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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71화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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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나오라고 했는데, 아무도 없나?”

김창은 손을 가볍게 털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까지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며 성을 공격하고 있던 마왕군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저 시끄러운 놈들이 이토록 조용해질 수 있다는 걸 성벽 위의 병사들은 오늘 처음 알았을 것이다.

“그럼 내가 가지.”

김창이 뚜벅뚜벅 다가오자 마왕군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괴물이 단 한 명에게 겁을 먹고 도망치는 모습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꿈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꽈르릉 하고 귀를 때리는 굉음을 듣는 순간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분명히 인지했다.

창백한 빛이 마왕군 한가운데 떨어지더니 곳곳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머리 바로 위로 떨어진 벼락을 맞은 괴물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졌고 그 주변에 있던 놈들도 몸에 불이 붙거나 신체 일부가 훼손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성벽 위에서 눈대중으로 대충 봐도 방금 그 일격으로 수백의 목숨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김창의 싸움을 지켜보던 엘리아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마왕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괴물 놈들은 강철처럼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어 칼로 찔러도 꿈쩍하지 않는 데다 바위도 부술 만한 괴력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맨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었다.

저 괴물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선 병사 열 명이 붙어야 겨우 상대가 되는데 김창은 혼자서 수백 마리를 쓸어버렸다.

그건 대마법사라 불리는 세롬도 쉽사리 해내지 못할 공적인데 저 남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 너무나도 간단히 괴물들을 학살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내보내 김창에게 가세해야 할 상황이지만 엘리아나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또 한 번 울리는 우렛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병사들에게 성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안 됩니다, 공주님.”

명령을 거부한 건 수비대장 역할을 맡고 있는 기사였다. 그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한번 말했다.

“지금 성문을 열어선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병사들을 저 위험한 곳으로 내몰 수는 없습니다.”

엘리아나가 잠깐 멍해졌다가 곧 얼굴을 구겼다. 새하얀 얼굴에는 기사를 향한 짙은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요? 병사들의 목숨이 소중하니 용사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우린 뒤에서 가만히 있자는 건가요? 그게 기사로서 할 말인지 모르겠군요.”

“저한테 어떤 비난을 하시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 명령만을 들을 수 없군요, 공주님.”

“어째서죠? 지금까지 그토록 열심히 마왕군과 맞서 싸웠던 당신이 왜 갑자기 겁쟁이가 된 건지 모르겠군요.”

엘리아나의 노골적인 힐난에 기사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답했다.

“공주님, 지금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바깥으로 내보내면 저 용사인지 뭔지 하는 놈이 휘두르는 번개와 불꽃에 죄 쓸려나갈 게 뻔한데 그런 짓을 왜 합니까? 죽어도 적과 싸우다 죽어야지, 용사가 휘두른 공격에 맞고 죽으면 그게 뭔 개죽음입니까?”

엘리아나가 고개를 돌려 전장을 내려다봤다. 거기엔 김창이 벼락과 불꽃을 휘두르며 마왕군을 학살하고 있었는데 그건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멸망의 날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지휘관이 제정신이라면 저런 곳에 자기 병사들을 내보내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 불꽃이 날아다니고 벼락이 떨어지는 곳을 전장으로 삼는 지휘관이 어디 있겠나?

“······확실히.”

엘리아나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기사에게 명령했다.

“그럼 활이라도 쏴서 지원하세요. 그 정도는 상관없겠지요?”

“물론 그럴 겁니다. 그런데 공주님.”

“또 뭔가요?”

기사가 김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저 남자 대체 정체가 뭡니까? 신검을 뽑은 것도 아닌데 어찌 저만한 무용을?”

엘리아나도 김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마왕군도 이젠 끝장을 볼 생각으로 대군을 이끌고 왔을 텐데 그 숫자가 이젠 절반까지 줄어 있었다.

성의 병사들이 전멸을 각오로 결사 항전을 해도 저만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김창은 단 혼자서 해냈다.

저토록 강한 자가 세상을 구할 용사가 아니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용사의 자격인 신검을 뽑지 못하긴 했으나······.

“용사······.”

엘리아나는 맨손으로 괴물의 다리를 부러트리고 목을 뽑아버리는 김창을 보고서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온몸에 피를 덕지덕지 바른 채로 다음 적을 찾아 떠돌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비슷한 거요.”

차마 용사라고 말하진 못했다.

* * *

마왕성은 대륙 중앙에 있다. 그곳은 본래 말리온이라 불리던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으나 지금은 마왕의 손에 무너져 악의 소굴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다.

한때 황궁이었으나 지금은 마왕성으로 변해버린 거대한 궁전에는 수많은 군세가 도사리고 있고 그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독기가 주변 땅을 시시각각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이대로 몇 년만 지난다면 제국의 영토는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할 것이고 땅속에 묻혀 있던 시체들은 마왕의 독기에 반응해 차가운 몸을 일으킬 것이다.

아직 대륙 곳곳에는 마왕의 침공에 저항하는 잔당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

순식간에 대륙을 절반 넘게 집어삼킨 마왕군이 더는 급하게 진군하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단지 그럴 필요가 없어서일 뿐, 저항군의 반격이 거세기 때문은 아니다.

그 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던가? 아무리 하찮은 것도 너무 깔보면 발끈한다는 소리인데 실제로 지렁이가 꿈틀거려봤자 뭐가 무섭겠는가?

오히려 지렁이가 꿈틀거리면 그 반응이 재밌어서 더 괴롭히게 되는 법이다. 지금 마왕군 역시 그랬다.

저항군을 적당히 괴롭히다 보면 살기 위해서 온갖 발악을 다 하는데 그 모습이 참 재밌어서 일부러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군세만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면 저항군은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오늘도 살아남았구나 하며 저들끼리 청승을 떠는데 그 모습이 참 우습다.

이만큼 재밌는 장난감을 쉽게 내칠 수야 없다.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다 버려야 아깝지 않은 법이다.

듣자 하니 바스알의 공주는 웬 전설에 매달려 용사를 소환하고 있다는데 그게 성공할 리도 없으니 좀 더 가지고 놀아도 될 터다······.

“다들 일찍 돌아왔군. 재미는 충분히 봤나?”

마왕성의 대회의실. 그곳엔 사악한 마법을 다루는 리치와 암살의 대가인 흑요정, 그리고 새까만 날개를 가진 악마가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마왕군 사천왕.

강력한 힘으로 대륙을 위험에 빠트리고 이제는 저항군을 가지고 놀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악독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취미는 저항군을 공격하여 그들의 발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일부러 저항군이 다음 공격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주고 어느 정도 방비가 된 것 같으면 공격을 시작해 모든 것을 앗아간다.

참으로 끔찍한 취미지만 마왕군 사천왕답게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세상에 개미를 밟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없듯이 그들 역시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도 죄의식 없이 즐거워할 뿐이다.

그들은 때때로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의 공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누가 더 잔혹한 방법으로 인간들을 괴롭혔는지 겨루는 걸 즐긴다.

오늘 대회의실에 모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존재로서 일반적인 행위로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정신적 만족감을 느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사천왕 중 셋.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대개 네 명이 한자리에 전부 모이기 때문에 빈자리가 생긴 것을 보고서 흑요정이 의아함을 느꼈다.

“브리온은 어디에 있지? 그 녀석이 약속에 늦을 리가 없는데.”

대륙의 수많은 기사를 학살했던 흑기사 브리온은 마왕군 사천왕 중 하나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역시 사천왕으로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즐거워하는 음습한 취미가 있다.

참으로 기사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뒤틀린 존재로서 그런 일이 아니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흠, 내 듣기로 얼마 전 바스알로 군세를 이끌고 출정했다던데.”

리치의 대답에 악마가 말했다.

“그거 벌써 며칠 전의 일 아닌가? 원래라면 벌써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바스알 침공에 질려버렸는지 이번엔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 정말 끝장을 내고 올 생각이라면 시간이 제법 걸리긴 하겠지.”

“바스알이라면 이미 몇 번이고 공격해서 병력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해충 구제를 해본 적이 있나? 그놈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알을 까고 잠깐만 눈을 돌리면 금세 수가 불어나서 귀찮게 굴지. 인간들 역시 똑같아. 완전히 끝장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꼼꼼하게 하나씩 전부 찾아 죽여야 한다.”

“흠,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악마가 미간을 좁히고 있을 때 흑요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때? 브리온 성격 잘 알잖아? 워낙 말수가 적고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를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 일은 언제나 완벽하게 끝냈어. 이번에도 그럴 테지. 곧 돌아올 테니 일단 우리끼리 이야기나······.”

쾅!

굳게 닫혀 있던 대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괴물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이성이 없는 다른 괴물들과 다르게 말을 할 줄 아는 지휘관급 괴물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멋대로 들어오는 게야?”

리치는 살이 전부 썩어 문드러져 얼굴을 찡그릴 수 없지만 만약 그에게 살가죽이 있었다면 분명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으리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급한 일이라······.”

괴물답지 않게 또렷한 발음이었다. 리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급한 일? 브리온 그놈이 반역이라도 일으킨 게냐? 그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면 겁도 없이 대회의실 안에 들어온 네 목을 칠 것이다.”

리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괴물은 겁을 먹었으나 물러서진 않았다. 그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브, 브리온 경이······.”

“브리온이 왜? 정말 반역이라도 일으켰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바스알 침공 중에 전사하셨습니다······.”

순간 좌중이 침묵에 빠졌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라 흑요정이며 악마가 멍하니 있는데 리치가 물었다.

“그게 뭔 소리냐?”

“브리온 경이 전사했습니다. 그··· 아무래도 바스알이 용사 소환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용사 소환에 성공했다고? 자세히 설명해라!”

리치가 다그치자 괴물이 바스알 침공 중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자 흑요정과 악마 역시 이게 보통 일이 아님을 알고서 얼굴이 굳었다.

“그래, 그러냐······. 그럼 그 용사는 신검을 뽑았더냐?”

신검은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용사의 상징이다. 만약 그걸 뽑았다면······

“아니요, 제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신검을 뽑진 않았다고 합니다.”

순간 흑요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신검을 뽑지 못했는데 뭔 수로 브리온을 죽여?”

“그게······ 맨손으로 목을 뽑아 죽였다고 하더군요.”

그게 대체 뭔? 믿을 수 없는 소리에 흑요정이 얼굴을 구길 때였다. 리치가 크큭 하고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브리온이 죽었다고? 이거 재미있군. 너는 이만 나가봐라.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괴물이 대회의실을 나가자 흑요정이 말했다.

“저 말을 믿어? 신검을 뽑지도 못한 용사에게 브리온이 죽었다는 말을?”

악마 역시 그 말을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바스알에서 지금까지 여러 명의 용사를 소환했지만 그들 모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였어. 신검을 뽑지 못하면 일개 필부와 다를 게 없지. 그런데 신검도 없이 브리온을 죽여? 농담도 적당히 해야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악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더 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듯 자리를 떠나려 하자 리치가 강력한 마력을 발산하며 외쳤다.

“자리에 앉아라! 아직 이야기 안 끝났다!”

같은 사천왕이라도 분명한 힘의 격차가 있기에 악마는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넌 저 말을 정말로 믿나?”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까 들어왔던 놈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왜 갑자기 거짓말을 하겠나?”

“뭐 그렇기야 하겠지만······.”

리치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흐흐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 브리온이 죽었다라?”

리치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한참 웃던 그가 갑작스레 웃음을 뚝 그쳤다.

“브리온은 사천왕 중 최강인데, 그럼 이거 큰일 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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