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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74화 (1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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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마는 사천왕끼리의 유대를 믿었던 모양이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단검을 내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톨마는 비명을 지르며 단검에 찔린 오른쪽 어깨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단검에는 독이 발라져 있던 모양이라 어깨를 찔린 톨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 산나? 이게 무슨······.”

“죽어라, 톨마!”

산나는 당황한 톨마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재빨리 단검을 휘둘러 수많은 상처를 남겼다. 순식간에 몸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톨마가 그제야 성을 내며 양손에 마력을 모았지만 그걸 산나에게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손이···!”

손아귀에 사악한 마력을 응축해 힘껏 휘두르려 했던 톨마는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검은 사슬에 손목이 결박됐다.

얼른 힘으로 끊어내긴 했지만 사슬 때문에 제법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면 산나의 단검이 그의 목을 따버리기에 충분했다.

“크윽! 갈리온, 어째서 너까지······.”

날카로운 단검에 베어 덜렁거리는 목을 억지로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톨마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땅과 부딪치면서 쿵 소리가 나자 갈리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이런 건 제일 약한 놈부터 죽이는 게 기본이거든.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고 자신의 약함을 탓하시게, 톨마.”

“그게 아니라··· 애초에 왜 우리끼리 죽고 죽이는······.”

톨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창이 흑기사 브리온을 죽일 만큼 강한 건 사실이니 그를 두려워하는 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적이 딱 한 명만을 살려주겠다고 해서 사천왕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게 맞는 일인가?

단지 죽음이 두려워 서로의 뒤통수에 칼을 찌르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니, 그런 식으로 살아남아서 대체 뭔 의미가 있나······.

톨마는 꺼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다잡으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주하겠다, 너희 모두를 저주하겠다! 너희 모두는 나와 같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게, 톨마.”

콰직!

강력한 마력이 톨마의 머리를 짓뭉개버렸다. 악마의 커다란 머리가 깨져 뇌수가 줄줄 흐르는데 갈리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겐 애초부터 찡그릴 눈이 없었지만.

“저주는 무슨? 난 영원히 살 걸세.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마법사로서의 긍지도 버리고 마법사가 된 게야.”

갈리온이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도 살아남을 것이고!”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마력이 산나의 몸을 습격했다.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지만 산나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그녀 역시 갈리온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움직이었다.

갈리온은 리치, 그리고 산나는 흑요정. 두 사람 다 서로를 죽이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산나, 이쯤에서 죽어주셔야겠어.”

갈리온이 마력을 일으켜 바닥을 흔들었다. 산나가 재빨리 위로 뛰어오르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엔 하늘에서 마법이 떨어졌다.

아무리 흑요정의 몸이 가벼워도 하늘을 날 수는 없는 법이기에 산나는 공중에서 단검을 휘둘러 마법을 쳐냈다.

그럴 때마다 부서진 마법이 날카로운 조각으로 변해 산나의 몸을 찔렀다. 순식간에 마법 수십 개를 베고 바닥에 착지한 산나의 몸은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마법 조각에 찔려 너덜너덜했다.

그러나 산나의 두 눈에는 아직 투기가 살아 있었고 고통 따윈 느끼지 못한다는 듯 곧바로 움직였다.

양손에 쥐고 있는 단검의 칼날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저기엔 악마인 톨마조차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한 독이 발라져 있었으나 리치인 갈리온에겐 별 효과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산나가 지금껏 독만을 믿고 싸워왔다면 사천왕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을 테니까.

우우웅! 칼날이 성난 듯 진동하더니 거기에 붉은빛이 맺혔다. 그게 단순한 마력이 아니라 오러라는 걸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김창은 산나가 오러를 다루는 걸 보고서 호오 소리를 냈다.

그가 원래 있던 세상에서도 오러는 요정 대가문의 기수 정도는 돼야 다룰 수 있었는데 요정 기수가 어느 정도 수준의 강자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산나는 과연 사천왕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실력자였다.

‘사천왕 중 제일 강하다는 브리온이 너무 쉽게 죽어서 이 녀석들도 죄 약해빠진 줄 알았는데, 실은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그냥 내가 너무 강한 거였군.’

요정 기수라는 건 승천할 자 바로 아래의 실력자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신성을 얻어 승천할 자가 될 수 있으니 결코 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단지 반신인 자신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 사천왕이 아무리 강해도 반신을 상대로는 어쩔 도리가 없을 텐데 너무 몰아붙였나. 김창이 괜스레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커흑······.”

잠깐 잡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새 승부가 난 모양이었다. 김창이 승자를 확인하고서 호오 소리를 냈다.

“내가 말했지, 산나. 나는 영원히 살 거라고. 너 따위가 내 목숨을 취하기엔 백 년은 이르다.”

목숨을 건 혈투에서 이긴 건 의외로 갈리온이었다. 리치는 물론이고 마법사 전반은 근접전에 약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대체 뭘 했는진 몰라도 상처 하나 없이 산나를 쓰러트린 게 보였다.

새빨간 색으로 빛나던 오러는 주인이 쓰러지자 힘없이 점멸했고 잠시 뒤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배에 큰 구멍이 난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던 산나가 쿨럭 피를 뱉어내며 말했다.

“제기랄, 이토록 추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톨마의 말대로 발버둥이나 쳐볼걸······.”

“너는 항상 후회만 하는군. 그래서야 전진할 수 없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후회하지 마라.”

갈리온이 손에 마력을 모아 산나의 머리를 터트렸다. 자비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었는데 과연 이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할 만했다.

“자기 혼자 살자고 친구들 죄 죽여놓고 뭔 개폼이야, 이 새낀.”

김창이 갈리온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치자 그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아까까진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그리고 내 뒤를 잡을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갈리온은 김창을 보고서 괜히 덤비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분명 싸웠다가는 브리온처럼 쪽도 쓰지 못하고 죽었을 게 뻔했으니까.

“크, 크흠······. 시킨 대로 했으니 약속은 지키겠지?”

일단 살기 위해서 산나와 톨마를 죽이긴 했는데 중요한 건 김창이 약속을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왜 굳이 같은 사천왕을 배신해가며 이 짓거리를 했겠는가? 전부 다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살려주지 않는다면 전부 다 헛수고가 될 뿐.

갈리온이 김창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또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뭘 눈치를 봐. 내가 거짓말하게 생겼나?”

“그, 그건 아닌데······.”

“아니면 길이나 안내해. 마왕한테 가자.”

갈리온은 이제 사천왕을 넘어 주인인 마왕까지 배신하게 됐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깟 주인이야 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아, 그러면 이쪽으로······.”

갈리온은 아까 그가 열고 나온 문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걷더니 벽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벽이 갈라지며 작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창이 물었다.

“이건 뭐냐?”

“아, 이건 마왕성 꼭대기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비밀 통로다. 원래 사천왕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은 빨리 가야 하니 이쪽으로 움직이지.”

게임으로 치면 보스룸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비밀 루트인 셈이다. 김창이 호오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갈리온이 비밀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길이 있으면 처음부터 이쪽으로 나오면 되지, 정문으로 나왔던 건 뭐냐?”

“그건 그냥 빨리 가기 싫어서······.”

어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아니고 뭔. 별 이상한 데서 꾀를 부리는군. 김창이 허 하고 웃는데 갈리온이 웬 차원문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통과하면 마왕성 꼭대기까지 바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마왕이 있지.”

“혹시 이거 통과하면 이상한 곳으로 가는 거 아닌가?”

“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요즘 나랑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나 속여서 이상한 데로 유배 보내는 놈이 많아서 말이야.”

갈리온이 그런 방법이 있었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닌 거지?”

“···그거 훌륭한 생각이긴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그런 걸 준비할 틈이 어디 있겠나.”

“하기야.”

김창이 갈리온과 함께 차원문을 통과했다. 반대쪽으로 나오니 사악한 마력이 느껴지는 게 확실히 제대로 온 건 맞는 듯했다.

“저기 있는 게 마왕이냐?”

저 멀리 보이는 옥좌 위에는 금발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김창이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키자 갈리온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창이 웃으며 말했다.

“왜, 마왕의 얼굴을 보니까 이번엔 날 배신하고 저쪽에 붙을까 고민이라도 되나?”

마음을 들킨 듯 몸을 움찔하던 갈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배신하려면 해도 된다. 단지 너는 네 행동에 책임을 지면 될 뿐이야. 아까 네가 말했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후회하지 말라고. 그래서 후회하지 않을 각오는 됐나?”

갈리온은 김창과 마왕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는 두 사람의 강함을 대략 알고 있었다. 싸움이라는 건 직접 붙어봐야 정확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에 누가 반드시 이긴다는 건 없지만 그래도 승률을 따져볼 수는 있었다.

머릿속으로 짧게나마 생각을 정리한 갈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갈리온, 내 마법을 네게 바치겠다. 그러니 부디 원하는 대로 써주게.”

배신자 놈을 뭘 믿고 쓰란 말인가? 김창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저 멀리 옥좌에서 마왕이 몸을 일으켰다.

“갈리온, 무슨 일이냐? 그리고 그 남자는 또 누구고?”

마왕의 목소리는 음울하면서 매력적이었다. 울림이 있는 목소리와 잘생긴 외모는 저 금발의 청년에게서 호감을 느끼게 했지만 그 본질이 사악한 마왕인 것을 생각하면 결코 느껴선 안 될 감정이었다.

“갈리온?”

갈리온이 얼른 대답하지 않자 마왕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깐 몸을 움찔하던 갈리온이 한숨과 함께 답했다.

“이 남자는 김창이요. 당신을 죽이러 온 용사지.”

마왕은 잠깐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는 그 용사를 내게 안내했군. 왜 그랬지? 날 배신하기로 한 거냐?”

“나는 그저······.”

갈리온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마왕이 말했다.

“보아하니 다른 사천왕은 전부 죽은 모양이군.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래서 용사 김창이라고 했나? 다른 세상에서 왔을 테지. 혹시 신검을 뽑았나?”

김창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게 신검으로 보이나?”

“그냥 칼이군. 벼락의 힘을 머금어 번쩍거리고 있지만 그래도 그냥 칼이야. 바스알의 공주가 말하지 않던가? 신검의 힘이 없으면 날 죽일 수 없다고.”

“한번 보자고. 칼로 찌르면 죽나 안 죽나.”

김창이 씩 웃자 마왕이 입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건방진 놈이로고.”

빛이 번쩍였다. 손을 들거나 마력을 모으는 듯한 행동이 전혀 없었으나 갑작스럽게 마법이 발사됐다.

아무런 전조도 없는 공격이었기에 김창조차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과연 마왕이라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확실히 이건 피하기 어렵겠군······.

“좀 빌리자.”

김창이 갈리온의 목덜미를 붙잡더니 자신 쪽으로 홱 끌고 왔다. 갈리온이 어어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 위로 불길이 스쳐지나갔다.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새하얀 색을 가진 불꽃은 생명의 함 덕분에 반쯤 영구적인 생명을 가진 리치의 영혼까지 태워버렸다.

“끄아아악! 이 씹새! 살려주겠다면서 날 방패로······.”

갈리온이 불꽃 속에서 타들어 가며 욕설을 내뱉었으나 곧 들리지 않게 됐다. 김창은 전부 타버리고 손아귀에 남은 갈리온의 로브 조각을 가만히 쳐다보다 벌컥 소리쳤다.

“이 개자식, 감히 갈리온을 죽여?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군.”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마왕이 얼굴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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