.

“그럼 사절단은 언제 보낼 거냐. 내가 그런 쪽으로 잘은 몰라도 사절단을 하루아침 사이에 꾸릴 수는 없을 거 아니야.”

“한 달 안에는 출발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오늘도 수고했다. 이만 가서 쉬고 사절단 출발할 때 부를게.”

김창이 대답 대신에 손을 흔들고서 집무실을 나왔다.

* * *

날이 밝았다.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선선히 불어 먼 길을 떠나기엔 딱 알맞은 날이었다.

짐을 잔뜩 실은 마차들이 느릿하게 성문을 나서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은 행렬의 이동 속도에 맞춰 발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그럴 만했다. 그들이 지켜야 할 마차에는 많은 귀빈이 타고 있었고 또한 값비싼 물건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단지 그러한 이유만으로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행렬의 머리가 향하는 곳은 그들의 고향이 아니었다. 대륙에 사는 모두가 그 위상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곳, 지금껏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고고히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곳.

황금 제국.

그 이름의 무게감을 알기에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는 창 자루에 힘을 꽉 주었다.

길고 긴 행렬이 성문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보이는 것은 넓고 넓은 황야였다. 또한 이제부터 그들이 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왕국에서 제국으로 보내는 사절단이 길고 긴 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의 여정은 이제부터 몇 주간 이어질 것이며 제국의 국경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을 소모할 터였다.

병사들은 그 지루한 일정을 묵묵히 견뎠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귀빈들 역시 별다른 불만 없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나 별말이 없다고 해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행이라는 게 으레 그러하듯 이동 중일 때가 제일 괴로운 법이 아닌가.

때문에 저 멀리 제국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모두가 작게나마 환호했다. 아직도 일정이 제법 남았지만 그래도 볼 게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 벗어나긴 했으니까.

“정지! 본인은 제국 국경 수비대의 대장인 호른이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소속을 밝혀라!”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외침에 행렬이 멈추었다. 행렬의 선두에서 마차를 몰고 있던 마부는 행렬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국경 수비대를 보고서 흠칫 몸을 떨었다.

황야에서 나타날 만한 행렬은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 외에는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저토록 적대적으로 나오는 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속을 밝혀라! 세 번의 기회는 없다! 어디서 온 누구냐?”

수비대장 호른의 외침에 선두에서 마차와 함께 말을 몰고 있던 기사가 얼른 대답했다.

“우리는 왕국에서 온 사절단이오! 존귀하며 또한 존엄하신 제국의 주인을 뵙고자 이 먼 길을 찾아왔소!”

“왕국에서 왔다고? 흠, 그럼 거기서 기다리시오. 왕국의 기사가 신성한 제국의 땅을 밟기 위해선 마땅한 절차가 있는 법이니.”

기사가 작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미 서로 이야기가 다 끝난 상황인데도 저리 귀찮게 구는 건 누가 봐도 명백히 시비를 걸려는 목적이었다.

호른이 왜 저러는지 이유야 알 만했다. 제국과 왕국의 국력 차이 때문에 제국은 항상 왕국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국이 제국의 섭정왕을 죽였으니 제국의 입장에서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았으리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승천할 자인 섭정왕이 왕국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에서 위기감을 느껴야 할 테지만 호른은 멍청하게도 감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잠깐 행렬에 대한 수색이 있겠소.”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 아래로 내려온 호른의 말에 기사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사절단의 마차를 수색하겠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이건 일개 상단 따위가 아니오! 왕국의 사절단이지!”

“내 알기로 그 잘난 원탁께서 제국의 섭정왕의 목숨을 빼앗았던 걸로 아는데.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내 어찌 왕국의 사절단을 그냥 보내겠소? 만약 당신들이 불경한 마음을 먹고 황궁까지 나아간다면?”

호른의 말은 명백히 도발이었다. 너희가 사절단이 아니라 황제 암살단이면 어쩔 거냐는 물음이었기에 기사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검게 변했다.

그가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기세가 되자 다른 기사가 와서 얼른 그를 말렸다. 호른이 그걸 보고 코웃음을 치더니 병사들에게 수색을 지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병사들이 귀빈들이 타고 있는 마차까지 막무가내로 수색할 수는 없었기에 험악한 분위기와 다르게 수색 자체는 정중하게 이루어졌다.

호른은 제국의 병사들이 왕국의 사절단에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사절단은 책임자가 없나? 상황이 아니면 경이 책임자인 거요? 일국의 사절단의 책임자가 겨우 이름 모를 기사 하나라니,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기사가 이를 부득 가는 가운데 호른은 천지 무서운 줄 모르는 아이처럼 날뛰었다.

“그런데 이 마차는 뭐요? 왜 아무도 안 열어보는 거지?”

호른이 행렬 중간에 있는 마차로 뚜벅뚜벅 다가가자 기사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마차는······.”

“왜 그리 당황하지? 이 마차에 뭐 위험한 것이라도 숨겨둔 게 아닌가? 내가 직접 봐야겠군.”

기어코 호른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안은 다른 곳과 다르게 몹시 어두웠는데 안쪽에는 남자 한 명 외에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열린 문 때문에 빛이 안쪽으로 들어오자 남자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자 호른은 자기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이 남자는 뭐지? 생긴 걸 보면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용병인가? 그런데 뭔 놈의 기세가······.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안쪽의 남자도 고개를 들었다. 그는 딱 한 마디만을 했다.

“문 닫아.”

“아, 예······.”

호른이 누구보다 공손하게 마차 문을 닫고서 못 볼 걸 봤다는 듯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혹시 이거 흉악범 호송 마차인가? 안에 웬 눈매 더러운 이상한 놈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