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그, 그게 무슨? 왕국의 사절단인 네가 실은 황제 암살자라는 말이냐?”
지금껏 괄괄하게 소리치던 노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사실 김창이 내뱉은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 암살자가 알현실까지 당당히 들어온 것도 놀라운데, 실은 그 정체가 왕국의 사절단 책임자라니?
게다가 더 놀라운 건 황제를 암살하러 온 놈이 실은 자신이 범인이었노라 하고 당당히 밝혔다는 것이다.
김창이 왜 황제를 암살하러 왔는지는 둘째 치고, 애초에 그 사실을 밝힐 이유가 어디에 있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왕국의 기사들만이 침착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제국 사람들은 기사들 역시 한통속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전하의 밀령인가?”
“음, 그분의 성정이라면 있을 법한 일이야.”
“하긴······. 전하께서는 원탁 출신이니.”
원탁의 이방인들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를 태연하게 저지르곤 하는데 한석구가 바로 그 이방인들의 수장이라는 걸 생각하면 갑작스레 황제를 암살하려 든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먼저 왕국을 공격했던 것은 제국이 아닌가? 자기 사람은 끔찍하게 챙기는 한석구 성격상 아슬란의 습격으로 황금성이 쓰러진 걸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으리라.
“사절단 책임자로 왜 정복자 경이 아니라 김창 님을 보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제야 알겠군.”
“사람 죽이는 일이라면 김창 님이 왕국 제일이니 말이야.”
“아마 제국 기사단이 전부 달려들어도 김창 님의 상대는 안 되겠지.”
그들은 김창이 왕국 내전에서 어떤 활약을 보였는지 알고 있으며 또 벼락의 화신으로 변해 전장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승천할 자인 아슬란은 물론이요, 그 무시무시한 용 바르토시스까지 혼자서 죽이지 않았나?
그만한 수준의 강자라면 굳이 비겁하게 어둠 속에 숨어 황제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당당하게 면전까지 나아가서 칼을 휘두르기만 하면 될 일이니까.
혼자서 승천할 자와 용을 죽이고 벼락까지 부리는 남자를 대체 누가 뭔 수로 막을 것인가?
왕국의 기사들은 이제 황제가 죽은 목숨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제국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김창의 싸움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으니까.
“이 더러운 왕국 놈! 감히 겁도 없이 그런 망발을 지껄여? 오냐, 내 직접 널 죽여주마!”
처음에는 당황하고 있던 노인이 정신을 차리고서 강대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냥 목소리만 큰 노인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강해 보여서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아마 저 노인은 제국 안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의 마법사가 아닐까. 보통 때라면 신성을 얻을 기회라며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싸움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보쇼.”
“이보쇼? 사절단의 책임자라는 놈이 뭔 시정잡배나 쓸 법한 말투를······. 왕국도 이제 갈 데까지 갔구나!”
사절단의 책임자는 원래 귀족이 맡는다는 걸 생각하면 김창은 확실히 잘못된 인선이었다. 그는 귀족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김창은 노인이 왕국의 욕을 하고 있는 걸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그 나이 먹고도 제법 강한 모양인데 그래서 아슬란보다 강하신가?”
“아슬란? 섭정왕 말인가? 그건 왜······.”
노인이 얼른 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아슬란보다 강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아슬란을 죽인 게 나다. 그러니까 괜히 덤볐다가 목숨 버리지 말고 얌전히 있으쇼.”
“뭐, 뭐······?”
노인은 김창의 건방진 말투, 그리고 생각지 못한 충격적인 사실에 당황했다. 그가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걸 본 김창이 고개를 돌려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의 얼굴은 지병 때문에 원래 창백했는데 지금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창백해져 있었다. 저러다 아주 투명하게 변해 안쪽이 비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황제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야 뻔했다. 부모가 모두 죽고 하나 남은 가족인 아슬란을 죽인 범인이 여기 나와 있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 해도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내 한 가지 알려주지. 나한테 황제를 죽이라고 시킨 건 왕국이 아니야.”
그 말에 노인이 반응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왕국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린단 말이야?”
“꼭 왕국이 아니더라도 황제를 죽이려는 놈들은 많을 테지. 아마 이 제국 내에서도.”
노인은 얼른 반박하지 못했다. 그 말대로 제국 내의 모두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황제는 권위가 없다. 너무 어리고 병약하며 황제에 걸맞은 위엄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그가 제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섭정왕 아슬란 존재 덕분이었다.
그럼 섭정왕이 죽은 지금은?
불온한 마음을 먹은 자들이 단 하나도 없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확실히······. 그럼 네게 명령한 자가 누구냐?”
노인의 말을 듣고서 헤이먼스 후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으로 목이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김창이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황제 암살에 대한 이야기는 제도에 가서 하자고 했는데 왜 멋대로 행동한단 말인가?
그리고 멋대로 행동할 거면 황제를 죽이기라도 할 것이지, 대체 왜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것이고?
이대로면 위험하다. 헤이먼스 후작이 김창의 입을 막기 위해 한 걸음 나설 때였다.
“누구냐고? 헤이먼스 후작이라는 양반이던데.”
헤이먼스 후작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어째야 할까? 변명해야 하나? 아니면 이게 뭔 헛소리냐고 화를 내야 하나? 어느 것도 소용없으리란 걸 알고 있다. 자신이 황제에게 그리 순종적이지 않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헤이먼스 후작이 주머니 속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가 결심한 듯 한숨과 함께 말했다.
“김창, 난 대체 당신이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뭘 원하는 겁니까? 내가 당황하길 바라서 이러는 겁니까? 그저 재밌자고 하는 일인가요? 왜 약속한 적도 없는 일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약속? 헤이먼스 후작! 그럼 저 남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겐가!”
노인이 크게 외치자 헤이먼스 후작이 싸늘한 웃음을 날렸다.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아우스트 공,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 어린 황제가 제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황제 암살을 사주했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나는 제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쾅! 헤이먼스 후작이 성난 듯 크게 발을 굴렀다.
“지금 제국의 꼴을 봐라! 아슬란 그 미치광이가 자격도 없는 자를 황제로 만든 탓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놈은 제국의 안위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저 죽은 누이의 망령에 씌어있을 뿐이지! 제위는 마땅한 자에게 돌아가야 해!”
한바탕 말을 쏘아 뱉어낸 헤이먼스 후작이 김창을 향해 말했다.
“김창, 지금 당장 약속을 이해해! 황제를 죽이란 말이다! 칼이 없다고 해도 황제 정도야 두 손으로 찢어죽일 수 있지 않나!”
김창은 헤이먼스 후작을 가만히 보다가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힉 소리를 내는 게 보였다.
“황제를 죽이라고? 내가 왜.”
“왜, 왜? 그러기로 약속했잖나······.”
“난 단 한 번도 황제를 죽이겠다고 한 적 없는데.”
“뭐?”
김창이 픽 웃더니 말했다.
“내가 언제 황제를 죽이겠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있나? 그냥 네 지레짐작일 뿐이잖아.”
헤이먼스 후작이 눈알을 데구르르 한 바퀴 굴렸다. 생각해보니 김창이 황제를 죽이겠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다.
그냥 의뢰를 받아들이니 분위기였을 뿐이지. 하지만 그 상황에서 대체 누가 그걸 거절했다고 생각하겠는가?
헤이먼스 후작이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그래서··· 안 죽이겠다고?”
“혹시 우주 가봤나?”
“우주?”
헤이먼스 후작이 그게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게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우주가 뭔지 모른다.
그들은 멀고 먼 하늘의 저 위까지 올라가면 거기에 승천자들이 머무는 천상의 궁전이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난 가봤다. 거기 왜 갔느냐면 저 어린 친구 목숨을 살려주려고 그랬던 거고.”
김창이 손가락으로 황제를 가리키자 헤이먼스 후작이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뭔 개소리······.”
“난 말이야, 어른이면 자기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슬란을 죽인 탓에 저 친구가 천애고아가 됐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어른으로서 그 책임을 지려는 것뿐이다.”
헤이먼스 후작은 이제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알기로 저 칼잡이는 돈만 주면 누구든 죽여주는 개백정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왔다.
그가 죽인 사람들 중에는 누군가의 부모도 있을 텐데 그럼 그는 그들 모두를 책임졌나? 그럴 리가.
“헛소리도 그만하면 걸작이군. 내가 잘은 몰라도 네가 만든 고아가 수십은 될 텐데 그들까지 다 챙겨줬나? 그들에 대한 책임까지 다 졌냐고.”
“고아 말고 과부도 많이 만들었을 것 같은데, 어쨌건 걔네 책임진 적은 없다.”
“그럼 이번엔 왜 그러는 거지? 설마 목숨의 무게가 다르다고 말하려는 거냐?”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걔네가 자식이 있는지 아내가 있는지 나도 모르는데 왜 책임을 져? 아슬란 그 씹새가 죽기 전에 구질구질한 사연 팔이만 안 했어도 나도 이러지 않았어.”
몰랐으면 책임이 없고 알았으면 책임이 생기는 건가? 참으로 편리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헤이먼스 후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다가 곧 얼굴을 굳혔다.
“···네가 황제를 죽이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하겠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칼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는 것 같이 생긴 양반이 뭔 수로 황제를 죽이려고? 지금 여기서 김창이 나서지 않더라도 저 마법사가 알아서 처리할 것 같은데.
김창의 생각대로 아우스트 공이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내며 헤이먼스 후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가 마법을 날려 헤이먼스 후작을 무력화시키려는 순간이었다.
“하라고 하면 못할 줄 알고!”
쾅!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사악한 힘과 함께 아우스트 공의 몸이 날아갔다. 그는 강력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육신은 이미 노쇠했기에 불의의 일격에 당해 얼른 일어나지 못했다.
아우스트 공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가운데 헤이먼스 후작의 몸에서 흘러나온 사악한 힘이 주변의 근위대를 빠르게 공격해 쓰러트렸다.
“이, 이게 뭔?”
왕국의 기사들이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칼자루가 잡히지 않았다. 알현실에는 무기를 들고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술을 깨물면서 황제와 헤이먼스 후작을 번갈아 쳐다봤다. 뭔가 위급한 상황이긴 한데 황제를 위해서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하나?
우린 제국의 기사도 아니고 사절단으로 온 손님일 뿐인데······.
“이봐! 김창이라고 했나? 이봐!”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아우스트 공의 것이었다. 김창이 그를 쳐다보자 아우스트 공이 말했다.
“후작을 막아! 제발!”
“내가?”
“그래! 제발 저 미치광이를 막아주게!”
김창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돈 주나?”
“이 미친놈! 돈으로 사람 때려죽일 수 있을 만큼 줄 테니까 가서 막아!”
“헤이먼스 후작, 이 씹새. 감히 황제를 죽이려 해? 넌 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