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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65화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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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먼스 후작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돈 주면 뭐든 하는 칼잡이라더니 남들은 천금을 줘도 하지 않을 일을 간단히 수락했다.

김창은 승천할 자인 아슬란도 이길 만큼 강한 존재이니 황제를 죽이는 건 어린애 손목 비틀 듯 쉬운 일일 터다.

실제로 황제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니 참 그럴듯한 비유다.

“이 일은 제도에 가서 자세히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요. 그럼 지금은 연회를 즐겨주시길.”

헤이먼스 후작이 쿡쿡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김창은 그걸 맞잡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방을 나섰고 헤이먼스 후작이 그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혹여 이곳에선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으니 말조심하려는 것일까? 하기야 자신은 제국의 귀족이니 만약 이야기가 새어 나가더라도 사건을 무마할 만한 권력이 있지만 저쪽은 아닐 테니 입을 함부로 놀려선 안 되리라.

“이로써 제위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리라······.”

헤이먼스 후작은 벌써 황제가 죽은 것처럼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따스한 미소와는 정반대의 웃음이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투명하게 빛나는 그것은 수정구였는데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자 요사스러운 보라색 빛이 반짝이더니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수정구는 그저 보라색으로 반짝일 뿐이었고 저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비치지도 않았으나 헤이먼스 후작은 그를 직접 마주한 것처럼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헤이먼스입니다. 그 칼잡이와 접촉했습니다.”

“그러냐. 그가 뭐라고 하던?”

“과연 소문대로였습니다. 돈을 주겠다고 하니 황제를 죽여주겠다 하더군요. 자세한 사항은 제도에 가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그토록 쉽게 받아들였다고?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황제다. 그 어린놈을 죽이는 건 쉽지만 뒷감당이 어렵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아슬란을 죽인 김창의 실력이라면 황제를 암살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터다. 굳이 몰래 숨어들어 암살하는 게 아니라 정면에서 황제의 군대와 맞붙어도 그 목숨을 취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식으로 황제를 죽이고 나면 뒷감당이 어려워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왕국의 칼잡이가 황제를 죽인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무리 능력 없는 황제라고 해도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데 그런 자가 왕국의 칼잡이에게 죽는다면 제국 전역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전쟁이 일어날 텐데 저 칼잡이는 그것까지 생각한 것일까?

“그는 왕국의 사람이기 전에 원탁의 이방인입니다. 그놈들이 얼마나 방탕하며 오만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에겐 오늘의 황금이 내일의 목숨보다 중한 법일 테지요.”

헤이먼스 후작의 말은 신랄했지만 틀린 부분은 없었다. 원탁이 천지 모르고 날뛰는 놈들의 집단이라는 건 원탁 그 자신도 인정하는 일이니까.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놈이면 돈 때문에 아무나 죽이지 않고, 설령 죽이더라도 황제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덥석 받아들이진 않는다.

헤이먼스 후작이 보기에 김창은 위험천만한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마치 성난 폭풍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진짜 폭풍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돈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행은 언제지?”

“연회가 벌어지는 밤으로 하지요. 그땐 사람들이 많아 어수선할 테니.”

“천체의 배치가 일그러지고 있다. 자격 없는 자가 제위를 차지한 탓이지. 나는 제위의 적법한 주인으로서 천체의 일그러짐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 주인이시여, 제도에서 뵙겠습니다.”

헤이먼스 후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수정구에서 보라색 빛이 점차 옅어졌다. 후작은 그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 불온한 빛이 일렁였다.

* * *

“제도까지 가는 길에 행운만이 있기를!”

베이튼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난 다음 날. 베이튼 영주가 활달한 목소리로 사절단을 배웅했다.

원래라면 제왕의 길을 따라 길고 긴 여행을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차원관문의 존재 덕분에 그 기간을 단 몇 분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곳은 마법이 널리 알려진 세상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든 사람이 차원문을 경험해본 것은 아니기에 사절 중 일부는 차원관문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헤이먼스 후작이 제일 먼저 차원관문을 통과했다가 얼른 따라오라는 듯 손만 빠끔 내밀고 흔들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사절단의 선두가 차원관문을 통과해 제도로 이동했다. 행렬이 워낙 길고 인원이 많아 전부 통과하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제도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이 사절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그리 우호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얼마 전 왕국이 섭정왕 아슬란을 쓰러트리지 않았나? 그는 승천할 자인 동시에 제국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그런 자가 지금껏 깔보고 있던 왕국의 공격에 당해 죽었으니 제국 사람으로선 왕국 사절단의 방문이 썩 달갑진 않을 터다.

“도착하면 깨워라.”

사절단의 모두가 제국의 냉랭한 분위기에 긴장하고 있건만 이번 사절단의 책임자인 김창은 여유가 넘치다 못해 나태하기까지 했다.

또 마차 안에서 잠이나 자는 그를 보면 한숨이 나올 만도 하지만 기사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왕국 사람이라면 혼자서 전쟁을 끝내버린 저 칼잡이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원탁의 이방인은 하나 같이 괴물이지만 저 칼잡이는 그중에서도 격이 다르다는 걸 이번 내전을 통해 모두가 알게 되었다.

출처 모를 소문에 의하면 저 남자는 승천할 자이며 언젠가 승천하여 왕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물론 신이라는 신성한 존재치고 사람을 좀 많이 죽인 것 같긴 하지만 뭐 어떤가? 옛말에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고 천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 했으니 신이 될 자라면 만 명 정도는 죽여도 괜찮을 것이다.

“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절단은 대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여 황궁에 도착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웃으며 인사했는데 그것이 사절단이 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환대였다.

“제국 기사단의 단장인 에우스라고 합니다. 사절단 여러분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지요.”

중년의 기사는 부드럽게 웃더니 짝 박수 소리를 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며 하인들이 우르르 나와 사절단의 짐과 마차를 옮겨주었다.

줄곧 긴장 속에서 움직였던 사절단은 이제야 작게나마 웃으며 제국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에우스 경, 고생이 많습니다.”

“각하, 별말씀을요. 이게 제 일이니 어찌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헤이먼스 후작과 에우스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마차에서 내린 김창은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숙소는 어디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그를 보고서 얼굴을 찡그릴 법도 하건만 에우스는 작은 구김조차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을 텐데 너무 오래 세워뒀군요.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당장 숙소로 갈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다음 일정은 존엄자를 알현하는 것이니까요. 바로 가셔야 합니다.”

존엄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딴 거창한 이름을 쓸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김창은 아마 황제를 만나러 가겠지 하고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지요. 존엄자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창과 사절단의 일부가 황제에게 진상할 선물을 들고 에우스를 따라 움직였다. 황금 제국이라는 이름답게 황궁 안의 곳곳은 금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햇빛이 반사될 때마다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김창이 얼굴을 찡그린 채로 긴 회랑을 걸어 알현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곧바로 들어가진 않았는데 에우스가 김창에게 허리에 찬 칼을 넘겨줄 걸 요구했기 때문이다.

“아시겠지만 알현실 안에선 그 누구도 무기를 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고 무기를 넘겨주시지요.”

김창은 별 고민 없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 없다고 사람 못 죽이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것 때문에 시끄럽게 굴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가 칼 두 자루를 넘기자 에우스와 함께 움직이던 병사가 그걸 받아들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알현실에 들어갈 테니 몸가짐을 단정히 해주시지요.”

참 귀찮게 하는군. 김창이 대충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척을 하자 에우스가 자세를 바로 하고 굳게 닫힌 문 너머를 향해 크게 외쳤다.

“아룁니다! 김창 경 듭니다!”

김창 경? 그건 또 누구란 말인가? 김창이 순간 뒤쪽의 기사를 쳐다보자 그는 왜 날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김창 경이라는 사람은 본인인 것 같은데 내가 언제 기사가 됐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저 짐작하기로는 한석구가 사절단 책임자로서 아무나 보낼 수는 없으니 말도 없이 작위를 내렸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전에 정복자 경이라는 말 듣고 웃었는데 이젠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김창 경이라는 말은 참 우습다. 김창이 우울한 얼굴로 아슬란을 따라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나는 제국의 존엄자로서 여러분을 친구로서 대할 것을 약속하지요.”

목소리는 가늘다 못해 불안한 듯 떨렸다. 슬쩍 옥좌를 쳐다보니 거기엔 가녀린 체구의 아이가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생김새를 보니 확실히 아슬란의 조카가 맞는 듯했는데 분위기는 영 달랐다.

아슬란은 항상 자신만만했지만 황제는 불안감에 젖어있어 목소리는 물론이고 시선까지 떨렸다.

원래라면 부모에게 응석이나 부리고 있어야 할 어린애가 혼자서 저 큰 의자 위를 지키고 있어야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황제를 지켜줄 섭정왕조차 죽지 않았나? 본래 저만한 나이대의 꼬마는 부모 하나만 죽어도 세상을 잃은 듯한 느낌일 텐데 황제는 부모는 물론이요, 외숙부까지 죽었으니 그 심정이 어떨 것인지 짐작할 만하다.

김창이 쯧즛 하고 혀를 차는데 누군가 크게 외쳤다.

“무엄하다! 어찌 감히 제국의 존엄자를 똑바로 보고 있는가? 고개를 조아려라!”

누가 이리 시끄럽게 떠드나 했더니 웬 노인네였다. 사극에 자주 나오는 고지식하고 목청 큰 노인의 모습이라 김창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또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엄하다!”

목청 크고 성격 괄괄하니 오래 살겠군. 김창이 노인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헤이먼스 후작을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무슨 말을 하나 봤더니 얼른 머리를 숙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마저 무시하고 여전히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웬 눈매 더러운 놈이 자꾸 자기를 쳐다보고 있으니 겁이라도 먹은 듯 시선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 모습을 보며 김창이 말했다.

“할 말 있다.”

“무엄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 멋대로 지껄여?”

저 노인네는 무엄하다는 말 외에는 할 줄 모르나? 김창이 또 무시하고 말했다.

“이 안에 황제를 죽이려는 놈이 있다.”

뜬금없는 발언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중 헤이먼스 후작은 눈이 빠져나올 듯 심하게 놀랐는데 말문이 막혔는지 입만 벙긋거리는 게 보였다.

“뭐라? 그게 누구냐!”

여전히 목청 큰 노인이 소리치자 김창이 당당히 대답했다.

“나다.”

저 미친놈, 암살이 뭔지 모르나? 헤이먼스 후작은 당황하다 못해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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