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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조심하시오. 그분이 이번 사절단의 책임자니까.”
저 눈매 더럽게 생긴 남자가? 기사의 말을 듣고서 호른은 허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듣기로 왕국이 이번에 사절단을 보낸 이유는 새로운 왕의 즉위를 알리고 양국 간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 목적이 있다면 응당 그에 맞는 인물을 보내야 할 터인데 왕국이 보낸 건 저 무시무시하게 생긴 칼잡이다.
어쩌면 왕국은 사절단을 명목으로 암살자를 보내 황제를 죽이려는 게 아닐까? 사절단의 책임자라면 황제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
호른은 그게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는 걸 알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행렬 안에 위험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 검문을 해야겠다는 건 단지 심술에 불과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잘한 일일지도······.
“검문은 이만하면 다 끝난 것 같소만, 언제까지 우릴 붙잡아 둘 셈이오? 제국의 손님 대접이라는 것도 참 볼만하군.”
기사의 불퉁한 목소리에 호른이 상념에서 깼다. 이 행렬을 그냥 보내야 하나? 보기에 위험한 건 저 칼잡이 하나뿐인데, 그저 병졸에 불과했다면 억지로 이쪽에 붙잡아둘 수 있겠으나 사절단의 책임자한테까지 그럴 수는 없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호른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뚝 흘렀다. 사절단의 책임자를 단지 인상이 험악하다는 이유만으로 억류해둘 수는 없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맞붙은 입술을 떼는 순간에 누군가 성안 쪽에서 걸어 나왔다.
“호른 경, 귀한 손님이 오셨으면 얼른 모실 일이지 왜 아직 그러고 있습니까?”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유약하진 않았다. 행렬의 사람들이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잘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빙긋 웃었다.
호른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고서 두 눈을 크게 떴다.
“헤이먼스 후(侯)? 아니, 이곳은 갑자기 왜······.”
“아, 호른 경. 불철주야 국경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걸 보고 많이 놀란 모양인데, 혹여 감찰이라도 나온 게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이 보기엔 내가 한량처럼 보여도 굳이 그런 일로 찾아올 만큼 한가하진 않아서.”
헤이먼스 후작이 빙긋 웃자 호른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그걸 본 후작이 껄껄 웃더니 호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농담입니다, 농담. 그래서 왜 왔느냐고요? 그거야 내가 이번 사절단 접대 책임자이니 응당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호른이 알기로 헤이먼스 후작이 접대 책임자인 건 맞지만 그는 본래 제도에서 사절단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호른이 알기로 헤이먼스 후작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힐 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정말 접대 책임자로서 정성을 다하려 했다면 수하 중 적당한 자를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후작이 직접 국경 지대까지 오다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제가 알기로 각하는 공사다망하신 분인 걸로 아는데 이 먼 곳까지 직접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난 귀한 분이지요.”
뜬금없이 뭔 소린가? 제국에 몇 없는 후작이니 확실히 귀하긴 하지만 갑자기 그런 소리를 왜?
호른이 얼굴을 미미하게 찡그리자 헤이먼스 후작이 또 웃었다.
“귀한 분의 대접은 귀한 분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귀한 분이니 당연히 내가 와야지요. 왕국에서 귀한 분이 오셨는데.”
본래 귀족이라는 족속들은 오만한 법인데 제국의 귀족은 그 도가 지나쳐서 같은 귀족이라도 제국민이 아니라면 한 수 아래로 깔보는 성향이 있다.
후작에게 있어서 왕국의 귀족 따윈 그리 귀할 것도 없을 텐데 굳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참 의외였다.
게다가 헤이먼스 후작은 저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지 않나? 과연 귀족이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운 칼잡이가 이번 사절단의 책임자라는 걸 알게 되면 헤이먼스 후작은 대체 어떤 얼굴을 보일까.
호른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각하께서 하시는 일이니 감히 제가 헤아리지 못한 뜻이 있겠지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게 누구인지 모르는 척 헤이먼스 후작에게 넘기고 떠나면 이제부터 모든 책임은 그가 지게 되는 것이다.
호른은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했고 잠시 뒤에 마차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성문이 활짝 열렸다.
헤이먼스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제가 안내하지요.”
기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단의 접대 책임자로서 자기 일을 하려는 건 알겠지만 후작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국경까지 나온 건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쪽에선 아직 김창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헤이먼스 후작은 그걸 결례로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이어지는 가운데 헤이먼스 후작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혹여 이후의 일정에 대해선 들었습니까? 경만 괜찮다면 다음 일정에 대해 설명하려 하는데.”
“···국경 도시인 베이튼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그대로 제도까지 이동하는 일정이 아닙니까? 오직 황제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다닐 수 있다는 제왕의 길을 따라서 말입니다.”
“제왕의 길에 대해 아는군요. 그건 제도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며 또한 제국에서 가장 잘 정비된 길이기도 하지요. 이곳 베이튼에서 마차를 타고 제도까지 가는데 몇 주는 걸릴 테지만 제왕의 길을 따라 움직이면 그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제왕의 길에 대한 건 타국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라 기사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본래 외국에서 사절이 들어오면 그 길을 따라 제도까지 이동하는 게 보통이라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제왕의 길을 따라간다고 해도 제도까지는 일주일도 넘게 걸릴 겁니다. 시간은 금이라고 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금을 바닥에 뿌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가지요.”
“다른 방법이라 하시면?”
헤이먼스 후작이 따라오면 안다고 말하며 웃었다. 행렬이 그의 뒤를 따라 이동하는데 저 멀리 녹색 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런 빛이 자연적으로 나타날 일은 거의 없으므로 저건 분명 마법적 현상일 터였다.
행렬의 선두에서 후작과 움직이고 있던 기사가 두 눈을 몇 번 끔뻑이다 말했다.
“이건?”
“차원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마법사가 만들어낸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지요. 그래, 이름을 붙이자면··· 음, 차원관문 정도가 어떨까요?”
기사가 본 건 거대한 차원문이었다. 아니, 헤이먼스 후작의 말대로 그건 차원문이라기보다는 차원관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마치 성문을 하나 뚝 떼어온 것 같은 커다란 문은 차원문이 으레 그러하듯 공간을 일그러트린 채로 회전하고 있었다.
기사가 생각하기에 저만한 크기면 한 번에 부대 하나를 옮길 수 있을 듯했다. 그가 알기로 왕국의 영주 중 하나인 심민우가 저 정도 크기의 차원문을 만들 수 있긴 하지만 그건 제법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라고 했다.
원탁의 마법사조차 저걸 그리 오래 유지하진 못할 텐데 제국은 대체 뭔 수로 저걸?
기사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헤이먼스 후작을 보자 그가 부드럽게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마석이라고 알지요? 그 왜 마력을 담은 돌덩이 말입니다. 그걸로 차원관문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에 제국에서 시험 삼아 만들어본 것인데 제대로 상용화가 된다면 국경 지대의 방위력은 올리면서 국방에 대한 비용은 제법 줄일 수 있겠지요. 보통 때는 필요한 만큼의 병력만을 유지하고 있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그곳에 병력을 몰아줄 수 있을 테니까.”
마석은 상당히 귀한 광물인데 그걸 써서 차원관문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건 비단을 땔감 삼아 불을 지키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일인데.
기사가 당황하자 헤이먼스 후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봐라, 왕국의 기사 놈아. 우리 제국은 마석을 물 쓰듯 써버릴 만큼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우리를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이미 제국의 중요한 전력인 섭정왕을 잃었지만 제국은 여전히 강력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기사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헤이먼스 후작이 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 문을 하루에 여러 번 여닫을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안정성 문제가 있는 탓에. 이미 내가 한 번 문을 열었으니 다시 문이 열리는 건 내일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곧장 제도로 가지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인데다 원래부터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으므로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단이 오늘 머물 곳은 베이튼 영주궁이었다. 베이튼의 영주는 사절단과 함께 찾아온 헤이먼스 후작을 보고 잠깐 놀랐으나 곧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환영했다.
“저녁에는 조촐하게나마 연회를 마련했으니 다 함께 즐기도록 하지.”
베이튼 영주가 사절단을 위한 숙소를 내주자 각자 짐을 들고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를 타고 줄곧 조용히 있던 김창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왜 안 내리셨습니까?”
기사가 묻자 김창이 간단히 답했다.
“잤다.”
“······곧 연회가 시작됩니다.”
“그거 나도 참가해야 하냐고 물으면 눈으로 욕할 것 같으니 묻진 않으마. 그래서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고?”
“그게······.”
기사가 헤이먼스 후작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대해 설명하자 김창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양반, 제대로 이해하긴 한 건가? 기사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귀한 분을 뵙는군. 얼굴 한 번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웬 놈이야? 김창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헤이먼스 후작이 있었다. 그가 언제나처럼 빙긋 웃는 얼굴로 다가오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연회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요? 그 전에 잠깐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괜찮을는지?”
귀찮게 뭔 대화야. 김창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겉으론 덤덤한 척을 했다. 여기가 전장이라면 그냥 칼 꺼내면 그만이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은 전장이 아니며 자신은 병사가 아니었다.
한석구를 위해서라도 괜한 짓은 자제해야 했다. 김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헤이먼스 후작이 자기 방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연회장으로 가겠습니다.”
기사가 눈치껏 자리를 비키자 김창과 헤이먼스 후작은 장소를 이동했다. 대화는 헤이먼스 후작의 방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뭔 말을 하시려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렵니까? 나로서도 그게 더 낫긴 한데.”
헤이먼스 후작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김창 역시 그걸 알기에 말을 빙빙 돌리며 시간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할 말 있으면 하쇼. 나도 입장이 입장인지라 기분 나쁘게 했다고 칼부림하고 그러진 않을 테니.”
이게 사절단의 책임자가 할 말인가 하면 분명 아닐 터다. 헤이먼스 후작으로선 어이없을 만한 일이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혹 섭정왕 아슬란에 대해 아시는지?”
“그거야 알지. 혼자 왕국에 쳐들어왔다가 죽은 놈이잖나.”
“섭정왕은 승천할 자로서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듣기로 원탁의 이방인 역시 강하다지만 섭정왕의 상대는 안 됐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그게 뭐? 결국 섭정왕은 죽었잖아.”
“그래요, 죽었지요. 그것도 당신 손에.”
김창이 헤이먼스 후작을 쳐다봤다. 알고 있었나? 제국에서도 섭정왕 아슬란이 죽었다는 것만 알지 누가 죽였는지는 모를 텐데.
헤이먼스 후작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면 수많은 밀정을 부리지요. 그 밀정이 왕국에도 있을 뿐입니다.”
한석구가 알면 프락치 찾아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겠군.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서? 날 벌하기라도 하려고? 미리 말하지만 그건 정당방위였다. 너도 알지만 먼저 쳐들어온 건 제국이고 아슬란이야.”
“물론 나도 압니다. 그걸로 탓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네 목적은 뭐냐?”
“내 밀정에게 듣기로 당신은 원래 칼잡이고 돈만 주면 뭐든 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흐름인데. 김창이 미간을 좁히자 헤이먼스 후작이 말했다.
“그럼 내 하나 의뢰하지요.”
“무슨 의뢰?”
“사람 하나 죽여주면 됩니다. 제국에서 가장 존엄하며 존귀한 자, 만인지상의 존재, 황금 제국의 주인, 그러니까··· 황제 말입니다.”
김창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돈 주나?”
“물론.”
“이거 아슬란한테 사과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