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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69화 (16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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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눈을 뜨니 모르는 천장이었다.

“앗, 눈을 뜨셨어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화사한 금발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 보는 여자였다.

김창은 여기가 어딘지, 저 여자는 누군데 날 간호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자신은 케이네스의 술수에 당해 다른 세상으로 추방됐다. 그러면 여긴 지구인가? 그런데 웬 금발의 여자가?

‘하기야 지금은 글로벌 시대니까 금발의 외국인이 있다고 해서 별로 놀라울 것도 없을지도······.’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람을 불러올 테니.”

여자가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 하자 김창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머······.”

“잠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여기 지구 맞나?”

“지구요?”

여자가 그게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곳에서 오셨나요?”

“뭐?”

“어······.”

김창과 여자는 서로를 보며 대체 뭔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뭔가 말소리가 들려 와봤더니.”

문을 열고 나온 건 덥수룩한 회색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마법사 같은 모습에 김창이 미간을 찡그렸다.

“댁은 또 누구쇼? 요즘 한국에 외국인이 뭐 이리 많아?”

“아직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그럴 만도 하지. 소환 의식에 이끌려 갑작스럽게 이 세상에 오게 됐으니. 소개하지, 나는 바스알의 대마법사 세롬이라고 하네.”

김창의 가방끈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래도 지구에 바스알이라는 곳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케이네스 이 멍청한 놈, 추방하려면 지구로 보낼 것이지 또 이상한 곳으로 보내버렸군.

“그래, 대마법사 양반. 지금 이게 뭔 상황인지 자세히 좀 설명해주면 고맙겠는데.”

“안 그래도 그럴 셈이었네. 우리 바스알은 대륙 서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일세. 옛적부터 타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지만 항상 슬기롭게 이겨냈지. 우리는 그 어떠한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자주성을 지키며 자유의 깃발 아래······.”

“그만. 누가 역사 수업하래? 간단하게 설명해.”

“······어느 날 갑자기 마왕이 나타났다네. 그는 강력한 군세를 이끌고 대륙의 국가들을 하나둘씩 무너트렸고 눈 깜짝할 새에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켰지. 모두가 격렬히 저항하고 있지만 잃어버린 땅을 탈환하기는커녕 전선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상황일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설정인데. 김창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서.”

“이대로면 결국 모두 죽게 될 걸세. 그래서 우리는 부끄럽게도 다른 세상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네.”

“다른 세상?”

“대륙에 크나큰 위기가 닥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세. 먼 옛날의 기록에 따르면 사악한 용이 대륙을 공격했을 때 다른 세상의 이방인이 나타나 악을 무찔렀다고 하더군. 소위 말하는 용사 말일세.”

너무나도 틀에 박힌 듯한 설정이라 김창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용사라고? 댁이 날 불러냈고?”

“그래. 자네를 불러낼 수 있었던 건 우리로서 행운일세. 자네는 마치 우리가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차원 속을 떠돌고 있더군.”

이런 씹. 왜 지구가 아니라 이런 곳에 떨어졌나 했더니 이 마법사가 자신을 중간에 가로챈 탓인 듯했다.

김창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세롬을 노려봤지만 그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김창.”

“김창? 이름 참 특이하군.”

내 이름이 뭐 어때서? 김창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래서 김창, 내 염치없는 소리인 건 알지만 고개 숙여 부탁함세.”

세롬이 정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세상을 구해주게. 용사로서, 자네의 의무를 다해주게. 마왕을 무찌르고 이 땅에 자유와 정의가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게.”

자신의 할아버지뻘은 될 듯한 마법사가 고개를 숙여 진심 어린 부탁을 하고 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아무리 냉혈한 사람이라도 이런 부탁을 거절하긴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김창에게 그 부탁을 들어줄 만한 힘이 있지 않나?

이 땅에 끌려온 게 게임이나 하던 백수 김창이었다면 몰라도 여기 온 건 반신 김창이니까.

‘생각해보면 꼭 원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나······.’

케이네스에게 당한 건 화가 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크게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곳에서 승천까지 한 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었으나 정말 신이 되길 바랐던 건 아니다. 오히려 신이 되어 모든 게 다 끝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케이네스는 그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주지 않았나?

게임으로 치면 엔딩까지 한 걸음만을 남겨두고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게 된 셈 아닌가?

당장 김창이 그 세상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자신이 대악마며 용, 승천할 자를 죄 죽이고 다닌 탓에 원탁을 위협할 만한 적은 하나도 없게 됐으니 이제 그 누가 감히 왕국을 건드리겠는가?

케이네스는 승천자가 되어서 기쁘고 자신은 새로운 모험을 하게 되어 기쁘다. 따지고 보면 서로에게 득 될 만한 일이다.

잠깐 생각하던 김창이 입을 열었다.

“그 마왕이라는 놈, 강한가?”

“강하지. 그래서 내 몹시 미안하게 생각하네. 대마법사라는 자가 마왕조차 상대하지 못해 다른 세상의 사람에게 손을 빌리고 있으니.”

대마법사도 이기지 못할 존재라면 마왕은 확실히 강하리라. 어쩌면 대악마 이상일지도 모른다.

김창은 다시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고양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기꺼이.”

“고맙네. 정말 고맙네.”

세롬이 연신 감사의 말을 전하자 줄곧 가만히 있던 여자 역시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감사드려요, 용사님! 덕분에 이 땅에 진정한 빛이 돌아오겠군요!”

“그런데 넌 누구냐.”

“······전 바스알의 공주인 엘리아나라고 해요. 국왕 전하께서 쓰러진 이후로 공주로서 국정을 이끌어나가고 있지요.”

“공주 양반이었군. 그럼 이제부터 뭘 하면 되나?”

“의욕이 넘치시는군요! 그럼 잠깐 지하로 내려갈까요?”

“지하?”

엘리아나가 손을 흔들며 다급히 대답했다.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지하엔 저희 바스알의 보물인 신검이 꽂혀 있답니다. 그걸 뽑은 자는 용사로서 진정한 힘을 얻게 되지요.”

김창은 문득 허리춤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생각해보니 두 자루의 칼 모두 저쪽 세상에 두고 왔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검이라는 말을 들으니 흥미가 동했다.

“그럼 가지.”

“네, 세롬 님도 같이 가실 거죠?”

“그러지. 자, 다 같이 내려가도록 함세.”

세 사람은 신검이 꽂혀 있다는 지하로 내려갔다. 거기까지 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김창은 이 세상이 원래 있던 곳과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중세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는 원래 어느 곳이든 다 비슷비슷한 법 아닌가. 이게 게임이었다면 성의 없는 배경 설정이라고 욕 좀 먹었을 테지만 원래 익숙한 맛이 제일 맛있는 법이다.

김창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하 입구에 도착했다.

“내려가지. 길이 어두우니 다들 조심하고.”

세롬이 선두에 서서 지하로 내려갔다. 엘리아나와 김창이 뒤를 따르는데 세롬이 마법으로 불꽃을 일으켰다.

그래도 여전히 통로는 어두워서 조심하지 않으면 발이 걸려 넘어질 듯했다.

“김창, 다시 한번 자네의 결정에 감사하지. 이번에 뭔가 느낌이 좋아. 자네라면 분명 신검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그럼 더는 이 짓거리도 안 해도 될 테고······.”

세롬의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 작았다. 그러나 반신이 되면서 감각이 확장된 김창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뭔가 속뜻이 있는 듯한 말이었지만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창이 세롬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뭔가 악취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하 특유의 냄새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김창은 달랐다. 그는 이 냄새에 익숙했다.

‘시체 냄새.’

지하에서 시체 한두 구쯤 썩어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여긴 다른 곳도 아니고 신검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던가?

바스알의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시체를 방치하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창은 조용히 세롬의 뒤를 따르다가 문득 물었다.

“하나 물을 게 있는데.”

“음, 뭔가?”

“만약 내가 그 신검이라는 걸 못 뽑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물음에 순간 정적이 발생했다. 세롬은 물론이고 엘리아나까지 무서울 정도로 침묵했다가 금세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 자네는 용사인데. 그건 용사만이 뽑을 수 있는 검이고 자네는 용사이니 당연히 뽑을 수 있겠지.”

“하나 말해주지. 나는 지구 출신이고 거기엔 마법도 없고 괴물도 없어. 뭔 소린지 알겠나? 거기서 불러오는 사람 중 대부분은 싸울 줄 모르는 일반인이야. 그런데 그놈들이 진짜 용사라고 믿는 건 좀 우습지 않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세롬이 입을 다물었다. 김창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이건 내 생각이다만, 너흰 분명 내가 처음으로 부른 용사가 아닐 거야. 이전에도 용사랍시고 여러 사람을 불러들였겠지. 그런데 나를 또 부른 건 아직 신검을 뽑은 자가 없다는 소리겠고. 그럼 그 사람들은 어찌 됐나?”

또다시 침묵. 김창은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오는 걸 느꼈다. 보이지 않아도 안다. 그는 수많은 사선을 넘어 왔으니까.

후우 하고 이어지는 한숨은 엘리아나의 것이었다. 그녀가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똑똑하시군요, 용사님. 그래요, 우리는 당신 이전에도 여러 용사를 불러들였어요.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신검을 뽑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됐냐고요? 우린 그들에게 사과하고 전부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냈어요.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했으니. 그 사람들에겐 죄가 없으니 어찌 원망하겠어요. 우리는 그저 또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할 뿐······.”

김창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엘리아나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사님, 우리를 걱정하진 마세요. 만약 당신이 신검을 뽑지 못하더라도 우린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또 원래 세상으로 책임지고 돌려 보내드릴게요. 그러니 편하게 시도해주세요.”

“그러지.”

“감사해요, 용사님! 그럼 계속 가실까요?”

세 사람은 신검이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고 그 위로 새하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신성해 보이는 모습이라 김창조차 호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 그럼 용사님. 어서······.”

엘리아나가 손짓하자 김창은 신검 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칼자루를 쥐는 순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칼자루를 잡고 뽑으려 하자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이건 안 뽑히는 게 아니라 마치 뽑히지 않으려는 듯한······.

“김창?”

세롬이 미간을 좁힌 채로 물었다.

“어떤가?”

“글쎄, 안 뽑히는데.”

김창은 여전히 손아귀에서 덜덜 떨고 있는 칼자루를 쳐다봤다. 대답을 들은 세롬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가, 또 실패인가.”

“세롬.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요? 정말 지긋지긋하군요.”

날카로운 목소리는 엘리아나의 것이었다. 그녀는 아까의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공주. 그럼······.”

세롬의 손이 빛나고 있었다. 마력이 모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걸 본 김창이 손을 휘둘러 불꽃을 날렸다.

“끄아아악!”

뭔가 하려던 세롬은 손에 붙은 불을 보고서 다급히 흔들어 껐다. 아무래도 마법사라 일격에 죽지는 않았다.

세롬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외쳤다.

“뭔 짓거리인가!”

“뭔 짓거리긴? 당하기 전에 치는 거지. 지구에서 온 놈들 전부 돌려보냈다는 거 거짓말이잖아. 지하에서 시체 냄새가 진동을 하더군. 분명 죄 죽인 거겠지.”

“아니, 잠깐······.”

“잠깐은 지랄.”

세롬이 뭔가를 외치기도 전에 김창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반신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는 없었다.

“너희가 죽인 만큼 죗값을 치러야겠지. 혀 안 깨물게 조심해라.”

김창이 주먹을 꽉 쥐고서 바닥에 쓰러진 세롬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갈 때였다.

우우웅!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웬 차원문 비슷한 게 생겨났다. 그 너머에선 높다란 빌딩이며 바쁘게 달리는 자동차 따위가 보였다.

저거 혹시 지구의 모습인가? 김창이 세롬을 쳐다보자 그가 피거품을 문 채로 입을 우물거렸다.

“아니, 진짜로 돌려보냈는데 왜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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